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불장난과 패자부활전
- 초저녁 바야무트 상인회장 저택 -
어느새 해가 바다 너머로 사라지고 어스름한 어둠이 깔려가는 시간,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바야무트도 일을 마무리하고 식사를 위해 자리를 옮기려던 참이었다.
최근에는 일하는 보람이 있어 더욱 일할 맛이 났다.
내일이면 노력의 과실을 따게 될 것이다.
그때 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이번 일만 잘 마무리하면 보좌관을 시킬까 생각중인 부하 녀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 회장님! 큰일입니다!”
그리고는 바야무트가 허락을 하기도 전에 감히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좋던 기분이 한 순간에 짜증으로 바뀌었다.
꼭 이렇게 오냐오냐 해주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녀석이 생겨나곤 했다.
“지금 뭐하는 짓이지? 당장...”
“회장님! 그, 그 미친놈이 면직물을 모조리 태우고 있습니다!”
감히 자신의 말을 잘라먹었지만 바야무트는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낮에 보고를 들으며 살짝 불안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자신과 가격 교섭에서 완전히 패배한 젊은 녀석이 선장에게 대판 깨졌다는 소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역시 젊은이의 치기 인지, 엇나가는 방향이 영 바람직하지 않았다.
마치 배에서 내리기 전에 난장판을 만드려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혹시나 했던 녀석이 결국 일을 내고 만 것이다.
불을 질렀다고? 미친놈이 욕 좀 먹었다고 목숨까지 걸어버린 건가?
바야무트는 부하를 밀쳐내고 빠른 걸음으로 문을 나서며 물었다.
“위치는 어디야? 설마 배 위에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
잠시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더니 급하게 따라붙은 부하 녀석이 대답했다.
“빈민가 입구입니다. 갑자기 화광이 솟구쳐서 사람들이 몰려나왔는데... 뭔가를 태우고 있더랍니다.”
“그게 하필이면 면직물이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사실 섬유나 직물은 불속에 들어가서 장시간 형태를 유지하는 종류의 물건은 아니다.
불이 솟구치고 있다면 확인하기가 영 쉽지 않다는 뜻이다.
“면직물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다른 잘 타는 물건들도 포함된 모양입니다. 쌓아놓은 양이 어마어마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여든 빈민들에게 면직물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이 미친놈이 도대체 왜...”
이정도면 분풀이가 아니라 공격이었다.
불을 질러 사람들을 모으고, 공짜라면 뭐든지 좋아하는 빈민들에게 면직물을 나눠준다.
그게 무엇이건 싼 값에 대량으로 물건이 풀리면 해당 상품의 가격은 폭락한다.
그런데 여기서 ‘싼 값’이나 ‘대량’이라는 말이 굉장히 주관적이고 애매하다.
그래서 사람들의 주관적인 느낌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다.
‘공짜로 풀려서 빈민들도 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박히면 면직물의 값은 폭락한다.
실제로 면직물은 판매할 양이 부족한 수준이지만 값은 떨어지는, 상인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바야무트는 젊은 남자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회계를 공부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머리가 잘 돌아가고 자존심이 대단한 녀석이었다.
이번에 면직물에 불을 지른 것은 바야무트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거나 추측할 수 있었다는 뜻이고, 그는 그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자신을 공격한 것이었다.
“다른 상인들은?”
“이정도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바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보고까지 아직 다른 상인들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마차는?”
“대기시켜놓았습니다.”
* * * * *
- 빈민가 입구 -
크으, 전생에서 봤던 캠프파이어는 저리가라 할 정도의 커다란 불이다.
장작의 가격은 캠프 파이어 따위는 비교도 안된다.
눈에 보이는 부분만 상품성이 남은 녀석으로 채우고, 안쪽은 이미 상품성을 상실한 녀석을 넣었음에도 일단 상자 수가 많다보니 가격이 어마무시하다.
지금쯤이면 바야무트인지 하는 사기꾼 놈은 물론 이 항구에서 방귀 꽤나 뀐다하는 상인들은 모조리 소식을 알게 되었겠지.
그런데 이거 이벤트 끝나기 전에 재료가 소진되는거 아니야?
벌써 불이 사그라드려는 기미가 보이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네이선에게 말했다.
“네이선, 열 박스만 더 넣자.”
못마땅한 표정으로 줄을 선 빈민들에게 면직물을 나누어주던 네이선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내 귓가에 속삭였다.
“미쳤어? 남은 박스들은 그래도 아직 팔만한 것들이야. 지금까지 들어간 것만 해도 선장님한테 맞아죽지 않을까 싶은데...”
“여기서 불이 작아지면 지금까지 태운 거 다 날리는거야. 잔말 말고 더 넣어.”
“젠장, 난 모른다. 네가 시킨대로 한 것 뿐이야.”
몇 번 욕을 내뱉은 네이선이 뒤쪽으로 가서 박스를 집어 불속에 던져 넣기 시작했다.
박스가 네이선의 손에 들리고, 힘차게 마지막 비행을 마친 뒤 불 속으로 뛰어들 때마다 군중들의 놀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네이선이 여덟 번째 박스를 잡았을 때, 네이선의 앞으로 일단의 남자들이 뛰쳐나왔다.
던지려는 경로에 사람이 들어서자 잠시 멈칫 하던 네이선은 내가 일러준 대로 연기를 시작했다.
“거, 위험하니까 나오슈.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저쪽으로 가시고.”
네이선이 박스를 내려놓지 않자, 한발 늦게 나타난 뚱뚱한 남자가 네이선에게 말을 걸었다.
“잠시만 그것 좀 내려놓게. 거, 아까운 것을 왜 다 태우고 그러나?”
“난 그냥 회계사님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오. 그것보다 누구쇼?”
쩔쩔매던 남자는 네이선의 시선을 따라 나를 보더니 급하게 달려왔다.
“이보시오, 나는 여기서 작은 상점을 운영하는,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왜 이렇게 다 태우고 난리를 치는게요?”
그렇지, 딱 걸렸다.
원래 상인회같은 느슨한 조합 같은 체제는 수입, 수출 창구를 단일화하여 내부 출혈 경쟁을 없애고 외부 교역에서 이점을 얻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외부 교역이 무산될 상황이라면?
당연히 팝콘처럼 여기저기로 튀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럴 때는 대표자의 잘못으로 몰아가면 되는거다.
“바야무트라는 놈이 가격을 후려치더군요. 상인회는 협조를 안하고 말이죠. 그런데 아무리 봐도 가격을 후려칠 상황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이오. 우리가 상황이 안좋으니까 한몫 잡으려는 것 같은데, 다 같이 죽어보자고! 배에 남은 물건들은 어차피 내구성 좋은 것들이니 이것들만 다 치워버리면 당신들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 알아?!”
처음에는 좋게좋게 말하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마치고 말았다.
그러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남자가 바로 말을 내뱉었다.
“이, 이런 짓을 하고도 당신이 괜찮을 것 같소?! 당신네 선장이...!”
“선장? 조까라고 그래! 어차피 난 그 가격에 거래해도 해고야. 이것만 다 태우고 난 튈 거야. 여기 사람들에게 풀어 놓은게 있으니까 배가 뜰 때까지 도망다니는 건 어렵지 않을 걸?”
“도망만 다닌다고 끝이 아니잖소! 그럼 정착...”
“정착? 이런 촌 동네에서? 웃기는군. 난 어차피 다른 배를 타고 나가면 그만이야. 막을 자신이 있으면 막아 보던지?”
미리 고민해서 만들어놓은 ‘난 다 때려치우고 깽판 칠거야’ 스토리를 풀어놓자 뚱뚱한 남자의 얼굴이 초초함과 다급함으로 가득 찼다.
그가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떼려는 순간, 뒤에서 중저음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폴라카이, 그만하지. 나머지는 내게 맡겨주지 않겠나?”
“아, 벨리얀씨? 하지만...”
“걱정 말고 내게 맡기게.”
“후, 그럼 부탁드립니다.”
의외로 뚱뚱이가 쉽게 물러나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기다렸던 대어가 낚이셨다.
그리고 그 대어의 뒤에 간발의 차이로 군중들을 밀쳐내며 난입중인 바야무트와 그 부하들이 보였다.
바야무트가 먼저 왔다면 따로 준비한 스토리가 있기는 했지만, 확실히 이쪽 스토리가 보기도 좋고 나도 편하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벨리얀이라고 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초로의 남자를 보며 나는 약간 당황했다.
전생의 대한민국만큼 나이에 대한 존중과 인정이 있는 사회는 아니었지만, 대충 사회적 위치(신분)가 비슷하다면 외모에서 보이는 나이가 상당히 중요한 사회가 이쪽 사회였다.
그러니까 대충 봐도 50쯤 되어 보이는, 아버지뻘 되는 남자에게 저런 극존칭을 받을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이다.
“아, 네, 벨리얀씨, 리안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리안씨의 상황은 오면서 대충 들었습니다. 우리 상인회장이 욕심에 눈이 멀어 잘못을 저지른 모양인데, 이렇게까지 하지 마시고 내일 차분하게 그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어떻습니까?”
나는 불타는 상자들과 아직 어정쩡하게 뚱뚱이의 부하들과 대치중인 네이선, 면직물 배급(?)을 중단한 우르타를 보며 말했다.
“이미 바로잡기에는 조금 늦은 것 같습니다, 벨리얀씨. 분명히 어제 충분히 기회는 드린 것 같은데요.”
내가 한번 떠보았지만, 벨리얀의 표정은 약간의 미안함과 호의가 섞인 처음 표정 그대로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최근 상인회장의 독단이 심해서 저희는 교섭이 있었다는 사실도 오늘 알았습니다. 심지어 그 내용도 몰랐구요.”
호오, 그렇게 빠져 나가시겠다?
미안하지만 이미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뭐. 사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구요. 보시다시피...”
나는 불길을 손짓으로 가리키고, 뒤이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슬슬 뒤로 물러나는 면직물을 가진 빈민들을 가리켰다.
“전 이제 잘못을 바로잡을 수가 없게 되었네요. 선장님이 절 잡아 죽이려고 할 테니까요.”
“그 부분은 저희가 도움을...”
난 일부러 그의 말을 끊고 네이선에게 소리질렀다.
“야, 네이선! 뭐해?! 늦어지면 선장한테 잡혀! 빨리 태우지 못해?! 그리고 우르타! 너도 그거 그냥 내버려 두고 아무나 가져가라고 해! 너도 상자 던져!”
그제서야 가면 같던 벨리얀의 표정에 금이 갔다.
그리고 장내에 난입한 바야무트가 소리를 질렀다.
“이런 미친놈이! 지금 뭐하는 거야!”
사기꾼 새끼가 누구보고 미친놈이라고?!
“야이, 사기꾼 새끼야! 너 같은 놈이 상인회장이라니 여기 상인회는 무슨 도둑길드냐?!”
자, 이제 어그로는 충분히 끌었다.
그리고 두 맹수는 서로를 인지했으니 결국 둘 중에 한 놈의 목덜미가 물려야 끝이 날 것이다.
......
그 사이에 희생될 상자들을 생각해서라도 두 맹수간의 싸움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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