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뱃사람들의 악몽(1)
나는 얼굴을 때리기 시작한 빗방울을 쓸어내리며 다시 한 번 꽤 낮게 느껴지는 하늘을 보았다.
폭풍은 천천히 다가오는 것 같았지만 도저히 피할 수 없도록 넓은 지역을 장악하며 결국 우리를 품에 안았다.
폭풍을 육안으로 보고 다 피할 수 있다면 폭풍에 난파하는 선박이 매해 수십, 수백 척씩 나오지 않겠지...
“우르타, 내려와! 미즌 마스트(주 돛대(메인 마스트) 후방의 작은 돛대)에는 누가 올라갔어?”
“알빈이네. 지금 내려가고 있어! 아, 아니 내려가고 있습니다!”
요즘 우르타는 공식적인 일에서는 내게 존댓말을 쓰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자기가 반말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다른 오래된 선원들도 반말을 하는 것이 편해진다는 이유다.
맨날 어린애인줄 알았는데 이제 제법 어른스러운 생각도 하고 그런다.
돛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이미 다 접었고, 파고도 대충 4미터를 넘나들고 있다.
사실 이 정도면 배 위에서 균형을 잡기도 어려워서 대부분 허리나 팔에 로프를 감고 있었다.
하늘은 이제 아주 새까맣다. 천둥과 번개가 심심찮게 울리고, 굵어진 빗줄기 때문에 눈을 뜨기도 힘들다.
저쪽 멀리서 우당탕 소리와 비명이 울린다.
누가 미끄러져서 넘어진 모양이다.
재수 없으면 어디 한군데 부러지거나 터졌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바다에 빠지는 것보다는 낫다.
지금 상황에서 바다에 빠진다면? 살아남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애초에 배위에 남은 사람들도 구조를 시도하지도 않을 테니까.
선교에서는 선장님이 직접 이를 악물고 타륜(방향 조작용 핸들)을 잡고 계셨다.
지금처럼 바다가 미쳐 날뛰면 선박의 방향이 굉장히 중요하다.
너울과 파도를 측면으로 잘못 받으면 그대로 전복되어버리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야는 제한되어있지, 바람은 미친년 널뛰듯이 불지, 해류까지 엉망진창이라서 잠깐만 실수하면 배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틀어져 버린다.
배가 자동차나 마차처럼 방향전환이 바로바로 되는 것도 아니라서 한번 방향이 틀어지면 되돌리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까 타륜을 잡는 사람의 실수 한 번에 이클로나에 탑승한 70여명의 목숨이 날아가는 셈이다.
그 정도 압박감이면 보통 사람은 긴장을 못 이겨 실수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까 선장님이 직접 타륜을 잡으신 거겠지.
“으아아악! 사, 살려...!”
심상치 않은 비명이 울리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파도소리, 바람소리, 천둥소리에 휩쓸려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저 단말마의 끝은 ‘풍덩!’이라는 효과음이었을 거다.
한 사람의 생명이 끝나는 소리 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애도할 시간도 없었다.
선장님을 보조하기 위에 옆에 서 있던 일등항해사 알리샤의 고함이 터져나왔다.
“함내 총원 좌현! 좌현으로 붙어!”
왠지 배가 오른쪽으로 점점 넘어지는 것 같더니, 키만 가지고 수습하기 어려워진 모양이다.
나도 메인 마스트 하단과 내 허리를 연결한 로프가 풀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좌현으로 이동중인데, 알리샤가 소리쳐서 나를 불렀다.
“갑판장! 갑판장, 선장님 호출!”
이런 젠장... 지금 위치에서 선교까지는 대략 10미터 정도.
평소라면 가로 지르는데 5초도 안걸릴 거리지만, 지금은 무슨 마라톤 코스마냥 길게만 보인다.
심지어 선교까지 가기에는 허리에 묶고 있는 줄도 짧아 보인다.
원래라면 줄이 허용하는 곳까지 다가가서 새로운 지지 로프를 만들고 풀어야겠지만, 당장 주변에 로프가 보이지도 않는 관계로 벌벌 기다시피 하며 최대한 선교까지 가서 소리를 질렀다.
“선장님! 따로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하부 선창으로 가면서 우현 쪽 파손 여부를 알아보게! 점점 균형이 틀어지는 느낌이야!”
“네! 알겠습니다!”
테일러 선장은 다른 선원들이 듣기 힘들도록 적당히 소리의 크기를 조절했지만, 다행히 한 번에 무슨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진짜 내부로 들어가기 싫은데...
어떻게 보면 갑판 위가 훨씬 더 위험해 보이지만, 일단 로프가 풀리지만 않으면 갑판 위쪽은 오히려 안전한 편이다.
균형을 잡기는 힘들지 몰라도 위험을 피해 몸을 움직일 공간도 여유롭고, 상황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뭐 이런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상황 변화는 몇가지 되지도 않고, 그 상황을 가장 먼저 알아도 취할 방법이 마땅치 않지만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미지의 공포 아니겠나?
창도 별로 없는 선 내부에서는 외부의 변화에 아무래도 민감하게 반응하기 힘들다.
게다가 내부에 집기가 더 많은 만큼 흔들릴 때 위험하기도 더 위험하다.
바다에 빠질 확률? 재수 없게 배가 손상되면 배 안에서 익사하는 기막힌 경우가 생긴다.
“이런 젠장, 판자랑 격목! 빨리 막아!”
내가 우격다짐으로 끌고 내려온 선원 다섯 사람에게 한 쪽 벽면을 손짓하며 소리치자, 선원들이 비틀거리며 창고에서 꺼내 온 판자와 단단한 목재를 들고 세차게 바닷물이 뿜어져 나오는 자리를 임시로 수리하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언제 다쳤는지 손에서, 머리, 허리, 허벅지...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비치고 있었다.
이번에 수리한 구역 같은데, 수리한 목재랑 기존 목재와의 불균형 때문에 갈라진 모양이다.
아니면 수리한 목재가 불량일수도 있고... 하긴, 지금 그게 중요한건 아니지.
바닥에는 이미 발목 위까지 물이 차 있었지만, 이 정도로는 배가 기울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보다 더 심각한 곳이 더 있다는 뜻이다.
대충 물이 새어나오는 양이 줄어들었다.
덧댄 판자의 틈으로 아직 바닷물이 쫄쫄거리며 흘러들어오기는 하지만, 아마 당분간은 괜찮을거다.
“고생들 했는데, 아무래도 밸러스트까지 가야겠다. 맨 뒤에 오는 사람이 격문(선박의 구획을 나누는 문. 수밀(水密)문으로 침수 시 구간 폐쇄가 용이하도록 단단하게 잠글 수 있음) 제대로 폐쇄하고 나와. 가자.”
흔들거리는 배, 좁은 통로, 굴러다니는 잡동사니... 거기에 무겁고 커다란 수리용 자재까지 들고 가려니 거의 초단위로 욕이 나온다.
특정 누구를 욕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거지같은 상황과 계속 늘어나는 상처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나오는 욕들이다.
그래도 경력이 좀 되는 선원들로 데리고 와서 그런지 반항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비록 수많은 선원중에 자기들이 걸린 것이 재수 없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당장 자신들이 포기하거나 어깃장을 놓았다가는 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겨우 선박 최하단에 있는 밸러스트 구역까지 도착했다.
선원 한 사람이 넘어지면서 손가락 두 개가 부러져 완전히 뒤로 넘어갔지만, 옷을 찢어 응급처지만 했다.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한 손을 제대로 못 쓰는 사람을 혼자 올려 보내는 것이 더 위험하다.
그리고 갑판에 올라가면 로프로 몸을 고정해야 하는데, 아무리 로프 매듭에 능한 선원들이라도 한 손으로 단단하게 매듭을 짓는건 어려운 일이니까.
“해치 열까요?”“
“......”
나는 바닥에 단단하게 잠겨있는 해치를 노려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물의 힘이 얼마나 센지는 잘 알고 있다.
만약에 이 해치 아래쪽이 물로 가득 차 있다면?
잠금장치를 푸는 순간 최소 한 명은 폭탄처럼 튀어나오는 해치에 맞아 부상을 입을 거고, 그 뒤로는 여기까지 침수될거다.
나는 각오를 다지고 가장 멀쩡한 두 사람을 불러서 말했다.
“너는 저쪽, 너는 반대쪽... 폐쇄하고 와.”
“보좌관, 아니 갑판장! 지금 무슨...”
“에이씨, 지금 시간 없는거 알면서 왜 그래? 별일 없으면 그냥 문 열고 나가면 되는거야. 알잖아?”
“하지만 혹시라도...”
“만약 여기를 포기할 상황이라도 빨리 움직이면 우리는 탈출할 수 있다, 걱정 마. 나도 여기서 죽기 싫으니까.”
잠시 주저하던 두 사람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척비척 움직였다.
두 사람이 격문을 폐쇄하고 돌아오자, 나는 손가락이 부러져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선원을 불러서 말했다.
“네가 저쪽 격문 앞에서 대기해. 상황 봐서 우리가 그쪽으로 달리기 시작하면 격문 열어. 한손으로 하기 힘들겠지만, 손가락 열 개가 더 부러져도 해야 해, 알지?”
내말을 다 들은 그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흉악하게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흐... 거, 벌써 두 개 부러졌는데 열 개가 더 부러지라니, 저주요 뭐요? 여튼 알겠수다. 조심하쇼.”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모두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떠올랐다.
사실 우리가 나가려는 쪽 격문을 열어놓으면 더 빨리 탈출할 수 있을거다.
하지만 굳이 잠가버린 이유는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에 순간적으로 여기 있는 모든 인원이 격문을 제대로 닫을 수 없는 상태가 되버린다면?
그럴 확률은 정말 극단적으로 낮겠지만 원래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기도 하고, 아무 기대 없이 산 복권이 당첨되고, 멀쩡하게 길가다가 번개 맞고, 희박한 확률을 뚫고 번개를 맞고도 안 죽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들 떨어져, 내가 연다.”
나는 선원들이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해치를 열기 전에 귀를 가져다 댔다.
소음이 심하기는 하지만 혹시라도 아래쪽에 심각한 침수가 발생하고 있다면 잘하면 들릴지도 모른다.
...그럴 리가 없지.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잠금장치를 하나씩 해제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열어놓거나 기본 잠금장치 하나만 해놓지만, 폭풍을 대비하면서 대부분의 격문과 해치는 완전히 폐쇄해 놓았다.
특히 자주 다니는 통로구역도 아닌 이런 곳은 밀폐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이다 보니 잠금을 해제하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렸다.
잠금 장치를 절반쯤 해제하고 있는데 한 녀석이 다가와서 해치위에 올라서서 엎드렸다.
“뭐야?”
“아, 혹시 모르잖소? 재수없게 내가 튕겨져 나가면 갑판장님이 구해주시구려.”
“에라이, 그 몸을 튕겨낼 정도면 나는 살고? 여튼 자처한 김에 잘 눌러봅시다.”
목숨걸고 도박하는 판에 갑자기 가슴 한 쪽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잠금장치를 마저 해제했다.
마지막 잠금장치가 해제 될 때쯤에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우리가 위험할 정도로 물이 차 있다면 이미 마지막 잠금장치 정도는 부숴버리면서 물이 튀어올랐을 테니까.
해치위에서 부들부들 떨던 녀석이 머슥한 표정으로 내려서고, 나는 천천히 해치를 들어올렸다.
다행히 해치까지 물이 차오르는 거지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혼자 조용히 중얼거렸다.
“씨발, 망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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