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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48화 (48/420)

<48화> 생존을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것

항상 하는 말이지만, 항해는 대부분 지겹고, 지루하다.

그리고 지금은 거기에 체력적인 고단함과 정신적인 스트레스, 미칠듯한 공복감까지 겹쳐있다보니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 지경이다.

실제로 어제와 오늘, 단 이틀 동안 폭력사건이 12건이나 터졌다.

배고파서 힘이 없다는 놈들이 왜 싸울 힘은 남은건지 모르겠지만, 안그래도 부상자 때문에 줄어든 노동 인원이 더 줄어들었다.

덕분에 지금은 일반 선원뿐만 아니라 해병대와 포병대까지 죄다 선원처럼 일하는 중이다.

처음에야 그 드높은 자존심 때문에 불만이 없지 않았지만, 사흘만에 진짜로 픽픽 쓰러지는 선원이 나오자 불만이 쏙 들어갔다.

자존심 챙기다가 배가 멈추면 그 안에서 죽는 것은 자기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리고 해병대장과 포병대장이 하도 쪼아댄 것도 한 몫 할거다.

“섬이 보입니다!”

그래 이렇게 암초가 많은데 하나 정도는 섬이겠지.

......섬?!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견시대 밑으로 뛰어갔다.

“야! 견시! 섬 맞아?! 어느쪽이야?!”

약간 당황한 얼굴이 급조한 견시대 위에서 쏘옥 튀어나왔다가 다시 더듬거리며 보고하기 시작했다.

“바, 방향은 045도, 거리는 약 30, 아니, 25km 정도입니다.”

“야! 25km가 되도록 발견 못했어?! 너 잤지?!”

“아니, 갑판장님 여기서 어떻게 잡니까... 그보다 섬이 엄청 작습니다.”

“어? 작아? 얼마나?”

“그, 글쎄요? 뭐라고 해야할지... 그냥 되게 작습니다. 올라와서 보실래요?”

그래 작으니까 지금 발견했겠지... 크기가 궁금하기는 한데... 저기를 올라가기는 좀...

“어, 그 말로는 표현이 안돼?”

“...그게...”

그때 모여든 선원들이 갈라지며 테일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선장님 오셨습니까?”

“견시, 섬이 확실한가?”

“넷, 선장님! 크기는 작지만 나무들이 있는 확실한 섬입니다!”

“나무가 있다면 물을 구할 수도 있겠군...?”

“어, 선장님 그건 좀... 섬이 정말 작습니다.”

“일단 가보지. 갑판장, 선행중인 단정들에게 전달하게. 섬으로 가지.”

잠시 생각하던 나는 테일러를 불러세웠다.

“저, 선장님. 섬의 방향과 거리를 볼 때 섬에서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면 시간에서 상당한 손해를 보게 됩니다. 차라리...”

“갑판장, 식감과 맛을 포기한다면 인간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먹을 수 있네. 그리고 죽는 것 보다는 맛없는 것이라도 먹는 것이 낫지.”

“......”

귀족 출신이신 줄 알았는데 무슨 이런 밑바닥 인생 같은 말씀을 하시지?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멀어지는 테일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 *

거의 4시간을 들여서 섬의 근처까지 접근했지만 이클로나를 섬에 정박시킬 수는 없었다.

무슨 동네 고기잡이 어선도 아니고 이클로나 정도 되는 크기라면 전문적인 항만시설이 없는 곳에는 정박하기 힘들기는 하다.

그래서 단정으로 탐사대가 움직이고 있었는데, 탐사대장은 일등 항해사 알리샤, 총원은 16명이었다.

특이하다면 배의 선의인 닥터 롱베르씨도 탐사대에 포함되었다는 정도였다.

“롱베르씨, 굳이 위험하게 탐사대에 참가하실 필요는 없으신거 아닙니까?”

사실 나는 닥터 롱베르가 탐사대에 포함된 것이 못마땅했다.

이 세계의 의술 수준을 감안하면, 닥터 롱베르는 아주 훌륭한 의사였다.

부러진 뼈도 잘 맞추고, 간단한 외과수술도 할 줄 알았으며, 특히 각종 내과 질환에 대한 지식이 상당했다.

덤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들도 잘 사용했는데, 효과가 좋은 것들이 많았다.

효과 있는 약을 사용할 수 있는 의사라니,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 보는 제대로 된 의사다.

그리고 지금 이클로나에는 그를 필요로 하는 수십명의 환자가 있다.

그런데 위험할지도 모르는 탐사대에 닥터 롱베르를 참가시킨 테일러의 의도를 모르겠다.

“하하하, 보좌관도 내가 위험에 노출되서 못마땅한 모양이군요?”

“아니, 뭐, 굳이 못마땅하기보다는... 롱베르씨의 손길이 필요한 환자들이 잔뜩이지 않습니까?”

“걱정마세요, 대부분은 치료가 끝났습니다. 이제 회복을 기다리면 되는데...”

“아, 솔직히 위험할지도 모르는 탐사대에 굳이 닥터가 함께 가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잠시 섬 쪽을 바라보던 롱베르가 내게 손짓을 했다.

그의 제스처에 내가 살짝 긴장하며 고개를 숙이자, 내 귀에 조용한 그의 말이 들렸다.

“보좌관, 선원들의 사기문제로 저와 선장님만 알고 있었지만, 사실 폭풍으로 대부분의 약재를 못쓰게 되버렸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당장 염증 치료에 효과가 있는 약초는 반드시 필요해요. 물론 섬이 작아서 안전에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기도 하지만... 뭐라도 건지려면 제가 직접 눈으로 보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 그런... 저도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리안 보좌관.”

“엇? 제 이름을 아시나요?”

“그럼요, 우리 배의 최고 풍운아 아닙니까? 모르는게 이상하죠. 하하하. 어쨌건 잘 부탁해요 보좌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답답한 진실을 또 하나 알아내고 도착한 섬은 정말 작았다.

음, 전생으로 치면 축구장 서너개 정도 크기일까?

되게 큰 것 같지만 섬이라고 생각하면 딱히 큰 사이즈는 아니다.

동쪽은 지대가 좀 높았고 절벽으로 되어있었으며, 우리가 도착한 남쪽과 동쪽은 모래사장 뒤로 여러 가지 풀과 나무가 섞인 숲과 들판의 중간쯤 되는 야트막한 구릉이 펼쳐져 있었다.

탐사대 16명이 다 모이자 알리샤가 지시를 내렸다.

“자네 둘은 여기서 단정을 지키도록 하게. 그리고 갑판장은 선의모시고 약초 채집을 돕도록 해. 세 명 더 붙여주지. 나머지는 나를 따라 섬을 탐사한다. 첫 번째 수색목표는 물, 두 번째는 식량이다. 혹시 동물...이 있을 것 같지는 않군. 그럼 두 시간 후에 현 위치에 모이도록 하지.”

“네, 그럼 누구를 데려갈까...”

내가 세 사람을 지목해서 움직이려고 하는데, 알리샤가 나를 보며 한마디를 추가했다.

“아 참, 갑판장. 혹시 장시간의 작업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전령 한 명만 보내도록 하게. 이쪽에 별 문제가 없다면 작업 지원을 가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일등 항해사님. 그럼 조심하십시오.”

알리샤는 다른 인원들과 섬 외곽을 먼저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고, 우리는 바로 풀숲으로 직진했다.

나나 선원들은 고작해야 나무와 풀을 구분하는 정도였지만 닥터 롱베르는 뭐가 그리 신기한지 작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여기저기를 관찰했다.

초록색 식물만 보는게 아니라 벌레 같은 것을 한참동안 들여다보기도 하고, 땅을 파보기도 했다.

30분쯤 지나서는 우리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바위의 아래쪽에서 이끼도 풀도 아닌 기묘한 식물의 군락지를 발견한 롱베르는 크게 기뻐하며 그것들을 채집할 것을 요청했다.

그냥 삽으로 푹푹 퍼 담았으면 좋겠지만, 그의 요청대로 필요한 부분만 따로 떼서 채취하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일단 쪼그려 앉아서 손목과 손가락만 가지고 뭔가를 반복하는 것이 영 익숙한 자세는 아니었으니까.

이후로도 죽은 나무와 땅에서 버섯같은 것을 채취하기도 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풀잎을 따기도 했다.

아쉬운 것은 아무리 봐도 과실수나 곡류 등 식량이 될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이다. 덤으로 식수로 활용할 물도 찾지 못했다.

물구덩이가 몇 군데 있기는 했는데... 도저히 마실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색은 그렇다고 하고, 당장 수면에 벌레 사체가 둥둥 떠다니는데 그걸 마실 수는 없지 않은가?

“대충 다 둘러본 것 같군요. 마지막으로 저쪽의 풀숲만 살펴봅시다.”

갈대밭과 비슷해 보이는 곳을 가리키며 앞장서는 롱베르를 우리는 힘없이 따라 걸었다.

약초로 쓰일 듯 한 몇 가지 식물을 채취했으니 아주 성과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가 기대한 것은 솔직히 물이나 식량이었으니까.

내 허리어림까지 자라는 갈대 비슷한 것을 헤치며 닥터 롱베르를 따르던 나는 발에 걸리는 기묘한 감각에 일행을 불러세웠다.

“잠시만요! 여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응? 리안 보좌관, 뭡니까?”

“좀 무겁고 동글동글...어라?”

허리를 숙여 발에 걸린 그것을 잡아들자 길게 이어진 넝쿨이 보였다.

약간 기울어진 타원형인 그것의 크기는 사람 머리보다 조금 작은 정도, 회갈색의 거친 표면을 가고 있었고, 크기에 비해 상당히 무거웠다.

“롱베르씨 이게 뭔 줄 아십니까? 먹어도 되는건가?”

솔직히 누가 봐도 이건 열매였다.

보통 열매라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 아냐?

하지만 롱베르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하면서도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저도 처음 보는 열매네요. 열매 중에는 사람에게 독성이 있는 녀석이 적지 않습니다. 함부로 먹지 않는 것이...”

“어라? 제가 알 것 같습니다. 그, 우리 고향에서 오타베아라고 부르던 녀석과 비슷한데요?”

롱베르가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자, 맨 뒤에 있던 선원이 한 발짝 다가오며 아는척을 했다.

“어? 알아? 확실해? 이거 먹어도 되는거야?”

내가 반색을 하며 물어보자,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색이 조금 더 진하기는 한데 비슷합니다. 그리고 먹을 수 있냐라면... 네 먹을 수는 있습니다...”

“오! 그럼 식량으로 몇 개...”

“그런데 저, 갑판장님. 먹을 수는 있는데 아무도 안먹습니다.”

“응? 왜?”

“맛이... 맛이 진짜 없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물이라서 허기를 해결하는데도 별로 도움이 안되거든요.”

“아... 잠깐, 물이라고?”

갑자기 테일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식감과 맛을 포기하면 인간은 상당히 많은 것을 먹을 수 있다고 했던가?

맛이 더러우면 어떤가?

탈수증으로 죽는것보다는 나을거다.

그전에 안정성부터 확인해야지.

“롱베르씨, 어떻습니까? 최악의 순간에 수분섭취용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흐음, 먼저 인체에 무해한지 확인부터 하죠. 독성만 없다면 보좌관님 말씀대로 우리에게 꽤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일단 하나만 가지고 가 봅시다.”

“그러죠.”

그리고 약속 장소에 우리가 도착하자 알뿌리 식물 같은 것을 몇 개 들고 서 있는 알리샤 쪽 인원들이 보였다.

저들도 뭔가를 찾아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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