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뱃사람들의 악몽(2)
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멍하니 해치 아래를 보고 있자, 주변의 선원들이 하나씩 다가와서 머리를 디밀었다.
아래로 이어지는 사다리가 고작 세 칸쯤 보이고 그 아래에는 무슨 욕조라도 된 것처럼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워낙 출렁거리고 있어서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물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차오르는 것 같다.
파손되어 물이 새는 부분을 막는 것이 최선이지만 현실적으로 저 물 속에서 작업을 할 수는 없는 노릇, 난 빠르게 포기했다.
“닫자, 도저히 손을 못 쓰겠네. 비켜!”
“젠장... 도대체 얼마나 망가진 건지! 망할 조선공 놈들!”
“갑판장님은 비키시오, 우리가 할테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서자 선원들이 부랴부랴 해치를 닫고 잠금장치를 다시 잠그기 시작했다.
완전히 잠긴 것을 확인한 나는 굴러다니는 자재들을 보며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보강 좀 합시다, 여기까지 침수되면 답 안나오니까.”
남은 자재들로 해치를 더 단단하게 막고 나니, 다들 긴장과 피로로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만하기를 다행이다.
만약에 저 물이 넘쳐서 위로 올라오면... 진짜 침몰까지 걱정해야 할 지경이니까.
“각 격문 제대로 폐쇄했지?”
“걱정마십쇼,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별 걱정을...”
피식 웃은 나는 나이가 지긋한 선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고생하셨어, 선장님께는 내가 보고할 테니까 해산합시다! 고생들 했어!”
* * * * *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좌현까지 마저 살피며 약해보이거나 조금이라도 파손된 부분에 임시보강을 마친 나는 갑판 위로 올라가서 선교로 향했다.
“선장님! 시키신 일 마치고 왔습니다!”
“큭, 그래, 리안, 아래는 심각한가?”
“우현 밸러스트 구역은 완전히 침수됐습니다. 해치는 다 막았습니다만, 솔직히 얼마나 버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으음... 잘했네! 정말 지독한 폭풍이군. 볼라트 항해사!”
테일러의 호출에 선교 뒤쪽에서 바다를 노려보던 볼라트가 근처로 다가오며 대답했다.
“네! 선장님!”
“파고는?”
“4.5미터입니다. 아까보다 약간 줄었습니다.”
“얼마나 더 갈 것 같나?”
잠시 생각하던 볼라트가 조심스럽게 예측을 내놓았다.
“보통 이렇게 급하게 확장된 폭풍은 최고점을 넘으면 빠르게 물러나곤 했습니다. 예상대로라면 세 시간 안에 먹구름은 빠질 겁니다.”
“세 시간...”
“그,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최소한 세 시간은 버텨야한다는 말이지?”
“네, 아마도...”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하던 테일러는 내 쪽을 바라보며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보좌... 아니, 갑판장! 마스트 상태 확인하게! 자네가 책임지고 마스트는 지켜줘야 해. 지금 위치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항로에서 꽤나 벗어났을거야. 마스트가 망가지면... 알지?”
“네, 선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최선 말고! 최고의 결과를 가져오게. 꼭!”
와우, 전생의 부장님이 빙의하신 줄 알았다.
할 말을 마치고 바로 다른 항해사들에게 지시를 전달하는 테일러를 뒤로 하고 부랴부랴 메인 마스트로 향했다.
범선에서 가장 중요한, 물론 중요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중요한 구조물이 바로 마스트(돛대)다.
바람을 받는 돛을 거는 곳이 마스트이고, 범선은 바람이 유일한 동력원이니까 마스트야 말로 자동차로 말하면 엔진인 셈이다.
지금은 항로고 뭐고 상관없이 바람과 파도의 방향에 따라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폭풍이 끝나면 어디쯤에 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다.
그런데 마스트가 부서진다면? 마스트 정도 되면 도크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수리도 불가능한 구조물이라서 망망대해에 떠서 구조를 기다리다가 굶어죽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유령선의 전설이 생겨나는 거다.
나는 메인 마스트를 지지하는 구조물을 보강하기 위해 매어둔 로프 중 헐거워진 녀석을 다시 조이며 좌현 쪽에 몰려있는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유령선 소속으로 바꾸고 싶지 않으면 이리 와서 도와! 메인 마스트 넘어가면 어쩔거야?!”
지독한 바람소리 때문에 잘 안들리는 것 같지만 몇몇이 미적대더니 이쪽으로 움직였다.
그중에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여, 네이선 해병대원님. 요즘 얼굴 보기 힘들어?”
“리안... 음, 가, 갑판장님?”
“헛소리 말고 저쪽 로프 좀 조여! 해병대 훈련 받았다고 뱃일 못하는건 아니지?”
“어! 아니, 네... 으, 으, 어색해!”
진저리를 치며 뛰어가는, 아니 뛰어가다가 미끄러져서 넘어지는데 그 와중에 손으로 바닥을 집고 텀블링 하듯 일어서는 곡예를 선보인 네이선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우르타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몰라도 임시 갑판장 하다가 친구까지 잃게 생겼다.
두 개의 마스트를 점검하고 난간에 매달려 조금 쉬다보니 배의 흔들림이 좀 줄어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뭔가 터지는 듯한, 거대한 소음이 귀를 때렸다.
급히 소리가 난 방향을 보니 선수 방향이었다.
아무래도 파도를 정면으로 계속 받다보니 뭐가 제대로 부서진 모양이었다.
“뭐야? 뭐가 부서졌어?”
힘겹게 선수까지 가서 확인해보니 일등항해사 알리샤가 선원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선장님 바로 옆에서 보좌하던 그가 왔다는 것은 선교에서도 소음을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아, 리안 보좌관. 다행히 선수상이 부서진 정도인 것 같군. 당장 항해에는 문제없겠어...”
“어이쿠, 일등 항해사님이 여기까지... 다른 곳은요?”
“어느 정도 파손이 있기는 하지만 파고가 줄어들고 있으니 버텨주기를 바래야지.”
괜찮다고 말하는 알리샤의 얼굴이 찌푸려진 걸 보면 적당한 손상이 아니라 꽤나 심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대충 봐도 파고는 4미터 아래로 떨어진 상태였다.
이대로 계속 파도가 줄어든다면 이번 위기는 이걸로 끝일지도...
한 가지 문제라면, 나를 포함해서 간부들은 선수상이 부서진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미신을 믿는 다수의 선원들은 파도가 제일 높을 때보다 더 겁에 질렸다는 것이다.
원래 선수상이라는 것이 선박의 평온을 기원하는 토템 같은 것이라 선수상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마치 자신들을 보호하던 가호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의미부여를 한 것이다.
선수상 없이도 배들이 아무런 사고 없이 잘 다니던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내게는 정말 이해가 안되는 것이지만, 네이선까지 얼굴이 허옇게 뜬 것이 보통일은 아니다 싶었다.
“다들 정신 차려! 선수상까지 제물로 바쳤는데 우리가 별일 있겠어?! 다음 선수상은 내가 책임지고 진짜 좋은 걸로 하자고 건의할 테니까 걱정 마!”
내 말을 들은 선원들이 약간의 안도, 원망, 분노 등등의 복잡한 감정을 얼굴에 표현하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빗방울이 눈에 띄게 약해지기 시작했다.
“어? 비가...”
“저, 저기! 하늘을 봐!”
“헉! 구, 구름이... 걷힌다!”
나도 어리둥절해서 하늘을 보는데 진짜 구름의 색이 옅어지고 있었다.
급하게 난간으로 뛰어가서 바다를 보니 파도도 빠르게 잦아드는 중이었다.
고작 10분? 20분? 그 정도 시간이 흐르자 비는 부슬비 수준까지 줄어들었고, 파고는 2미터정도의 거친 파도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 정도면 폭풍에서 벗어났다고 보는 것이 맞다.
우리가 지나온 뒤쪽으로는 아직도 천둥번개를 동반한 새까만 구름이 남아있지만, 우리가 배를 돌려서 들어가지 않는 이상 우리를 쫓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선교에서 테일러의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시간부로 이클로나의 폭풍 경계 태세를 해제한다. 총원 쉬어.”
“폭풍 경계 해제!”
“폭풍 경계 해제!”
“폭풍 경계 해제!”
테일러의 말을 들은 선원들이 못들은 사람들을 위해 제각각 복창하며 바닥에 널부러졌다.
그리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선교를 향했다.
팔다리에 얼마나 오랫동안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는지 마라톤이라도 뛰고 온 것처럼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돈 더 많이 받는 놈은 남들 쉴 때도 일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요즘 왠지 내 다리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지 않아?
선교에 간부들이 모이자, 테일러가 지친 눈빛으로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선교는 볼라트 항해사가 맡는다. 볼라트, 폭풍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현 침로 유지하도록.”
“네, 선장님. 유사시에 지시하실 내용이 있으십니까?”
“으음, 자네가 판단해서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면 어느 정도 침로 변경은 재량껏 진행하게.”
“네, 이등 항해사 볼라트, 지휘권 인계받았습니다.”
“일등 항해사는 끝나고 나 좀 보지.”
“네, 선장님.”
“조리장은 바로 식량과 식수 상황 파악해서 보고하고, 정리 시작해.”
“네, 선장님.”
“선의께서도 수고 좀 해주시고.”
“걱정마십시오, 선장님. 수고하셨습니다.”
“포병대는 대포랑 화약 상태 확인하고 최대한 수복하도록.”
“네, 이미 대원들이 작업 시작했습니다.”
“갑판장... 갑판장은 선원들... 휴우, 해병대 지원 받아서 선박 파손과 물자 손실을 확인하게.”
“그건 선원들이 해도...”
선원이 할 일을 굳이 왜 해병대에게 시키나 싶어서 반론을 제기하려고 했지만 테일러는 단호하게 내 말을 끊었다.
“아니, 선원들은 좀 쉬어야지. 그래도 체력이 좋은 해병대가 더 나을 거야. 해병대가 직접 수리 작업에 차출될 수는 없잖나? 해병대장이 지원하게.”
“네, 선장님.”
우리를 한번 다시 돌아보며 모자란 명령이 있는지 생각하던 테일러는 깊은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난 잠시 쉬도록 하지. 상황이 완전히 해지되거나 특이 사항이 발생하면 바로 보고하도록.”
테일러가 비틀거리며 선장실로 향하자 다른 사람들도 각자 할 일을 찾아 빠르게 흩어졌다.
마지막까지 내 옆에 남아있던 해병대장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갑판장, 수리가 아니고 그냥 확인만 하는 거라면 전원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요. 몇 명이나 필요하시오? 아실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부상이 심한 녀석이 몇 명 있어서...”
“아, 해병대장님. 말씀하신대로 그냥 확인만 하면 되니까 힘 좋은 대원으로 서너명만 뽑아주시죠. 혹시 물건을 치우거나 옮겨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몰라서 말이죠.”
잠시 생각하던 해병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 정도면 괜찮겠군, 네이선과 제일 상태가 양호한 세 명을 붙여드리지. 선교로 보내면 되겠소? 아, 네이선을 붙여드리는 쪽이 편하시겠지?”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장님.”
“별말씀을. 그럼 곧 보내드리리다.”
빠르게 멀어지는 해병대장을 보며 네이선에게 약간 미안해졌다.
말 그대로 나랑 친하다는 이유로 추가 작업에 차출된 꼴인데, 사실 나도 그게 편하니까 어쩔수 없다.
아까 보니 크게 다친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괜찮겠지 뭐...
그나저나 우르타 이 녀석은 또 안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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