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맹수가 맹수랑 싸워서 맹수가 남았다
“바야무트 회장, 이제 품격마저 잃어버린 건가? 보기에 좋지 않군.”
“크윽, 벨리얀...”
느긋하게 바야무트를 압박하는 벨리얀과 달리 바야무트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나와 안 좋게 엮이기는 했지만 바야무트는 꽤나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이다.
내 쑈가 의미하는 것과 자신이 벨리얀보다 늦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뜻이지.
그리고 현실적으로 획기적으로 판을 뒤집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번 쇼는 도박적인 부분이 적지 않았다.
실행에 앞서 볼라트 항해사에게 부에즈 항구 상인회의 세력구도를 확인을 하기는 했지만 이 세력구도라는 것이 영원불변은 아니었다.
만약에 전과 달리 부에즈 항구의 상권을 바야무트가 독점하고 있었다면 내 쇼는 그냥 쇼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
경제 시스템에 대한 법적 제한이나 처벌이 없는 세상이다.
그러니 바야무트가 독점중이라면 시세는 바야무트 마음대로 결정된다.
막말로 어느 날 갑자기 100로스짜리 물건을 5000만 로스에 판다고 해도, 그 말에 토를 달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내 물건을 불태우는 쇼 따위는 ‘미친놈이 미친 짓을 하는’ 수준으로 밖에 안보였을 거다.
게다가 바야무트의 경쟁세력이 힘이 너무 약해도 쇼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상인들이 과연 바야무트의 이런 행동들을 몰랐을까?
그럴 리가 없음에도 볼라트가 방문했던 상인회의 반응이 냉담했던 것처럼, 그들도 바야무트의 사기행각(?)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바야무트가 사기를 치면 그 과실 중에 일부는 다른 상인들에게 떨어지니까.
그러니까 그들이 마음을 바꾸려면 바야무트가 던지는 떡고물보다 더 큰 이익이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내가 기대한 것은 누구인지 모를 바야무트의 경쟁자, 바로 2인자의 권력욕이다.
바야무트가 치명적인 실수를 하면 단번에 그를 짓밟고 1인자에 오를 수 있는 사람, 바로 벨리얀이 되겠다.
그런데 만약 벨리얀의 세력이 형편없었다면? 아무래도 다른 상인들이 벨리얀에게 힘을 실어주기는 힘들었겠지.
그 외에도 빈민들이 너무 많이 몰린다거나, 조금 몰린다거나, 선장님이 선원들 통제에 실패한다거나, 쇼가 시작되기 전에 발각된다거나... 진짜 수도 없는 도박수가 있었다.
물론 상황이 너무 나빴고, 시간도 없었고, 사실 난 천재가 아니라서... 이런 방법밖에 생각해내지 못했지만, 다행히 결과는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보통 상선이라면 교역 실패는 선장과 회계사의 해고부터 선주의 파산까지 여러 사람의 생계가 걸린 문제겠지만...
우리는 뭐, 실패하면 선장님이 실망이야 하겠지만 딱 그 정도였을 테니까 부담도 적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바야무트와 벨리얀의 승부는 일방적으로 끝나가고 있었다.
내용은 잘 못 들었지만 양쪽에 서 있는 사람의 수가 이미 승부를 알려주고 있었다.
딱 봐도 멀찍이 떨어진 빈민들과는 옷차림부터 다른 사람들이 어느새 내 주위에 몰려있었는데, 벨리얀 쪽에 거의 8할이 몰려 있었으니 이미 바야무트는 이 승부에서 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때 어색하게 서 있던 우르타가 조용히 속삭였다.
“리안, 이거 계속 태워야 돼?”
“...그만해, 더하면 역효과야.”
마무리도 확실하게 해야 하니까 내게 영감을 주신 그분처럼 타버리거나 무료 나눔으로 손실된 부분의 값까지 다 받아 낼 작정이다.
* * * * *
“그만하지, 우리는 더 이상 비열하고 치졸한 수를 일삼는 당신을 상인회장으로 인정할 수 없소, 그러니 이만 회장 자리는 내려 놓으셔야겠소.”
벨리얀의 선언에 가까운 말에 그의 편을 들기로 한 상인들이 한 목소리로 호응했다.
“난 흥정을 한 것뿐이야! 정보도 부족하고! 교섭능력도 없고! 어린 치기만 남은 저 놈이 미친짓을 한게 왜 내 잘못이라는 거지?!”
바야무트가 발작적으로 소리치자 벨리얀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정상적인 시세의 절반을 후려치는게 흥정인가? 보통 우리는 그걸 사기라고 부른다네.”
“벨리얀 당신이라고 그렇게...!”
“그리고 상인의 생명은 신뢰지. 누가 사기행각이 밝혀진 사기꾼과 다시 거래하려고 하겠는가?”
표독한 표정으로 쏘아붙이려는 바야무트의 말을 낚아 챈 벨리얀이 차갑게 응수하자, 잇소리를 내던 바야무트가 휙 소리가 나도록 몸을 돌렸다.
“어차피 쓰레기 같은 물건들을 정가를 주고 사겠다니! 멍청하기 그지없군. 흥!”
“그럼 바야무트 자네는 이 거래에서 빠지는 걸로 알겠네.”
자신의 마차를 향해 쿵쿵대며 걸어가는 바야무트의 뒤통수에 얄미운 벨리얀의 말이 따라붙었다.
음, 당장 우리 편이기는 한데 이 사람도 성격이 좀 별로인 것 같다...
“자네들은 뭐하나?! 그 따위 거래에 참여할 셈인가?!”
“아니 그게...”
“바야무트 회장...”
“......”
바야무트가 갑자기 이쪽을 보며 마지막까지 그의 뒤에 서 있던 지지자(?)들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마지막 충신(?)들의 반응은 영 미적지근했다.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압도적인 자본이 없는 이상 경쟁 상점 중에 한 쪽만 상품이 있다면 다른 한 쪽은 고사해 버리는 것이 이 바닥의 생리다.
바야무트는 상인회장을 할 정도니 자본의 힘으로 어떻게든 이 난관을 헤쳐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상인들에게는 당분간 구하기 힘들 것으로 예상되는 상품이 경쟁 상인에게 온전히 넘어가는 꼴을 눈뜨고 볼 수는 없는 일이겠지.
“이이익... 저런 것들을 믿었으니...! 제기랄!”
그 꼴을 보던 바야무트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혼잣말을 내뱉더니 더 빠르게 장내에서 사라졌다.
사라지는 바야무트를 조용히 바라보던 벨리얀은 이내 나를 향해 돌아서더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회계사님.”
“흠, 뭐 그쪽 일이니까 제가 뭐라고 할 수는 없죠.”
이미 서로 이게 쇼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보니 ‘볼일 다 보셨으면 비키시죠? 전 불장난을 좀 더 해야 하거든요?’ 라고 말하기는 매우 민망한 상황이었다.
솔직히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하겠다는 정도로 디테일한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다보니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어색한 상황을 부드럽게 넘어갈만한 말재주는 없으니 그저 볼이나 긁적일 수밖에.
그렇다고 ‘아쉬운 사람이 굽히고 들어오겠지’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기에 현재 상황은 내게 많이 불리했다.
왜냐하면 내가 의도하고 터뜨리기는 했지만, 애초에 벨리얀의 목적은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벨리얀은 바야무트를 쓰러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을 것이다.
우리 배와의 거래 재개 같은건 조금 서브 퀘스트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거래를 하는데 상대방한테 돈은 줬는데 물건은 못 받은 꼴이다.
전생에서 중고거래 사이트가 왜 바람 잘 날이 없는지 빠르게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벨리얀은 착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택배 박스에 벽돌을 포장해서 보낼 정도의 인성파탄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보시다시피 바야무트 전회장의 월권은 우리 상인회의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저 불부터 일단 끄고 차분하게 거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결코 전과 같은 불의한 일은 없을 겁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네이선, 우르타! 이제 그만 불 꺼.”
내가 못이기는 척 애들에게 불을 끄라고 말하자 벨리얀은 모여있는 상인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상인들은 공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남아있던 몇몇 빈민들을 해산시켰다.
상인뿐만 아니라 우락부락한 호위들까지 해산을 강요하니 빈민들은 그때서야 나지막한 욕을 내뱉으며 흩어졌다.
불이 꺼지고 우리와 상인들만 남자 벨리얀은 내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썩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지만 사람간의 관계라는 것은 진심을 다하면 발전해 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은 시간이 늦었고 자리도 마땅치 않으니 이만 파하고 내일...”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벨리얀씨.”
“...아, 하실 말씀이라도?”
“여기서 헤어지자는 말씀은 저희가 남은 상품을 들고 배에 복귀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희 선장님이 절 살려두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아니, 그것은...”
어휴,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똑같은 놈들이다.
선장님이 허락한 작전이니까 당연히 내가 진짜로 죽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벨리얀 입장에서는 ‘선장님과의 공모가 있었을 것이다’ 라고 예상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확신은 못하는 상황.
그런데 그냥 돌아가라는 것은 내가 장난질 친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만약 이 상황이 끝나고 내일쯤에 새로 자리를 마련하게 되면 지금의 분위기는 거의 대부분 사라지고 말 터였다.
지금의 분위기가 뭐냐고? 당연히 불쌍한 상선을 등쳐먹던 악덕 상인을 정의의 이름으로 쫓아낸 진솔하고 착한 상인들 코스프레 상태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내가 조금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적당이 받아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일이라면?
오늘의 일은 까맣게 잊은 것처럼 한 푼이라도 더 싸게 사고 비싸게 파려는 상인들의 기본 스텐스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지사다.
내가 짐짓 어이없고 화난 표정으로 다그치자, 벨리얀의 미소가 사라지며 나지막하게 반문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드리면 될까요? 우리 부에즈 항구에서 곤란을 겪으셨으니 편의를 봐드리겠습니다. 상인회 대표를 보내서 선장님께 해명이라도 해 드릴까요?”
아주 끝까지 모르쇠로 오리발을 내미시겠다는 것이군?
“해명이라고 해도 어차피 선장님은 믿지도 않을 겁니다. 그보다는 남은 상품을 이 자리에서 매입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허허, 그게 참... 보시다시피 제가 이변에 놀라 급하게 나오느라 거래 준비가 전혀...”
“그 부분은 걱정 마시죠, 야, 우르타! 저쪽 박스에 종이 있을 거야. 한 묶음 가져와봐.”
무표정으로 변한 벨리얀 얼굴이 꿈틀했다.
나는 재빨리 종이를 대령한 우르타에게 윙크를 한 번 날려주고 쾌활하게 말했다.
“어차피 항구의 상인회에 소속된 분들은 거의 다 모이신 것 같은데, 얼마 되지도 않는 물건이니 적당히 자필 계약으로 하시죠? 그럼 저도 말이 필요없는 교역성과를 들고 가서 좋고, 여러분도 빨리 창고에 물건을 넣을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으으음...”
잠시 고민하던 벨리얀은 고개를 젓더니 대답했다.
“리안 회계사님이라고 했던가요? 후우, 물건부터 확인합시다.”
벨리얀의 말이 끝나자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상인들 중 몇몇이 경쟁적으로 남은 상자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벨리얀도 수행원들을 이끌고 가죽물품과 직물이 담겨있는 상자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황이 조금 다르다보니 카피한 이야기와 완전히 똑같을 수도 없었고, 극적인 대박을 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급조한 계획 치고 이만하면 소기의 성과는 이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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