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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51화 (51/420)

<51화> 한 번 정도는 쉽게 가고 싶다

나름 순조로운 항해가 며칠째 이어졌다.

여전히 불쑥불쑥 나오는 암초 때문에 배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게 움직였고, 여전히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 있었으며, 로테이션으로 진행되는 노젓기(단정 운용 인원)에 선원들이 욕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 정도 소소한 사건은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사흘째에는 다섯 시간 정도 비가 내려서 배식 상황이 굉장히 좋아졌다.

물도 여유 있게 풀었고, 맛이 없을지언정 양은 충분한 삶은 포르데토가 있었다.

그리고 이름 없는 작은 섬을 출항한지 6일째 새벽,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왔다.

“육지, 육지가 보입니다! 우현 60도! 육지입니다!”

요즘 들어 체력과 정신력에 한계가 왔는지 매일 기절하다시피 잠들고는 했는데, 오늘따라 견시 보고가 바로 옆에서 떠드는 것처럼 잘 들렸다.

육지! 육지란다! 드디어 육지다!

허겁지겁 눈곱도 떼지 않은 상태로 밖으로 나와 보니 나와 비슷한 몰골의 선원들이 메인 마스트 쪽과 우현 난간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대충 직급으로 선원들을 찍어 누르며 마스트 근처까지 가자 먼저 도착한 일등 항해사와 볼라트가 보였다.

“견시, 다시 확인해! 섬인가, 육지인가?”

“선미(배의 뒷부분)쪽으로 시야 바깥까지 육지가 이어집니다!”

“오, 씨발, 신이시여! 진짜 육지로군.”

점잖기만 하던 알리샤가 신성모독에 가까운 이상한 발언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 옆에서 죽기 직전에 구원의 손길을 발견한 표정을 하고 있던 볼라트는 다리가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없는 만세를 불렀다.

“우와아아아! 육지다!”

“사, 살았어!”

“와아아아...!”

뒤이어 모여 있는 선원들이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피웠다.

서로 얼싸 안고, 때리고, 욕하고... 음,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데 기뻐하는 것 맞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아침식사를 마친 간부들은 선장실에 모였다.

“그럼, 볼라트 항해사, 앞으로 일정은 어찌 되겠는가?”

“견시 보고 후 현 위치를 확인한 결과 우측의 육지는 저희가 목표한 오르윔 섬이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볼라트가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사람들 사이에서 안도의 한숨과 기쁨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현재 우리는 오르윔 섬 남단을 지나고 있으며, 오늘 늦은 오후 정도면 교역항인 부에즈 항구에 입항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예상되는 문제가 있나?”

“문제까지는 아니지만, 정오를 기점으로 단정은 모두 회수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쯤이면 부에즈 항구로 향하는 정규 항로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배들이 원래 다니는 정규 항로라면 지금처럼 지랄 맞은 암초지대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사실 지금도 암초가 많이 없어져서 선원들이 단정을 내리는 것에 슬슬 불만을 표하고 있는 시점이기도 했다.

물론 지휘하는 입장에서는 확실한 안전이 보장될때까지 보수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좋아, 단정 회수 시점은 볼라트 항해사가 결정하도록 하지. 식량과 식수 상황은?”

안그래도 미리 파악해 놓았기 때문에 나는 바로 대답했다.

“식수와 식량 모두 1일분이 남았습니다. 그 오타베아와 포르데토는 제외한 수량입니다.”

“그렇다면 충분하게 풀어도 상관없겠군.”

“네, 회의가 끝나는 대로 무제한으로 풀도록 하겠습니다. 선원들이 기뻐하겠군요.”

선장실에 작은 웃음소리가 차올랐다.

오타베아와 포르데토가 확보된 이후로 전보다는 여유 있게 보급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냄새나는 물과 맛없는 식량을 무제한으로 제공해봐야 그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선원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곧 문명의 혜택을 받은 육지에 발을 디딜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기 때문이겠지.

얼마 남지 않은 물자를 마구 푼다는 것은 선장님 이하 간부들이 곧 재보급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는 방법 아니겠어?

오타베아는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지만... 차라리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쪽이 더 운이 좋은 셈이니 그냥 좋은(?) 추억으로 간직해야겠다.

“아, 그리고 갑판장, 교역품 상황은 어떤가?”

“전에 보고드린대로 파손되거나 상품성을 상실한 물량이 40%정도입니다. 남은 물량도 상품성은 많이 떨어진 것이 대부분입니다.”

교역품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전투와 폭풍을 겪으면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상태라, 손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배에 여유라도 있었으면 파손된 것과 상태가 좋은 것을 분리해서 추가 손실이라도 막았을 텐데, 폭풍 이후에는 선원들에게 그런 비생산적인(?) 일을 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거의 방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으음, 어쩔수 없나...”

“볼라트 항해사와 이야기 해 보았습니다만, 저희 목적지인 부에즈 항구는 향료 제도의 여러 섬중에 본토에서 들어오는 상품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입니다. 손실이 심하기는 하지만 시세 자체는 높을 테니 어느 정도 손실을 만회할 수 있을겁니다.”

“그럴수도 있겠군. 갑판장이 이런저런 일을 다 맡아서 고생이 많아. 회계사일도 제대로 해주리라 믿네.”

그러게 말입니다.

어쩌다보니 담당업무가 없던 보좌관에서 갑판장에 회계사에 항해사 수업까지... 어째서 이 배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요?

“어려운 여정이었지만 다들 잘 견뎌주었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주게. 이번에 입항하면 조금 쉬는게 좋겠어.”

테일러가 한 시름 놓은 표정으로 사람들을 돌아보며 격려의 말을 건네는 것을 마지막으로 회의는 끝이 났다.

“드디어...”

“볼라트 항해사님, 고생하셨습니다.”

내가 선장실을 나와 감격한 표정으로 우현의 바다를 바라보는 볼라트에게 말을 걸자,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하, 제가 무슨 고생을 했습니까? 다른 분들 특히 리안 갑판장이 고생했죠. 이번 항해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위험했던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을! 볼라트 항해사님이 우리 배에 안계셨다면 우리는 지금쯤 물귀신이 되었거나 유령선의 선원이 되어있을겁니다.”

서로의 얼굴에 사이좋게 금칠을 하면서 우현을 보자, 저 멀리 수평선에 조그맣게 솟은 땅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목숨 걸고 하는 일이 뱃일이라지만, 이번 항해는 정말 목숨이 몇 번이나 위험했는지 세기도 힘들다.

계속 이런 식이면 정말 뱃일도 못해먹을 짓인데...

* * * * *

처음으로 보게 된 향료 제도의 항구, 부에즈에 대한 첫인상은 ‘한산하다’ 였다.

볼라트 항해사 말대로면 나름 교역항인데 정박한 배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물론 항구 시설도 정말 귀여운 수준이긴 하지만, 이정도면 그냥 조금 큰(?) 어촌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겠다.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볼라트가 코앞으로 다가온 항구를 보며 말했다.

“다 연안 항해용 상선들이군요. 상단이 없는 걸 보면 교역품 값을 잘 받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게요, 한 가지 정도는 쉽게 해결되야 균형이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

이걸 당연하게 생각해서 나도 속상하기는 한데, 그런 일은 없다.

* * * * *

“아니 이봐요, 그 정도 가격이면 선원들 인건비도 안나옵니다! 지금 교섭을하자는 겁니까, 싸우자는 겁니까?”

내가 어이가 없어서 소리를 빽 지르자, 능글맞은 웃음을 짓던 상대방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받았다.

“아이고, 싸우자니요? 전 상품의 상태와 시세를 감안해서 말씀드린겁니다. 고작 며칠전에 상선대가 대량으로 물건을 풀고 갔는데 당연히 시세가 떨어지지 않았겠습니까? 게다가 객관적으로 봐도 상품의 상태가...”

아무리 우기려고 해도 확인 안되는 사실과 나도 인정하는 사실로 두들겨 패니 상대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만신창이인 배, 상선대도 아니고 꼴랑 한 척, 누가 봐도 산전수전 다 겪은 상태의 상품들... 저치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우리의 상황을 대충 짐작하고 가격을 후려치는 것이라는 심증은 있는데 증명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판을 깨고 나가기도 애매한 것이, 일단 선박의 수리를 위해서라도 최소한 열흘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흘이면 안그래도 상태가 불량한 교역품들이 가치를 상실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처음에 교역소라고 찾은 곳이 너무 기존의 이미지랑 달라서 불안한 느낌이 들기는 했었다.

그런데 교역소 직원도 아니고 무슨 상인회 대표라는 작자가 나와서는 이렇게 내 속을 뒤집고 있는 것이다.

원래 내해의 교역소는 이렇지 않다.

거래되는 대부분의 교역품에 대해 기본적인 시세가 붙어있고, 교역소에서 품질에 따라 약간의 흥정을 거쳐서 모두 매입을 해버린다.

교역소에서 상인들에게 분배를 할 때 얼마나 붙여먹는지는 몰라도, 교역소 자체가 어떤 개인이나 세력의 사적인 시설이 아니라 공동 기구 같은 것인 만큼 딱 운영비 정도만 챙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찌 되었건 이렇게 대놓고 사기를 치는데 반박할 말이 없으니 답답해 죽겠다.

전생에서 책과 드라마로 보았던 거상 임상옥처럼 불 쑈를 펼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미치겠군.

왜 안되냐고? 임상옥이 인삼에 불을 싸지를 수 있었던 이유는 고려삼(조선인삼)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루트가 그것 하나였기 때문이다.

여기는 뭐, 우리 물건이 아쉽기는 할지 몰라도 단일 공급원이나 극단적인 공급부족 상태는 아니다보니 불 쇼를 하면 박수치며 구경 할 거다...

“하아, 뭐 그렇다고 하고 전량 매입은 가능한거요? 어차피 물량이 남아 도신다면서?”

“하하하, 저품질은 저품질 나름대로 수요가 있으니까요. 굳이 장거리 교역을 하면서 일부러 저품질 교역품을 가지고 오는 경우는 없지 않겠습니까?”

“......”

“보아하니 힘든일을 겪으신 것 같은데, 제가 조금 더 신경 써 드리겠습니다. 5% 올려드리죠. 회계사님께 선물도 따로 챙겨드리겠습니다. 후후후.”

“아, 선물? 그럼... 흠, 흠, 나도 입장이라는게 있어요. 선장님을 설득할 시간도 필요하니 이틀 후에 다시 봅시다. 괜찮소?”

“자꾸 시간을 늦추시면 저희로서는 떨어지는 상품 가치만큼 가격을 내릴 수밖에 없...”

“진심이오?”

내가 인상을 팍 구기자, 내 손이 닿은 칼자루를 힐끗 본 상인은 금새 태도를 바꿨다.

“...지만 회계사님 입장도 있고 하니 이틀정도는 기다려드리죠.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고맙소, 그 선물은 좀 기대해도 되는건지...”

“아이고, 걱정마십시오! 아주 흡족하게 준비하겠습니다!”

내가 선물에 대한 탐욕을 슬쩍 드러내자 상인은 족제비같은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대답했다.

선물 준다고 해서 고맙다, 이 날강도 같은 새끼...

선물이라 쓰고 뇌물이라 읽는 성의표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당한 거래에서는 굳이 뇌물이 필요 없다는 것은 전생이나 이생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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