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총과 칼이 없는 전쟁
- 2시간 전 교역소 회의실 -
오늘 입항한 만신창이 상선의 회계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젊은 남자가 희희낙락하며 떠나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바야무트 상인회장이 사람을 불렀다.
“저 놈에게 사람 붙여. 그리고 오늘 입항한 상선의 선원들이 어디서 뭐 하는지 확실히 보고하도록. 특히 선장부터 항해사나 간부들...”
“네, 회장님. 다른 지시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잠시 생각하던 바야무트가 작게 손뼉을 치며 물었다.
“전에 시킨 일은 확실하게 처리했지?”
“물론입니다. 애초에 상선대가 왔다 간 것은 사실이니까요.”
“혹시라도 쓸데없는 이야기가 돌면 안 돼. 한 번 더 확인하도록.”
“네,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비록 뇌물이라는 말에 바로 혹하는 표정으로 돌변하기는 했지만, 바야무트는 리안이라는 젊은 남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 전의 강경한 태도에 비하면 너무 쉽게 태도를 바꾼거다.
그냥 사람 자체가 가볍고 욕심이 많은 것일 수도 있지만, 자신을 방심시키고 뒷통수를 치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외지인인 그가 알아볼 정보도, 알아볼 방법이나 장소도, 알아낼 수 있는 정보라는 것도 뻔하다.
최소한 이 항구에서 그의 눈을 벗어나서 무엇을 한다는 것을 불가능했다.
처음 배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부터 바야무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원양 항해용 상선, 그런데 고작 한 척이었다.
효율 때문이기도 하고 해적의 위협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양 상선이 혼자 다니는 일은 드물었다.
원양 상선이 혼자 다니는 경우라면 대부분 폭풍을 만나서 선단과 떨어졌거나, 해적을 만나 겨우 도망친 경우다.
직감이 이끄는 대로 바로 자리를 옮겨 다가오는 상선을 확인한 바야무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직 꽤 멀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기울어진 선체, 그럼에도 딱히 치열한 전투를 겪은 외형은 아니다.
폭풍을 만나 선단을 잃은 상선이다.
최근에 이 근처에서 폭풍이 있었다는 소식은 못 들어서 어디서 온 것인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애초에 외부 소식이 느린 곳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중요한 것은 저 상선을 상대로 재미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늦은 오후에 입항한 상선은 부랴부랴 조선소에서 수리 견적을 뽑았고 저녁이 되기도 전에 회계사라는 남자가 찾아왔다.
그런데 외형도 그렇고, 하는 행동도 영 미심쩍어서 살짝 떠보니까 왠걸? 아카데미에서 회계학을 배운 것도 아니고 심지어 따로 회계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폭풍이건 뭐건, 모종의 이유로 회계사가 죽은 거다.
그래서 급한대로 산술 좀 할 줄 알고 회계사 옆에서 보조나 하던 선원을 임시 회계사로 임명한 것일 터였다.
산술에 능한 선원이라는 것은 뭔가 상상이 안되기는 하지만, 확실히 항해사는 아니니까 선원이 맞을 거다.
굳이 이상한 점이라면, 자신이라면 못미더운 엉터리 회계사에게 전적으로 교역을 맡기느니, 차라리 선장이나 부선장이 직접 왔을 것이라는 것이다.
상선의 선장이나 부선장쯤 되면 회계를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대충 교역이 굴러가는 꼴은 이해하고 있게 마련이고,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그런 치들이 나서는 것이 나으니까 말이다.
안그래도 열흘쯤 전에 입항한 상선대에서 구입한 수입품이 너무 부족해서 연안 상선들에게 다른 섬에서 수입품을 구해오라는 발주를 내야 하나 고민하던 판이었다.
이 섬은 아무래도 위치상 다른 섬들을 거쳐 오는 상선들이다보니 정작 필요한 수입품은 부족한 상태로 오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게다가 최근 들어 점점 상선단의 방문이 뜸해지는 것이, 이렇게 쇠퇴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하긴 위치도 그렇고, 특별한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하지만 상대가 회계사도 아닌 뜨내기라면 이런 속사정까지 다 알지는 못할 거다.
아니 예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아니라고 우기면 그만이었다.
역시나 폭풍을 겪어서인지 상품들의 상태는 영 별로였다.
그나마 금속류와 공예품은 조금 낫지만 정작 바야무트의 주력 사업인 포목 쪽 상품, 면직물은 상태가 젖었다 마른 흔적은 물론, 구겨진 곳도 눈에 띄었고 희미한 화약 냄새까지 섞여 있었다.
괜찮다고 가져온 상품이 이 정도라면 절반 이상은 찢어지거나 곰팡이가 나서 못쓰게 되었을 것이다.
말하는 수량도 딱 그 정도였다.
그래서 적당히 가격을 후려쳤다.
평소 매입하던 가격의 절반 정도를 말했더니 젊은 남자는 펄쩍뛰며 노발대발했다.
교섭과 흥정의 기본도 모르는 녀석이었다.
뭐, 어차피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자가 이틀 동안 정말 선장을 설득해서 올지, 쓸데없이 정보를 모은답시고 땅만 파다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건 이미 이긴 싸움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바야무트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부하의 보고를 들으며 피식 실소를 흘렸다.
어쩌면 이렇게 예상을 벗어나지를 못할까?
혹시나 했더니 역시 그 젊은 남자, 라인이라고 했던가? 그는 연기를 했던 모양이었다.
상인회에 항해사라는 녀석이 교역 목록을 알아내려고 어제 아주 용을 썼다고 한다.
항해사의 얼굴을 아는 상인들이 제법 있었다고 하니까 나름 제대로 된 인선을 한 것이다.
만약 그 젊은 녀석이 직접 돌아다녔다면 빈축만 샀을 것이다.
하지만 딱 그 정도. 인선을 나름 잘했다는 것이지, 결과가 바뀌었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새로운 정보들이 들어왔다.
선원들의 입은 싸다.
심지어 떠들고 자랑하기를 좋아해서 몇 번의 교차 검증과 허세를 제거하면 한 배에서 일어난 일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항해일지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이클로나라는 이름의 제국 소속 상선은 마다카트에서 대규모 해적의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면직물에 베인 화약 냄새는 그 때 벤 것이겠지.
이후 마다카트 섬의 반란... 이것은 정말 의외의 정보였다.
이게 사실이라면 당분간 상선대가 끊길 확률이 높았다.
반란으로 항로가 끊긴 것은 고작 닷새에 불과하지만 이미 공격당한 상선대가 있다고 했고, 그 뒤에 왔어야 할 이클로나가 소속된 상선대도 폭풍으로 박살이 났다고 하니까 그 정도 시간은 상선대가 없다고 봐야한다.
여러 가지 정황을 따져보면 그 배의 상품들의 가치는 상당히 올라간다.
하지만 상대는 부에즈의 상황이나 정보도 모르고, 심지어 자신들이 가진 강점조차 모르는 것 같다.
만약 어제 온 남자가 이 사실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자였다면 은근슬쩍 반란 소식을 전하면서 이후 보급이 잘 안될 것이라고 압박하며 교섭을 유리하게 가져갔으리라.
그래봐야 정가 정도를 받았겠지만 말이지.
* * * * *
- 이클로나 호 갑판장 개인실 -
베이커, 볼라트, 네이선이 가지고 온 정보를 취합한 나는 무심결에 욕을 내뱉었다.
“이 개자식이? 사람을 이따위로 엿을 먹이려고 했다는 거지?”
혹시나 했더니 역시 본토 수입품의 가격은 상당히 비쌌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전체적으로 물가가 굉장히 높다는 것이다.
꽁돈을 무려 1400로스나 가져간 베이커가 비싸다고 투덜거렸을 정도니, 물가가 상당하다는 소리다.
물가가 오르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정적이고 폐쇄적인 이 섬의 경제 상황에서 주된 이유는 뻔하다.
전에 왔다는 상선대가 물건을 사기만 한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파는 상품보다 산 상품이 더 많은 거다.
그러니까 돈을 왕창 풀었겠지.
상선대가 왔다가 간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인데, 물건이 충분하다는 것은 거짓말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어차피 물건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을 못할테니 배짱을 부린 것이리라.
하지만 물건이 부족하다면 나에게는 위대한 선조... 아니, 이제 선조는 아니지만 전생의 선조, 아, 몰라! 하여간 거상 임상옥님의 불 쑈를 펼칠 수 있는 최소 조건이 만족된 거다.
“어디보자, 이걸 어떻게 설계를 해서 엿을 먹여볼까...?”
한참을 끙끙거리며 계획을 짠 나는 선장실로 달려갔다.
테일러는 내 계획을 듣고는 소리를 죽여서 한참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하면 되겠나?”
“네.”
테일러가 갑자기 옆에 있던 책을 벽에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당장 나가게!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나가!”
나는 테일러에게 장난스럽게 경례를 하고 쫓기듯이 선장실을 나왔다.
그리고는 선장실에서 충분히 떨어져서 지나가는 선원들이 잘 들리도록 ‘혼자서’ 중얼거렸다.
“에이, 씨발!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내가 뭐 회계사가 하고 싶다고 했나?”
내 ‘혼잣말’을 들은 선원 몇 명이 화들짝 놀라며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더니 몇 사람이 쭈뼛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심술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왜! 귀찮게 하지 말고 하던 일이나 해! 아니다, 일은 해서 뭐해? 야 너희들 가서 술이나 한 잔 해라.”
내가 주머니에서 동전들을 꺼내 던지자 선원들이 속없이 좋다면서 달려들어 동전을 집었다.
작위적인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동전 사이에 섞여든 은화 몇 개가 자꾸 눈에 밟혔다.
동전을 다 줍자, 선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갑판장님, 진짜 술 마시러 가도 됩니까? 저희 오늘 외출도 아닌데...”
“어, 누가 물어보면 내가 보냈다고 해. 가, 그냥 가!”
불퉁한 표정으로 선원들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 한 나는 조용히 자리를 옮겨 우르타와 네이선을 찾았다.
투덜거리는 녀석들의 입에 은화를 물려 닥치게 만든 나는, 창고에서 모종의 작업을 마친 뒤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예나 지금이나, 전생이나 현생이나 시공을 초월하는 불변의 진리가 있는데, 불장난은 밤에 해야 재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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