<40화> 협박과 교섭사이
“음, 그렇게까지 놀라줘서 보람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일단 좀 앉는 것이 어떻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미르바프... 대위!”
우리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는 미르바프 대위였다.
우리를 잡아서 창고(?)에 처박은 주역으로 추측되는 그가 왜 여기에 있는거지?
힐끔거리며 퇴로를 살피는 나를 보던 미르바프는 준비된 의자를 손짓하며 말했다.
“이해도 안되시고 불안하시겠지만 일단 앉으시죠. 저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말이죠.”
사실상 퇴로도 막혀있고,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이야기라도 들어보자는 생각에 내가 먼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씩 눈치를 보다가 의자에 앉았고, 모두 자리에 착석하자 미르바프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 * * *
마다카트 섬은 총독과 수비대장의 이원적 통치 구조를 가진다.
수비대장이 수비 병력의 지휘권을 가지고 섬의 방어와 항구 관리를 맡으며, 그 외에 도시의 관리, 세금 징수, 농장과 마을에 대한 행정권 등 대부분의 통치권은 총독이 가지는 구조다.
얼핏 보기에는 총독의 권한이 엄청나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 병력의 군령권을 가지는 수비 대장의 힘이 더 강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은 쿠샤 왕국 측에서도 잘 알고 있었고, 수비 대장은 3~5년을 임기로 칼같이 교체되고는 했다.
하지만 총독의 경우는 조금 애매했는데, 실제로 법에 명시된 임기는 최대 5년이지만 인수인계가 워낙 복잡하기도 하고 다들 꺼려하는 직책인지라 임기를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현임 총독은 본국의 정치적 상황 등이 더해지는 바람에 더 심각해서, 무려 12년째 총독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비록 군령권은 수비 대장에게 있다고 하지만, 치안과 관련하여 파견된 일부 병력은 총독의 명령을 듣게 되어 있었다.
그 수가 비록 100여명에 불과해서 전체 병력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할지 몰라도, 걸핏하면 바뀌는 수비 대장과 달리 이들은 순차적으로 돌아가면서 총독의 밑에서 몇 번이나 일을 하면서, 더 익숙한 명령권자가 총독이 된 것이다.
심지어 총독은 중간급 간부들과 병사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포섭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닷새 전, 새로 부임한 수비 대장이 한 달이 넘도록 술과 여자만 탐하는 쓰레기 짓을 벌이자 결국 총독이 칼을 뽑아들었다.
겉으로는 무능하고 욕심 많은 수비 대장을 처단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섬을 지배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수비 대장이 변변한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잡혀버리자 총독은 본색을 드러냈다.
언제 손을 잡았는지 근처의 해적들을 끌어 모았고, 상선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이미 총독의 사병이 되어버린 수비대 일부가 해적선에 타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아마 우리를 공격했던 해적선에도 수비대 일부가 타고 있었던 것 같다...
* * * * *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우리가 쿠샤 왕국에 소식이라도 전달 할까요?”
사실 그렇지 않나?
그의 말대로라면 이건 반란이다.
심지어 군대를 동원하고 지방에 거점을 마련한, 상당히 본격적인 규모의 반란이다.
민간인들이 건드릴 수 있는 수준의 사건이 아니라는 뜻이지.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반란 소식을 외부로 전하는 것 정도가 최선이다.
하지만 미르바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후, 죄송하지만 그건 어려울 겁니다. 아마 며칠 후면 당신들에게 패퇴했던 해적선들이 돌아올거고, 당신들은 그대로 다 잡혀 죽고 화물과 선박은 빼앗길테니까요.”
“아니, 그게 무슨!”
“잠깐 조용해봐, 네이선. 그래서 원하는 것이 뭡니까?”
나와 달리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볼라트를 한 번 힐끔거린 미르바프가 한 숨과 함께 계획을 털어 놓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당신들 덕분에 반란을 제압할 최고의 기회가 왔습니다. 총독을 따르는 해적들과 병력 일부가 이 섬을 떠났으니까요. 비록 며칠 내에 돌아오겠지만, 그 전에 총독만 제압한다면 뒷처리는 문제가 아닐겁니다.”
“그래도 남은 병력이 많을 텐데요?”
“지금 섬에 남은 병력은 약 700명입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하기로 한 자들이 200명 정도죠.”
나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말했다.
군사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200명으로 500명을 이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대충 안다.
게다가 무슨 현대 보병과 원시인의 싸움도 아니고, 같은 훈련을 받고 같은 무장을 갖춘 병력끼리의 전투에서 두 배가 넘는 병력차를 극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기습이라고 해도 힘든 숫자입니다, 두 배가 넘는 병사를 무슨 수로 제압하려는 겁니까?”
“물론 200대 500이라면 힘들겠죠. 하지만 당신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미친 작자가?!
우리가 머릿수는 조금 된다고 하지만 그래봐야 결국 민간인이다.
아니, 이클로나랑 메를리오네는 아니기는 한데 일단 미르바프가 보기에는 민간인이라는 뜻이다.
단체전이라면 민간인은 절대로 군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전생이나 현생이나 똑같이 통용되는 진리다.
“말도 안되는 소리! 아무리 난폭하다고 해도 고작 선원입니다, 민간인이라구요! 민간인 수백으로 군대와 싸우라는 겁니까?”
“아, 아, 흥분하지 마시죠. 저도 그 정도로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양 손을 내밀며 흥분을 가라앉히라는 제스쳐를 취한 미르바프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단지 적당한 소요만 일으켜 주십시오. 다행히 제가 지금 항구 쪽 치안을 맡고 있습니다. 총독은 생각보다 절 신뢰하고 있거든요. 당신들이 적당한 소요를 일으키면 내가 중립적인 병사들로 200명 정도를 파견할겁니다. 무력충돌은 피하라고 지시해 놓을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당신들이 아직 불리할 것 같군요.”
“그래서 말인데...”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결심한 듯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들이 미끼가 되었으면 합니다.”
“......”
잠깐 동안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미끼의 본분은 사냥감을 유혹하고 먹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서도 딱히 역할이 다르지 않았다.
“거절한다면?”
“...뭐, 풀어드리죠. 배로 돌아가셔도 좋고, 섬 어딘가에 숨으셔도 좋습니다. 아, 총독에게 밀고하는 방법도 있군요? 상관없습니다. 당신들이 이 곳을 나가면 난 바로 탈옥수들을 추격할거고, 그 죄를 물어서 당신들의 선단 전원을 체포할겁니다. 그리고 내가 굳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해적선이 돌아와서 항구를 봉쇄하면 총독이 그렇게 하겠죠.”
“......”
망할, 외통수로군.
그나저나 볼라트의 표정이... 너무 불안하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여기 볼라트 항해사를 우리 선단으로 보내주시오. 그라면 현 상황을 잘 설명하고 적당한 소요를 일으키게 선장님들을 설득할 수 있을겁니다.”
“흠, 좋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우리가 미끼를...”
“아뇨, 저도 인질 한 분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미끼 역할은 두 분이면 충분할겁니다.”
“이봐요, 미끼라면 죽을 확률이...!”
“아 참, 그걸 설명 드리지 않았군요. 행적이 파악된 탈옥수 두 명을 추격하기 위해 전 100명 정도를 파견할 겁니다. 총독의 개들이죠. 그리고 그들에게 탈옥수들의 현 위치와 추격 상황을 공유하는 것은 제가 합니다.”
그렇다면 살아 날 확률이 높아진다.
우리가 미끼 역할을 시작하면 바로 총독을 치기위해 미르바프가 움직일테니, 추적이 엉망진창이 될 것은 뻔했다.
그래도 훈련된 병사 100명은 엄청난 부담이다.
그럼 네이선이 함께... 휴 안되겠구나.
“네이선, 네가 남아.”
“리안?! 그게 무슨말이야? 여기서 제일 실력이 좋은건...”
“알아. 하지만 도망다니려면 우르타처럼 몸놀림이 빠른게 좋아. 추격당하다가 전투를 벌인다? 이미 망한거라구.”
“하지만...”
뭔가 할 말이 많은 억울한 표정으로 네이선이 입을 다물자, 아까부터 기묘한 표정을 하고 있던 볼라트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리안 보좌관님? 제가 그... 배로 가더라도...”
“물론이죠! 항해사님은 우리 걱정은 마시고 선장님들이나 잘 설득해 주세요. 우리가 대충 알아낸 것들과 함께 말씀드리면 이해하실겁니다.”
억지로 짓고 있는 미소가 어색해서 얼굴이 푸들푸들 떨리는 것 같다.
사실 선단으로 가서 소식을 알리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를 선뜻 자신에게 양보했으니 볼라트로서도 이해가 안되겠지.
하지만 아까 전에 볼라트의 표정을 봤다면 절대 함께 뭔가를 하겠다고 생각 못할거다.
마치 이제 막 불 지르기 전의 방화범 같은 표정이었거든.
“대충 정리된거요? 빨리 움직입시다. 사실 시간이 그리 여유롭지는 않소.”
* * * * *
“헉, 헉, 헉... 우르타, 얼마나 가까워?”
“헥, 헥... 딱, 딱 3분만 쉬자, 그래도 되, 될거 같아.”
우리는 풀 숲 사이에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약 1시간 전, 볼라트가 제대로 전달한 것인지 항구쪽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왔다.
미르바프는 살짝 초조한 기색을 보이던 표정을 풀고 주먹을 불끈 쥐더니 바로 우리에게 미끼 역할을 시작하라고 말했다.
움직여야 할 지역, 숨을만한 곳, 필요할 경우 연락할 장소 등 필요한 사항들은 이미 달달 외운 상태였기 때문에 몸만 움직이면 될 일이었다.
처음 30분은 어렵지 않았다.
100명이라고 해봐야 수색지역이 넓다보니 수색망에 한계가 있었고, 처음에는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것이 조금 재밌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실수로 한 번, 두 번 수색대와 마주쳤고, 고작 30분만에 지금은 수색대를 제대로 떼어내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르타의 인간을 초월한 시력으로 먼저 수색대를 발견해서 망정이지, 네이선이랑 왔으면 이미 잡혔거나 분투 끝에 장렬하게 전사했을 것 같다.
그나저나 진행을 잘 되고 있으려나?
10분쯤 전에 도시 쪽에 화광이 피어오르는 것은 봤는데, 워낙 거리가 떨어져서 상황은 잘 모르겠다.
상황이 끝나면... 저 지긋지긋한 추격대 놈들이 먼저 빠지겠지...
“리안...가야겠다.”
“그래, 어디로 가야해?”
“이쪽, 아니, 이쪽이 낫겠네.”
“가자...”
이제야 겨우 깨달은 건데, 배를 타는 사람들의 최고 문제는 지구력이 떨어진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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