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암초를 피하는 방법
‘안녕, 우르타...’
눈을 감은채로 속으로 우르타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있다지만, 우르타가 마스트에서 떨어져 죽을 줄은 몰랐다.
......
그런데 왜 소리가 안나?
슬쩍 눈을 떠보니 왠 얼굴이 뒤집어져서 대롱대롱 거리는 것이 아닌가?
두려움 반, 놀람 반의 힘을 담아 힘껏 그 대가리를 쳐냈다.
빠악!
“악! 왜 때려!”
어라? 이거 우르타 목소린데?
내가 때린 덕분에 더 크게 대롱거리는 대가리를 타고 위로 시선을 옮겨보니 허리와 다리에 묶여있는 로프가 보였다.
오... 이래서 대롱대롱 거리는구나? 아, 정신 사나워!
“뭐하는 거야?! 내려와!”
“아니이이! 왜 때렸냐고!”
“어허,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은 거지! 누가 그렇게 위험한 짓 하래?!”
나는 서둘러 자리를 뜨며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사람의 얼굴을 뒤집으면 그렇게 무서울 줄은 몰랐다.
그런데 무섭고 놀라서 무심결에 때렸다고 고백할 수는 없잖아?
* * * * *
폭풍을 걱정한다고 폭풍이 안 오는 것은 아니다보니 힘들어지는 건 선원들이었다.
수리할 수 있는 곳은 최대한 수리했고, 침수되면 위험한 곳은 자재를 보강했다.
마스트를 보강할 때는 여기저기에서 불만이 튀어나왔지만 내 손가락이 하늘을 향하면 거짓말처럼 불만이 사라졌다.
특히 반쯤 부서져버린 견시대(마스트 상단에 설치된 관측용 구조물, 까마귀 둥지)를 자기 멋대로 수리하려다가 거꾸로 매달리는 곡예를 부리고, 그 대가로 나에게 싸대기를 얻어맞은 우르타는 완전히 부서지는 견시대를 보며 크게 항의했지만, 다른 선원들의 살기에 못 이기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런데 우르타의 청탁(?)을 들어주기 어려운 것이, 반쯤 부서진 견시대는 본래의 역할을 할 수도 없었고, 당연히 지금 당장 수리 우선순위가 높지도 않았다.
게다가 마스트 끝에 저런 것이 달려있으면 바람에 저항도 많이 받는데다가 지금 상태로 두면 괜히 바람에 부서진 파편으로 아래에 있던 선원들이 다칠 수 있었다.
그러니 부술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해가 완전히 저물었을 때, 기대한 것(?)과 달리 우리는 별을 볼 수 있었다.
“별이 보이네?”
“응... 내 까마귀 둥지 왜 부쉈어?”
솔직히 ‘네’ 까마귀 둥지는 아니지 않냐?
하지만 나는 그 지적을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조용히 말했다.
“내일 다시 만들자...”
“이런 씨... 심지어 바람도 다 죽었어...”
“...내일 사람들이 욕하겠지?”
“응, 나도 욕하고 싶거든.”
우르타와 갑판에 나란히 누워 헛소리를 주고받는데, 선원 한 명이 다가오더니 나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갑판장님, 선장님 호출입니다. 선장실로 오시랍니다.”
“어? 지금? 알았어.”
내가 단전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누워서 멀뚱멀뚱 나를 보던 우르타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가봐야 알지.”
“하긴... 갑판장도 힘드네.”
“돈 많이 받는 건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나 간다!”
우르타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주고 함장실로 들어가니, 이미 다른 간부들이 다 모여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네, 거기 앉지.”
“네, 선장님.”
모인 사람들을 확인하듯이 한번 둘러본 테일러가 볼라트에게 물었다.
“볼라트 항해사, 상황 보고.”
“현 위치와 바람을 고려하면 내일 정오를 전후해서 폭풍 지대는 이탈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후 침로를 255도로 유지하면 향료 제도 북부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확인된 위험은? 암초밖에 없나?”
“제대로 탐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라 워낙 미신과 소문이 많습니다만... 해적은 확실히 없습니다.”
“좋아, 다음 조리장. 식료품 상황은?”
“그게... 선장님. 지시하신대로 제한 배급을 실시하고 있습니다만 선원들의 불만이 심각합니다. 다시 고려를...”
“아니. 내가 보기에도 갑판장의 제안은 충분히 타당하네. 불만을 갖는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지만 물과 식량이 떨어지면 다 죽어. 확인된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는 아끼는 것이 옳아.”
“네, 현재 배식 상태로 지속할 경우 식수는 9일, 식량은 13일간 배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닷새만 지나도 선원들이 제대로 힘을 못낼겁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볼라트가 손을 들며 말했다.
“선장님, 제한 배식은 풀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제 예상대로라면 늦어도 6일 후면 향료 제도 북단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볼라트 항해사, 정말 그 암초 지대, 6일만에 통과할 수 있나?”
“돛을 최소로 하고 천천히 간다고 해도...”
“그 6일 동안 아무 일도 없을거라고 확신하나?”
“그것은...”
“자네가 어렵게 입수한 해도를 참고한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미지의 지역이네. 미리 모든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 좋아.”
논리적인 테일러의 말에 볼라트가 침묵하는 틈을 타서 내가 얼른 말을 꺼냈다.
“선장님, 그 암초 지대와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음? 뭔가?”
“어차피 이클로나는 손상으로 정상적인 속도로 항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암초 지대에서 정상 속도로 달리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지요. 그러니 단정을 풀어 선행시키는 것이 어떻습니까?”
“응? 단정을?”
“네, 아시다시피 이클로나에는 단정이 네 척 있습니다. 이 녀석들로 이클로나가 가야할 길을 선행해서 확인한다면 위험을 상당히 줄일 수 있을겁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등 항해사 알리샤가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안전은 확보되겠지만 무리한 계획입니다. 그렇다면 단정보다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는 소린데, 그렇게 움직여서는 열흘,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겁니다. 게다가 단정은 노를 저어야 하는데 제한 배식으로 체력이 떨어진 선원들이 버텨낼 리가 없습니다.”
역시 알리샤, 너무 FM 군인이라는 것이 문제지, 똑똑한 인재다.
하지만 역시나 정론에 강한 사람답게 특수한 상황에서는 특수한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군.
“일등 항해사님의 말씀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클로나가 암초에 부딪히기라도 한다면 사실상 우리는 전멸입니다. 물론 힘들겁니다. 몇 명은 지쳐 쓰러질지도 모르죠. 뭐, 운 없는 몇 명은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다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
내가 노골적으로 죽음을 언급하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불편한 표정이 떠올랐다.
약간 암묵적인 금기를 범한 느낌이지만, 지금은 더 편하고 좋은 방법을 찾을 때가 아니다.
아직 배가 잘 움직이고, 선원들 피해가 별로 없어서 잘 못 느끼는 멍청이들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한참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 테일러가 무거운 목소리로 그 침묵을 끊었다.
“확실히, 위험한 상황이긴 하지... 하지만 갑판장, 그런 불길한 말은 앞으로 삼가도록 하게.”
“네, 죄송합니다, 선장님.”
“일단 지금은 암초 지대보다 덜 위험하니 속도를 조금 올려보지. 야간이라지만 차라리 그게 낫겠어. 그리고 암초 지대는... 그쪽 상황을 보고 판단하도록 하지.”
“네, 알겠습니다.”
“갑판장이 조금 더 고생해주게. 그리고...”
그 뒤로 몇 가지 안건을 토의한 후 회의가 끝났다.
선장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조금 세진 것이, 더 빨리 폭풍 지대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오늘 야간 당직자들은 신경이 곤두서겠지만, 어차피 난 아니니까!
* * * * *
“제기랄, 무슨 놈의 암초가...!”
“그러게요, 갑판장 의견대로 하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군요.”
“흠, 흠...”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볼라트가 말하자, 타륜을 잡고 있던 알리샤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 나도 좀 민망하다.
혹시나 해서 제안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잘 들어맞는다고? 나 신기(神氣) 있나?
진짜 이렇게 암초가 많은 곳은 처음 본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징검다리처럼 뛰어서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 이클로나의 항해속도는 대충 1.5노트쯤 되는 것 같다.
그것도 지금 길(?)이 깨끗해서 이정도로 나가는 거지, 암초 배치가 거지같은 구역을 지날 때는 1노트 미만으로 움직이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마음은 급하고 선원들 체력은 떨어지는데 배는 굼벵이만큼 느리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렇게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한참 앞에서 나가던 단정 하나가 큰 소리와 함께 우리 눈에도 보일 정도로 기우뚱 거렸다.
그리고 뒤 이어 아련하게 욕설 비슷한 것들이 들려온다.
“어우, 제대로 부딪힌 모양인데? 부서진거 아냐?”
볼라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걱정을 내뱉었다.
“뛰어내리는 놈이 없는걸 보니까 괜찮은 것 같네요. 그보다 진짜 안보였는데 저기도 있군요.”
“정말 이렇게 지독한 암초 지대는 저도 처음 봅니다.”
아니, 처음 보는 것이 당연하잖아?
원래 이정도면 항해 금지 구역 수준인데... 일반적인 항해사들이 가볼 리가 없지.
굳이 가본 사람이 있다면 탐험선이나 개척선을 타본 사람이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국가의 지원을 받거나 왕실 소속이다.
우리 같은 평범한 상선을 타는 사람들은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지.
뭐랄까... 같은 세상, 같은 공간에 있는데 다른 차원을 사는 사람들 같은 존재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우리도 평범한 상선은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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