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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42화 (42/420)

<42화> 이번 세상은 쉬운 일이 없다

그렇게 단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전격적인 반란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온갖 사건, 사고로 시끄럽기는 했지만 섬의 거주민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를 정도로 은밀하고 조용하게 진행된 작전이었다.

사실 반란을 일으킨 쪽은 총독 쪽이 먼저니까 진압이라고 봐야겠지만, 중앙에서 진압군이 온것이 아니고 총독에게 거짓으로 충성하던 내사과장 미르바프 대위가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반란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미르바프는 상선대 약탈에 실패한 해적선이 뿔뿔이 흩어진 틈을 노렸다.

그 해적선에는 그 전부터 이미 해적, 강도, 양아치에 가깝던 100여명의 병력이 타고 있었고, 그들은 -해적까지 포함해서- 모두 총독을 극렬하게 지지하는 자들이었다.

남은 병력 중 중립에 가까운 200여명의 병력은 소요를 일으킨 선원들을 제압하기 위해 항구에 파견되었으며, 그날 탈옥한 첩자로 의심되는 자들을 쫓기 위해 총독의 칼을 자처하는 치안대 병력 100여명이 산과 들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남은 병력의 절반 정도를 이끌고 반기를 든 미르바프는 병영에서 주둔하던 100여명의 병력을 제압함과 동시에 총독부를 들이쳐서 총독의 목을 베었다.

총독부에 상시 경계를 하던 병력이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기습적인 공격에 대응하기에는 총독의 군 지휘력이 너무 떨어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총독부의 이변을 눈치 채고 황급히 복귀하던 치안대는 이미 총독부가 미르바프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알자 공황상태에 빠져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지리멸렬 박살이 나버렸고, 항구에서 복귀하던 중립 병력들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순순히 미르바프에게 협조하기로 했다.

* * * * *

온 몸이 비명을 지르는 기분이다.

허리부터 허벅지, 종아리는 이해가 되는데, 뛰기만 했음에도 목과 어깨는 왜 아픈 건지 도대체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으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기는 한데... 정말 침대에서 빠져나갈 엄두가 안난다.

...응? 침대? 기절한 사이에 구조 된 건가?!

겨우 눈을 뜨고 안돌아가는 목을 돌려 주변을 살펴보자 제법 괜찮은 수준의 방이었다.

반대쪽 침대에는 우르타가 간헐적으로 끙끙거리며 누워 있었고, 저쪽 테이블에는 누가 엎드려서 자고 있는데... 네이선이군.

그러고 보니 옷이 없... 태어났을 때 그 모습 그대로구나.

그냥 이불 걷고 나갔으면 큰일 날 뻔했다.

하긴 땀에, 진흙에, 각종 오물에, 오줌까지 싼 옷을 그대로 입혀서 침대에 눕히기는 그랬겠지.

그런데 누가 씻겨 준거지?

왠지 모를 민망함에 몸을 꼼지락거리는데 문이 열리며 사람이 들어왔다.

“리안 보좌관, 깨어났습니까?”

“어...? 볼라트 항해사님?”

“다행이군요, 완전히 정신을 잃어서 걱정했습니다.”

“으윽, 온 몸이 아프기는 한데... 괜찮습니다. 어떻게 된겁니까?”

“다행히 미르바프라는 사람의 의도대로 잘 풀렸습니다. 덕분에 선박 수리 기간도 더 짧아질 것 같구요.”

“우리 쪽 피해는요?”

“단순하게 소요만 일으킨거라... 약간의 몸싸움이 있기는 했지만 크게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대화를 하며 자연스럽게 테이블 한켠에 있던 물을 따라서 건네주던 볼라트가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일전에는 음, 고마웠습니다. 그... 저, 죄, 죄송하기도 하고...”

“하하, 아야야! 벼, 별말씀을요.”

“아참, 제가 아픈 분을 너무 귀찮게 했군요. 푹 쉬십시오. 선장님께서도 쉬라고 하셨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한 볼라트가 나가자, 테이블에 엎드려있던 네이선이 슬그머니 일어나서 다가왔다.

“리안, 좀 괜찮아?”

“아니, 안괜찮아... 죽을거같아...”

“그, 옷 입는거 도와줄까?”

“으엑! 괜찮아,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그나저나 얼마나 지났어?”

“음, 어제 새벽이 되기 전에 상황은 끝났고, 지금은 밤이야.”

“하루 지났네?”

“응, 선장님도 걱정 많이 하셨어.”

“어? 선장님이?”

오, 조금 감동이다.

말뿐일지 몰라도 그래도 관심 가져주는게 어디야?

* * * * *

많이 다친 것도 아니고 고작 근육통이었기 때문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복귀를... 했을 리가 없지!

넘어진 김에 쉬어가는 자세는 현실을 살아가는 직장인에게 필수적인 마인드다.

나는 아주 교양 있고 정상적인 직장인답게 며칠 동안 침대에서 우르타와 낄낄거리며 뒹굴거리다가 너무 지겨워서 몰래 밖으로 나온 참이다.

TV도 컴퓨터도 없는 이 세상은 방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굉장히 제한적이다.

그나마 상대방이 이성이라면 이런저런 여러 가지 놀이(?)를 해보겠지만 우르타랑 무슨 놀이를 하겠어?

우르타 수준에 맞춰서 놀고 있으면 다 큰 조카랑 놀아주는 기분이다.

응, 별로 재미가 없었다는 뜻이다.

딱히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아프다는 사람들이 몰래 나돌아 다니는 것을 다른 선원들에게 들키면 좋은 소리를 듣기는 힘들 것 같아서 네이선도 떼놓고 우르타와 둘이서만 거리를 걷고 있는데, 우르타가 낮은 신음과 함께 나를 벽 한쪽으로 잡아끌었다.

“윽, 볼라트 항해사야.”

“에이, 하필이면...”

벽 뒤에 숨어서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보니, 볼라트 항해사가 대여섯명의 무리와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뭔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는거야?

“볼라트랑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누군지 알겠어?”

“음... 어디서 본거 같기는 한데...”

“관둬라, 힐레아테(볼라트의 원 소속 선박, 선단 기함) 선원들인가보지 뭐. 저쪽으로 돌아가자.”

무사히 항구를 빠져나간 우리는 선원들이 별로 안다니는 거리로 가서 신나게 놀았다.

음, 조금 돈이 깨지기는 했지만 원래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 다음에는 이렇게 스트레스를 잘 풀어줘야 병이 안되는 법이다.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는 말도 있잖아?

그렇게 낮에는 자고, 밤에는 광란의 밤을 보낸지 3일, 언제나처럼 네이선이 노크 없이 불쑥 들어왔다.

문 열어주기 귀찮아서 열쇠를 줬더니 아주 제 멋대로다.

“어휴, 어제도 술마신거야? 나 빼놓고 노니까 좋아?”

“...시끄러, 우리라도 놀아야지... 더 잘거니까 나가.”

사실 너한테는 조금 미안하기는 한데, 어쩌겠냐? 우리라도 놀아야지.

“선장님 호출이야. 오늘 점심쯤에 출항이니까 준비해서 복귀하래.”

“...엉? 벌써?”

“벌써는 무슨... 벌써 8일이나 지났다구!”

아니, 원래 수리하는데 최소 10일 걸린다고 한 거 아니었어?

“수리도 안끝났을텐데?”

“몰랐어? 미르바프가 섬을 장악한 뒤에 감사의 표시라고 우리 선단 수리를 최우선으로 해줬어. 그래서 어제 수리는 끝, 지금 내려놓은 화물을 다시 넣는 중이야.”

“아, 좋은 시절 다 갔네.”

“빨리 씻고 나와! 지금처럼 술 냄새 풍기면 선장님이 싫어할걸?”

그래, 그건 그렇지. 아파서 쉬라고 한 부하 놈이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복귀하면 어떤 상관이 좋아하겠어?

안그래도 눈코뜰새 없이 바쁜 와중에 배려해서 빼준건데 말이야.

* * * * *

“선장님! 보좌관 리안 외 1명, 복귀했습니다.”

“오, 리안 보좌관. 몸은 좀 어떤가?”

“염려해주신 덕분에 좋아졌습니다!”

“아니, 난 숙취는 없냐고 물어본건데... 하하하, 괜찮다니 다행이군! 대충 끝났으니 출항 준비하지.”

으윽, 이미 알고 계셨나...?

하긴 테일러처럼 주도면밀한 사람이 모르는게 더 이상하기는 하겠네.

그래도 기분이 좋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선교에서 벗어나는데 좌현에서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문 철거 완료! 이클로나 출항!”

배를 부두에 고정하던 계류색이 걷어지고, 이클로나가 거체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도 뱃사람이 다 된 것인지, 넓게 펼쳐진 바다를 보니까 가슴이 웅장... 해 지기는 개뿔, 또 얼마나 지겨운 시간을 보내야 할까?

벌써부터 한숨만 나온다.

며칠째 아무런 문제없는 지루한 항해가 계속되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라면 선원들이 더 이상 내게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호칭도 바뀌었지.

“갑판장님, 함수창고 정리 끝났습니다.”

“어, 조금만 기다려. 내가 확인할거야.”

그래 임시라고는 하지만 갑판장이 되었다.

아마 최연소 갑판장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갑판장은 할 일이 더럽게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소하고, 정리하고, 당직표도 짜야하고, 선저(배의 최하층 밑바닥)의 밸러스트 구역에 고이는 물도 퍼내야 한다.

물론 내가 직접하는 것은 아니고 선원들을 시키는거지만, 지시하고 검사하고 인원을 나누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다.

심지어 나는 테일러에게 항해사 수업도 받고 있잖아.

진짜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고학생이 된 기분이다.

전생에서도 이렇게 힘들게는 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이번 생은 전생보다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구나?

“야 이 새끼야! 너 이걸 정리라고 한거야?! 일 이따위로 할거면 뛰어내렷!”

심지어 관리직도 힘들다...

요즘들어 멍청하고 게으른 부하들을 데리고 일을 하는 것은 정말 진이 빠지는 일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아, 거 참, 아무리 갑판장이라도 말 좀 가려서 하쇼, 나이도 어린게...”

“뭐? 다시 지껄여봐, 혓바닥에 칼침 놔줄까?”

심지어 그 부하들이 나이도 많고 성질도 더러우면 정말 힘들다.

나라고 내 나이의 두 배쯤 되는 선원한테 막말하는 것이 편하겠어?

하지만 이렇게 안하면 어리다고 얕잡아보고, 무시하고, 멸시하고, 경시하고... 하여간 일을 진행 시킬 수가 없다.

사실 이렇게 윽박지르는 방법은 초반에나 잠깐 유지할 수 있지, 뒤로 갈수록 선원들의 불만이 높아져서 계속 쓸 수 없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약빨이 떨어지기 전에 빨리 자리를 잡아야겠다.

언제까지 어르신(?)들에게 이놈, 저놈, 이새끼, 저새끼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말 좀 따박따박 잘 들으라고 이 해파리 촉수 같은 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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