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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56화 (56/420)

<56화> 전통과 축제가 생기는 이유

담합은 건강한 시장 경제를 망치는 악독한 녀석이므로, 그 녀석을 걷어냈더니 무제한 자유 경쟁에 의해 최고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라는 결과였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한 지역을 대표하는 상인들이 그 정도로 허술한 바보일 리가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상인들끼리 경쟁이 붙어서 가격이 조금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기는 했다.

그런데 가격이 오르기는 개뿔, 이미 자기들끼리도 말을 다 맞춰 놨는지 하나의 상자에 두 사람 이상 흥정을 붙이는 경우가 없었다.

다만 바야무트가 제시했던 허무맹랑한 가격은 아니고, 적당히 내 이마에 핏대가 올라올 정도의 가격이었다.

나라고 그냥 일방적으로 처 맞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마다카트의 반란 이야기를 슬쩍 흘리고, 알아본 시장 상황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연안 상선의 운용비용과 다른 섬들과의 정보 전달 속도 차이 등,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오만가지 이유를 대면서 가격을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련한 상인들을 상대로는 그렇게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지.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이기는 했다.

이미 양쪽의 패가 다 까진 상황에서 뭐 얼마나 더 블러핑을 치겠어?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계약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벨리얀과 마주섰다.

“벨리얀씨, 덕분에 제가 떳떳하게 선장님을 볼 수 있겠네요.”

“별말씀을요, 회계사님께 죄송할 따름이죠, 허허... 그럼 나머지 물건은...”

“아니 뭐, 벨리얀씨가 그렇게 죄송하시다면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나는 벨리얀에게 기다리던 공치사가 나오자 재빨리 말을 낚아챘다.

거래 결과에 마음이 좀 풀렸는지 담담한 눈빛이던 벨리얀의 눈썹이 한차례 꿈틀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최소한 오늘만큼은 정의롭고 착한 상인 역할을 해야 하는 벨리얀에게 내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처럼 별 볼일 없는 잡상인에게 무슨 부탁까지... 그래도 힘 닿는데까지 도와 드리겠습니다.”

끝까지 확정적으로 ‘해준다’라는 말을 안하는 걸 보면 언어중추에 그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거름망이라도 넣어 둔 모양이다.

“다름이 아니고 저기, 저것들 말입니다...”

내 손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던 벨리얀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그 곳에는 잘 꺼져서 불씨조차 남지 않은 불 쇼의 잔해가 있었다.

“저것들은 저도 안타깝게 생각...”

“아니, 생각을 해보니까 이 계약서 들고 가도 선장님이 수량 안 맞는다고 제 횡령을 의심할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실대로 말씀을...”

“우리 선장님 성격이 좀 불같아서요, 사실대로 말하면 아마 절 죽이지 않을까 싶은데... 저라고 딱히 죽을 마음은 없거든요.”

“설마 그렇게까지... 오늘의 멋진 결과를 말씀하시면...”

“그래봐야 원래 받아야 할 정도 받는 것 아닙니까?”

아니다, 예상 판매가(손상 상품 기준)에서 10%정도를 더 받았으니, 손상된 상품들이 가격을 후려치기 매우 좋다는 것을 생각하면 선방한 것 맞다.

단지, 이번 계획을 세우면서 내 몸에서 이탈한 머리카락들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50% 정도 더 받기를 바랐던 내가 문제일 뿐.

하지만 교섭에 임할 때는 뻔뻔함을 장착하는 것이 정석 아니겠어?

“휴우, 내일 교역품 구매하실 때 편의를 봐드리겠습니다.”

“그럼 여기에 좀 써주실 수 있나요? 선장님께 보여드려야 해서... 화끈하게 한 30%정도 싸게 해주신다고...”

순간적으로 벨리얀의 이마에 힘줄이 솟구치는 환상이 보였다.

어... 환상이 아닌가?

“30%를 할인하라니... 말도 안됩니다. 제가 상인들에게 잘 일러서...”

그가 겨우 화를 참고 조용히 말하자 난 땡깡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그럼 내일 나올 사람은 제가 아닐 것 같은데요? 저 죽어요! 죽기 전에 남은 화물에 불이라도 질러버릴까...”

배에 남은 상품들이 불에 강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도 손상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실제로 할 생각도 없고,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만.

하지만 지금 벨리얀의 입장이 좀 그렇다.

마음 같아서야 ‘니 맘대로 해!’라고 외치고 싶겠지만, 막상 방금 불 쇼를 벌인 사람과 불 쇼에서 발생한 손실 이야기를 하다가 ‘또 불을 지르던가 말던가’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

슬슬 ‘더 자극하면 터지는거 아니야?’라는 불안감이 들 때쯤에 벨리얀의 마지막 인내 같은 말이 들려왔다.

“후우, 회계사님 따로 원하시는게...”

“결국 이 사태가 바야무트 그 놈 때문 아닙니까? 그러니까 상인회에서 그 보상이라던가, 하는 그런 처리를 조금...”

거기까지 다른 상인들도 들리게 말한 나는 짐짓 발을 헛디딘 척 몸을 벨리얀 쪽으로 넘어지면서 무심결에 나를 부축하려고 다가온 그에게 속삭였다.

“저희는 단가의 70%만 받으면 됩니다. 내일 거래 때 선지급 해주시면 좋구요, 그러면 저희 구매 목록은 벨리얀씨의 조언을 받아서 작성하도록 하죠.”

거의 랩에 가까운 속도로 말했지만 정확히 이해했는지 벨리얀의 눈빛이 차갑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나를 일으킨 벨리얀이 내 옷을 툭툭 털어주며 말했다.

“아이고, 괜찮으십니까? 오늘 너무 고생하신 모양입니다. 고생도 하시고 손해도 보셨으니 당연히 보상을 받으셔야지요.”

“그런데 저희가 한가롭게 그 바야무트 놈이랑 보상문제로 싸울만큼 시간이 없거든요...”

“걱정마십시오. 내일 저희 상인회에서 오늘 손실하신 상품에 대해 보상금을 먼저 지급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문서로 남겨드리지요.”

벨리얀은 급변한 분위기에 적응을 못하고 얼빵하게 서 있던 우르타에게서 종이를 한 장 받더니 유려한 서체로 보상금 지급 각서를 작성했다.

“야, 우르타, 우리 불태운거랑 나눠준거랑 다해서 얼마나 돼?”

“어, 어? 아니, 그, 안에 든 것도 그렇고...”

“어휴, 이미 다 타버렸는데 뭐가 들었는지 당연히 아무도 모르지. 상자가 몇 개냐고?”

“그러니까, 어, 음, 대충 35개...?”

물론 저 35상자도 정확하지 않지만 실제로 처음 태운 상자 20개 정도에는 대부분 쓰레기만 들었으니 실제로는 20 상자도 채 안되는 꼴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나나 벨리얀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허허, 그 와중에 그걸 누가 기억하겠습니까? 그럼 40 상자분으로 하시죠. 내용물은 모르니 오늘 나온 상품들의 평균으로 잡고... 그렇다면 이정도가 적당하겠네요. 어떻습니까?”

역시 똑똑한 사람이랑 합을 맞추니까 이것저것 설명을 안해도 돼서 편하다.

“아이고, 그렇게 해주시면 제가 선장님께 당당하게 오늘 건을 보고할 수 있겠네요.”

문서를 확인하던 나는 적혀있는 금액에 헤벌쭉 웃었고, 나와 눈이 마주친 벨리얀과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7:3으로 나누는 겁니다’

‘적힌 금액의 70%만 지급하겠소.’

좋아, 계약 성립이다.

* * * * *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 선장님께 보고를 한 뒤, 방으로 돌아가는데 우르타와 네이선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 안자고 뭐해? 아, 설마 돈 달라고? 이 자식들이... 야! 내가 그걸 떼먹냐?!”

이 녀석들에게 이번일이 잘 끝나면 ‘시간외 특수노동 동원자에 대한 비공식 근로 수당’, 속칭 알바비를 주기로 했더니 그거 받으려고 나와 있는 모양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서는...

“아냐! 궁금한게 있어서 그래!”

내 질책에 우르타가 발끈하며 대답했다.

음... 아직 노예까지는 아닌 모양이다.

“그래, 뭐가 궁금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그 벨리얀인가 하는 사람, 마지막에 왜 그런거야? 그 전까지 돈 안주려고 아주...”

“내 말이! 딱 리안이 넘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리안이 한 대 맞을 줄 알았... 어라?”

지들끼리 서로 마주보던 녀석들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넘어졌을 때 뭐라고 한거야?!”

“넘어졌을 때 뭐라고 한거야?!”

멱살도 잡히고, 뒤통수도 맞고, 니 킥(?)도 맞고, 한참동안 시달리던... 잠깐, 니 킥은 좀 많이 간거 아니냐?

하여간에 결국 내 방에 들어온 녀석들에게 선장님한테 받은 와인을 한잔 씩 따라 준 나는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만약 내가 돈을 내야 하는 사람으로 상인회의 다른 사람이나 벨리얀을 지목했다면 죽어도 돈을 안주려고 했겠지. 그런데 내가 말했잖아? 내게 보상을 해야 할 사람이 바야무트라고.

“아니, 그럼 그거 몰래 받아서 우리 안줘도 되는거 아냐? 우린 어차피 떠날거잖아.”

“아니지! 채권자가 우리야. 그걸 우리에게 숨기면 바야무트 입장에서는 우리가 갈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는거야. 채권자가 사라지니까. 하지만 우리에게 보상금을 선지급을 해버리면? 채권자가 우리에서 상인회 또는 벨리얀으로 바뀌는거지.”

“그래도 어차피 우리한테 다 줄 돈인데 굳이 그렇게...?”

“크크큭, 내가 70%만 받는다고 했거든.”

“으앗! 역시 그랬구나!”

역시 음흉하다느니, 사악하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녀석들에게 탁자를 두들겨서 주의를 환기시키고 물었다.

“자, 내가 70%를 가져. 그러면 벨리얀은 얼마나 이득이겠어?”

“어... 30%?”

“그러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멍청한 소리를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들을 보며 벨리얀이 저 놈들보다는 똑똑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 똑똑하니까 지역 상회에서 2인자가 되었겠지, 이제 1인자로군.

“어휴, 이 똥멍청이들아... 벨리얀과 바야무트는 경쟁관계인데 바야무트의 돈을 빼서 그 중에 30%를 벨리얀이 갖는거잖아. 그러니까 벨리얀은 130%가 이득인거야. 그러니까 상자 수도 마구 부풀리고 내가 제시한 비율에 다른 말도 안한거지.”

“어? 어, 어? 우와! 그게 그렇게 되는거야?!”

“뭐야, 계산이 되게 이상한데 설득력이 있어?!”

나는 감탄하는 녀석들에게 쐐기를 박아주었다.

“그리고 생각을 해봐라, 비록 1인자라는 견고한 성이 무너졌다고는 해도 바야무트의 자본력은 만만치 않을거야. 능력도 있겠지. 오늘과 반대로 바야무트에게 행운이 깃들면 재기할 가능성이 높아. 그런데 상인회를 동원해서 보상금까지 지불하라고 압박할 수단이 생기는거야. 운이 조금 더 따라준다면 아예 재기불능으로 몰고 갈 수도 있을 걸? 벨리얀 입장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지.”

“설마, 그걸 다 생각하고 한 거라고?”

“리안... 나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어...”

감탄하는 녀석들을 보면서 어깨에 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와인을 홀짝였다.

선장님이 주셔서 맛있을 줄 알았는데 시고 떫다... 이딴 걸 왜 마시는 거야?

그리고 네이선과 우르타에게 말하지 않은 벨리얀이 가져간 이득을 속으로 조용히 뇌까렸다.

‘벨리얀의 목적은 처음부터 하나였어. 바야무트를 무너뜨리는 것. 이번에 물건을 구하지 못한 것은 바야무트에게 손실이 될 수는 있어도 치명타는 되기 힘들어. 그런데 사기를 치다가 거액의 보상금을 지불했다는 평판은 상인에게 치명적이지. 게다가 이 섬에서 처음으로 있었던 화려한 불 쇼와 엮인 사건이야. 불 쇼가 기억되는 한, 바야무트의 평판이 올라갈 일은 없을 터. 자신을 2인자로 만들고, 중요한 교섭에 얼굴조차 비추지 못할 정도로 찍어눌러버렸던 바야무트라는 거함을 완전히 침몰시키기 위한 마지막 한 방으로 이만한 게 또 있을까? 다음에 올 때면 매년 이맘때마다 불 쇼가 펼쳐질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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