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콩 심은데 콩 난다
부랴부랴 배로 돌아온 나는 내 친위대(?)를 소집했다.
우르타, 네이선, 볼라트, 베이커...
아, 베이커는 내가 갑판장이 되었을 때 제일 삐딱했던 사람인데, 나이도 있고 따르는 선원도 많아서 내가 아니었다면 임시 갑판장이 되었을 것이 거의 확실한 사람이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나라도 배알이 꼴릴 것 같기는 하다.
선원을 할 정도면 대부분 하층민이라 자기 나이를 정확히 아는 사람도 드물고, 안다고 해도 서로 거의 묻지 않기는 하지만 딱 봐도 자기보다 20살은 어려보이는, 아들 뻘(미혼이기는 하지만)에 불과한 나한테 진급이 밟힌 꼴이니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덕분에 초반에 나와 상당한 트러블이 있었던 베이커지만, 마다카트 섬 전투와 폭풍을 겪으면서 오히려 내게 호의를 품게 된 사람이다.
내 능력을 인정하는 부분도 있고, 내가 적당히 존중해주는 쪽으로 입장을 바꾼 영향도 있을 거다.
임시직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냐고 할 수도 있지만, 경력이라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다.
막말로 갑판장 자리가 나왔을 때 갑판장 역할을 했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갑판장이 될 확률이 가장 높은 것 아니겠나?
심지어 다른 배로 소속을 옮기더라도 임시 갑판장으로 일했다고 하면 기본급도 올라가고 경력을 인정받기도 쉽다.
그렇다면 테일러는 왜 베이커가 아닌 나를 선택했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 부분은 내가 테일러가 아니라서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긴 하지만, 테일러 입장에서는 갑판장처럼 중요한 자리를 자신과 아무런 유대관계가 없는 베이커에게 맡기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참고로 베이커는 일반 선원 출신으로, 바흐카덴에서 선원들을 정리하고 제국 군인 출신으로 채워 넣을 때 남은 몇 안되는 선원 중 한명이다.
각설하고, 간만에 늘어져서 쉬다가 불려나온 사람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회계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에 가뿐히 무시하고 말을 꺼냈다.
“자, 자, 갑자기 불려 나와서 싫겠지만 일 좀 합시다.”
“보좌관, 이건 좀 심한 것 아니오? 사람이 좀 쉬면서 일해야지, 어?”
“베이커씨, 이번일 잘 끝나면 진짜 좋은데서 술 살테니까 한번만 도와줍시다, 응?”
“어? 좋은데? 허허헛, 그렇다면 뭐... 갑판장께서 시키시면 해야지!”
보좌관이었다가 갑판장이었다가... 아주 기분에 따라 호칭이 바뀌니까 알기 쉽네.
“먼저 볼라트 항해사님, 힘드신 거 알지만 항구 상인회에 최근 상선대가 언제 들어왔는지, 판매 및 구매 내역이 뭔지 좀 알아봐 주세요. 그래도 항해사님은 몇 번 와보셨으니 안면을 익힌 사람이라도 있을... 있으시죠?”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짓던 볼라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물론 아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정말 안면이나 익힌 사이입니다. 아시다시피 전 회계사가 아니라서 상인회와 딱히 접점이 없거든요.”
“다행이네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볼라트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 갑판장님, 그게 아니고... 애초에 그런 교역 내역은 알아내기 쉽지 않아요. 그들도 그게 밝혀지면 자신들이 거래에서 불리한걸 뻔히 아는데 알려주려고 하겠습니까?”
“아, 꼭 알아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최선을 다해서 알아봐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니, 그게 무슨...? 휴, 알겠습니다. 바로 움직일까요?”
“네 그러시면 감사하죠.”
자신 없는 얼굴로 볼라트가 떠나자 나는 바로 의욕에 찬 베이커를 보고 말했다.
“베이커씨는 오늘 저녁에 선원들과 나가서 한잔 하실거죠?”
“뭐, 그야 당연... 혹시 가면 안되오?”
대번에 베이커의 얼굴이 실망으로 가득찬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 베이커가 예상한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아닙니다! 꼭 가셔야죠. 그런데 지금 바로 가실 수 있나요?”
“그건 그리 어렵지 않소만, 왜...?”
“술집에 가셔서 자연스럽게 술을 드시는데, 주문을 하실 때 본토 식재료나 술을 조금만 시켜주세요. 항해가 힘들어서 고향생각이 난다 정도로 핑계를 대시면 될 것 같습니다.”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소. 그런데 갑판장, 알다시피 이 정도 멀리 오면 그것들 값이 만만치 않을거요. 솔직히 우리가 비싼 돈을 주고 그런걸 찾을 만큼 그리운건 아닌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키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베이커를 보며 나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막상 자기 돈이 들어간다고 하니까 안 내키는 모양이다.
하지만 전생에서 신물이 날 정도로 자본주의를 겪은 이 몸이다.
내가 주머니에서 꺼낸 은화 두개를 튕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베이커가 날쌔게 잡아챘다.
“오호, 브란트 은화? 이정도면 충분하지!”
“착수금입니다. 맛있게 드시고 어색한 티 내시면 안됩니다? 아시죠?”
“어허, 내가 뱃일만 15년이오. 이런 일을 한두 번 해봤겠소?”
“믿고 있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어땠는지만 알려주세요.”
“좋소! 내 지금 당장 다녀오리다!”
베이커가 희희낙락하며 자리를 뜨자 초롱초롱한 눈망울 네 개가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브란트 은화 두 개면 대충 1400로스, 하루 항해 수당 정도니까 자기들도 받을 수 있나 싶은 거다.
“으이구, 너희들까지 내 주머니를 털고 싶냐?”
“리안은 돈 많잖아.”
네이선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보통 하루살이처럼 사는 선원들과 달리 난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고 있으니까.
최근에 몇 가지 굵직한 사건 때문에 큰 돈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게 그렇다고 막 써도 되는 돈은 아니란 말이다.
“헛소리 그만하고, 네이선 너는 오늘 뭐할거야?”
“어? 나 그냥 쉴건데... 오늘은 대장님이 훈련도 없다고 했어.”
“그럼 해병대원들 꼬셔서 무기 사러 가자고 해봐.”
“무기? 갑자기? 여기 비쌀텐데?”
향료 제도에는 광산이 없다.
진짜 광물이 없는 건지, 탐광을 안한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확실히 광산은 없다.
그래서 냉병기건 화기건 대부분 본토 수입산이다.
물론 대장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장간에서 뭘 만드려고 해도 애초에 철괴 자체를 수입해서 만들어야 하니 완성품을 수입하는 것이나 그 값이 그 값일 수 밖에.
“그래도 전투에, 폭풍에, 망가지거나 분실한 무기들이 꽤 될텐데? 그리고 해병대들 그런데 관심 많잖아.”
“으음, 뭐... 그런 말이 좀 나오기는 하지.”
특히나 마다카트 섬에서 전투를 하고 나서도 마다카트 섬의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무기류 값이 엄청 뛰어서 제대로 정비를 못한 해병대원들이니 충분히 혹할만한 유혹이다.
“한번 설득해봐. 안되면 너 혼자라도 가. 가서 무기들 품질이랑 가격 좀 확인해와.”
“나도 뭐 사도 돼?”
“어? 사고 싶으면 사.”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네이선이 수줍게 손을 내민다.
“뭐? 어쩌라고?”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자, 대번에 네이선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이 자식, 해병대에 들어가더니 성격이 아주 거지같아졌다.
심지어 눈에 띄게 벌크업 된 근육들이 자꾸 내 시선을 빼앗는다.
“아! 왜 나는 착수금 안줘! 나도 줘!”
시발, 실컷 키워놨더니 이제 나한테 삥을 뜯는구나.
이래서 검은머리 짐승은 거두는게 아니라고, 젠장, 네이선은 갈색머리다.
내가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은화를 꺼내자 재빨리 낚아 챈 네이선이 투정을 부린다.
“뭐야! 왜 나는 베덴 은화(300로스)야?! 이걸로는 가죽 벨트도 못사겠다!”
“싫어? 싫으면 도로 주던가.”
“그러지 말고 좀 더 줘. 이걸로 뭘 사?”
후... 전공서적 값이라고 쓰고 술값이라고 읽는 희한한 종류의 용돈을 뜯기는 부모님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일까?
별수 없이 나는 베덴 은화 한 개를 더 꺼냈다.
“에이, 주는 김에 나도 브란트 은화로 주지...”
“이자식이! 내놔! 내가 직접 갈거야!”
“앗! 아냐, 나 간다!”
내가 눈을 부라리자 바로 태세를 전환해서 바람처럼 사라지는 네이선이었다.
마지막 남은 우르타를 보자 우르타 역시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아니, 너한테 시킬 일은 돈 드는 일이 아닌데?
“우르타, 너는 나랑 같이...”
“리안! 나 있잖아, 사실 이가 흔들리는 것 같아.”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치통 있어? 그러니까 내가 양치질 잘 하랬지?”
“아니이이이! 그거 말고!”
갑자기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맥락 없이 여기서 갑자기 이가 흔들린다는 말이 왜 나와?
내가 어이없는 눈으로 가만히 보고만 있자, 답답하다는 듯 자기 가슴을 두어번 치던 우르타가 살짝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전에 리안이 때렸잖아. 그래서 이가 흔들려.”
이게 뭔 개소리야?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이제 와서...
그래, 백번 양보해서 내가 때려서 이가 흔들린다고 하자.
성인의 이는 뿌리가 있어서 그렇게 쉽게 빠지거나 하지 않는다.
충격을 받으면 빠지기보다는 보통 깨지게 마련이고, 선원중에는 정상적인 치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험한 일 하다보면 다 그렇지 뭐... 이 시대에 제대로 된 치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보통 충격을 받아 이가 흔들리더라도 그냥 그대로 두면 대부분 다시 단단하게 고정되는 것이 치아다.
“도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거야? 흔들리면 그냥 냅 둬, 가만히 두면 괜찮아져.”
“하지만, 아프고, 불편하고, 자꾸 그때가 생각나서 무섭고, 서럽고...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할 것 같아.”
“그게 뭔데? 사과? 위로? 양치질 잘하라는 충고와 조언은 이미 해줬고. 필요한게 뭔데?”
우르타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리안, 감사와 사과, 위로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돈으로 하는거라며?”
“......”
아, 내가 호랑이 새끼들을 키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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