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배의 운명을 건 도박
끝내 폭풍을 견뎌내기는 했지만, 피해는 상당히 심각했다.
침수로 인해 오른쪽으로 약 15도정도 기울어진 것이 가장 큰 문제였고, 선원 9명이 실종(당연히 사망이다)되었으며, 나머지 총원이 부상이다.
그 외에 소소하게 대포 두 개가 깨져서 못쓰게 되었고, 식수와 식량이 거의 절반 정도밖에 안남았다.
식수와 식량이야 원래 여유 있게 채웠으니까 문제없을 것 같지만... 그건 우리가 항로를 따라 제대로 항해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그럼 원래 항로보다 북쪽으로 40km쯤 올라와 버린 셈인가?”
“네, 사실 아직 난파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마스트도 남아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단의 다른 선박들은?”
“현실적으로 선단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원래라면 다음 기항지인 푸에리오다 제도의 파난 항구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만...”
“그래, 갈 방법이 없지.”
선장실에 모여 있던 간부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위치만 알면 다시 제자리로 가면 되지 않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바다도 알고 보면 길이라는 것이 있다.
바람, 조류, 암초 같은 장애물들로 인해 항해가 어렵거나 위험한 구역은 피해서 항해할 수 있는 최적의 길, 그걸 우리는 항로라고 부른다.
육지에서 길이 아니라고 해서 걷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항로가 아니라고 해서 항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육지처럼 눈에 보이는 표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여기가 위험한지, 어디서부터 위험한지, 위험이 뭔지 이런 것을 직접 몸으로 때우기 전에는 알기 어렵다보니 항로를 벗어나는 것은 육지에서 길을 벗어나는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가 된다.
막말로 같은 바다라고 무시하고 마구 다니다가는 암초에 부딪혀서 한방에 훅 가버리거나, 드물기는 하지만 무풍지대에 들어서서 말라죽거나, 역풍 구간을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해 식량과 식수가 다 떨어지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조리장, 식료품은 얼마나 남았다고?”
“현재 총원을 기준으로 식수 6일, 식량 8일입니다. 선장님. 식수는 비가 와준다면 괜찮겠지만 식량은 손실이 심각합니다...”
“벌써 그럴 수는 없지. 낚시라도 시도해보게. 일등 항해사, 임시 항로는 짜 보았나?”
“네, 선장님. 파난 항구로 향할 경우 지독한 역풍 지대를 뚫고 가야합니다. 볼라트 항해사와 상의 해본 결과 최소 14일이 소요될 예정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군. 뭔가?”
“현재 위치를 보면 잦은 폭풍 지대입니다. 볼라트 항해사의 말로는 일 년 중 고작 20~30일 정도만 폭풍이 없는 곳이랍니다. 그리고 지나가야 하는 역풍 지대역시 폭풍 위험 구역입니다. 지금은 남쪽의 폭풍이 급속히 확장하면서 이쪽의 폭풍이 잠잠한 상태입니다만, 지금 당장 바다가 거칠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일정한 속도로 테이블을 두들기는 테일러의 오른쪽 검지와 중지부터 손목까지 붕대가 감겨있었다.
테일러 이 놀라운 양반은 한참 파도가 높을 때 타륜을 급하게 돌리다가 끼어서 손가락이 부러졌다고 한다.
갑자기 손가락 부러졌다고 징징(?)거리던 선원 놈이 생각나는데?
하여간, 그 정도 되면 옆에 있는 일등 항해사 알리샤에게 타륜을 맡길 만도 한데 끝까지 숨기고 자기가 조함(배를 조종하는 행위)한 것이다.
바로 옆에 있던 알리샤도 선장의 부상을 나중에 보고하러 가서야 알았다니, 몰래 마약을 한 것도 아니고 진짜 정신력 하나는 끝내준다.
한참을 고민하던 테일러가 볼라트를 보며 물었다.
“볼라트 항해사, 자네 생각은 어떤가?”
“현재 이클로나의 파손 상태를 갑판장에게 확인했습니다만, 다시 폭풍을 버텨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현 밸러스트 침수는 항행 속도에도 치명적이라 파난 항구까지 무사히 도착할 확률은, 으흠, 이런 말씀을 죄송합니다만... 거의 0에 가깝습니다.”
“이해했네, 하지만 난 자네 생각을 물었네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 자네가 생각한 방법 말이야.”
테일러 선장의 질문을 받은 볼라트가 복잡한 눈빛으로 테이블의 해도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엇다.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솔직히 이클로나가 당면한 가장 큰 위협은 아직 폭풍 지대를 빠져나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류와 풍향으로 고려하면 북서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가장 빠를겁니다.”
볼라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알리샤가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볼라트 항해사! 해도에서 볼 때 북서쪽이면 오히려 폭풍 지대 안으로 들어가는 꼴이지 않소?!”
“일등 항해사님,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바람과 조류가 강하다면 다른 방향보다는 북서쪽이 더 빠르게 폭풍 지대를 이탈하는 방법입니다.”
“크윽...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지금 우리가 있는 지역의 폭풍이 멈춘 상태입니다. 하지만 바람은 좋지요. 그러니 최고 속도로 움직이면 다시 이곳이 폭풍으로 뒤덮이기 전에 탈출 할 수 있을 겁니다.”
볼라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있던 테일러가 해도의 한 지점을 찍으며 말했다.
“자네 말대로 여기까지 간다고 하지. 그 뒤는 어쩔 셈인가?”
테일러가 찍은 지역은 향료 제도의 북동쪽 바다였고, 선명하게 암초 위험 지역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후... 사실 이쪽에 대한 탐사가 어느 정도 진행 된 해도가 있습니다. 예전에 우연치 않게 입수한 녀석인데... 신뢰도도 떨어지고 완벽하지는 않습니다만, 낮에만 주의 깊게 항해한다면 여기 향료 제도 북단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주저하며 말을 꺼낸 볼라트가 말을 마치자, 테일러가 팔짱을 끼려다가 손가락이 걸렸는지 인상을 한번 찡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자네 말대로 신뢰할 수 없는 해도일세. 그것을 믿고 암초 지대로 들어가자는 제안을 하는 건가? 암초는 폭풍과 달라. 한 방이면 우리 배를 항해불능 상태로 몰고 갈 수 있네.”
“하지만 선장님. 암초 지대를 통과하는 방법이 아니라면 북쪽으로 암초 지대를 돌아서 반대쪽인 서쪽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써야 합니다. 예상 항해시간은 최소 25일, 심지어 이쪽은 암초지대의 끝이 아니라 그저 탐사가 제대로 안된 것뿐이라는 것까지 감안하면 이 길은 무조건 죽는 길입니다.”
볼라트의 열변이 끝나자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과 한명씩 눈을 맞추던 테일러가 물었다.
“다른 의견 없나? 내가 보기에 볼라트 항해사의 방법은 성공률이 절반 이하다. 선장으로서 솔직히 조금 더 확률이 높은 도박을 하고 싶은데?”
잠깐 동안의 침묵이 감돌고, 나는 대충 이정도면 예의를 차렸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손을 살짝 들며 입을 열었다.
“볼라트 항해사님, 그 계획대로라면 향료 제도 북단에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아, 네. 제 예상으로 5~6일입니다.”
“그렇다면 2~3일쯤 지체되도 상관없겠군요?”
“식수와 식량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죽기 싫으면 조금씩 먹으라고 해야죠. 그보다 선장님.”
“음? 그래 보좌관, 아니 갑판장... 후, 헷갈리는군. 말하게 리안.”
“지금까지 상황으로 볼 때 지금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일단 볼라트 항해사의 말대로 북서쪽으로 움직이시죠. 다른 것은 몰라도 이대로 폭풍 한번만 더 오면 우리는 다 죽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흠, 그 말이 맞군. 다른 의견이 없다면 볼라트 항해사의 말대로 북서쪽으로 움직인다! 일등항해사, 갑판장! 당장 움직이게!”
“네! 선장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답과 동시에 문으로 뛰어가는 나와 알리샤의 등 뒤에 대로 테일러 선장이 소리쳤다.
“갑판장은 선원들에게 오늘부터 제한배식 실시하게!”
아, 내가 건의했지만 제한배식(선박의 긴급 상황에서 식사량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라니... 벌써부터 선원들이 욕하는 것 같은 환청이 들려온다.
* * * * *
닻을 끌어올리고 돛을 풀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돛이 바람을 안고 빵빵해지며 배를 밀어냈다.
확실히 볼라트의 말이 틀리지 않은 모양인지, 엄청난 속도였다.
어젯밤은 거의 무풍지대 수준으로 바람이 안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랄만한 변화다.
그리고 이렇게 바람이 거칠어지면 폭풍이...
휴, 우리가 이 곳을 빠져나갈 때까지만 좀 참아 줬으면 좋겠다.
배가 워낙 빠르다보니 영 불안불안했다.
아직 파도도 심하지 않는데 사방에서 삐그덕 거리며 선체가 뒤틀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침수로 인해 무너진 균형을 최대한 복구하기 위해 우현 통로를 폐쇄하고 죄다 좌현으로 몰아놓은 이동 가능한 집기들도 자기들끼리 부딪히며 온갖 소음을 양산했다.
쿵!
“아악! 어떤 새... 끼가 이따위로 묶어놨어!”
“아 거 좀 조용, 으헉?!”
꽈앙!
...정정하겠다, 자기들끼리만 부딪히는건 아닌 것 같다.
온갖 걱정과 우려를 담아 마스트에 걸린 돛을 바라보았다.
바람을 받을대로 받아서 찢어질 듯 부풀어오른 돛이지만, 걱정되는 것은 돛이 아니라 그 위쪽이다.
슬슬 회색으로 물드는 구름... 그리고 그 아래에 익숙한 인영이 나무에 매달린 원숭이마냥 뭔가 하고 있다.
“...너 거기서 뭐하냐?”
“어? 리안! 아니 갑판장님!”
메인 마스트 위쪽에 위태롭게 매달려있던 우르타가 속없이 한 손을 흔든다.
몸도 같이 흔들리는게 지금 떨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 어, 어어?!
“야이 미친ㄴ... 으아악! 우르타!”
타이밍 좋게 파도를 탔다 떨어지는 충격이 배를 흔들었고, 한손으로 몸을 지탱하던 우르타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떨어졌다.
메인 마스트의 높이는 대충 25미터 정도, 저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바닥의 재질에 상관없이 사망이다.
나는 괴성을 지르며 메인 마스트 쪽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이미 나는 느끼고 있었다.
너무 늦었다, 심지어 도착한다고 한들 내가 어쩔 수 있을까?
슈퍼 히어로처럼 떨어지는 우르타를 멋지게 받을 수도 없잖아?
괜히 받는다고 깝치면서 밑에서 얼쩡대다가는 괜히 사망자를 한 명 더 추가하는 결과만 나올거다.
그럼 나는 지금 왜 뛰고 있는거지? 안뛰어도 될 것 같은데?
지나가던 선원들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떨어지는 우르타를 향해 머리를 드는 것이 보였다.
도대체 저 미친놈은 지금처럼 위험할 때 마스트는 왜 기어 올라간 거야?!
“으아아악!”
뒤늦게 터지는 우르타의 비명을 들으며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곧 가죽포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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