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세상에 싸고 좋은 물건은 없다
다음 날 툴툴거리는 선원들을 닦달해서 배에 남아있던 교역품들을 모두 꺼낸 나는 교역소로 향했다.
남은 상품들이 대부분 무거운 것들이라 직접 옮기는 것이 상당히 난감했는데, 벨리얀이 보내준 일꾼들과 수레들이 아침 일찍부터 와 있어서 한시름 덜 수 있었다.
통상적이라면 견본품을 들고 가서 계약을 하고, 우리는 선창에서 부두로 상품을 빼 놓기만 하면 구매측에서 직접 가지고 가는 것이 상례다.
우리가 구매할 때도 마찬가지로 그쪽에서 우리 배 앞까지 물건을 배달해준다.
선박측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배에 싣는 것은 대부분 사람이 직접 들고 옮기기에는 무겁고 부피가 크다.
그래서 보통 수레를 써서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하는데, 배마다 수십 대의 수레가 구비되어 있을 리가 없잖아?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우리는 조금 문제가 있었다.
견본으로 뭔가를 들고 가기에는 전투와 폭풍을 겪은 상품들의 상태가 너무 중구난방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쪽에서 옮겨줄 수는 있지만 뭐랄까, 서로 조금 부담스러운거다.
믿는다고 하지만 살지 안살지도 결정하지 않은 상대에게 상품을 온전히 맡기는 우리도 부담스럽고, 구매가 확정되지도 않은 상품들을 힘들게 옮기는 저쪽도 부담스럽다.
물론 이쪽이나 저쪽이나 거래를 확신하고 있기는 하지만, 확신이랑 확인은 서로 다른 거잖아?
그래서 직접 다 들고 가기로 결정하기는 했는데, 진짜 우리 선원들만 데리고 수레도 없이 옮겼으면 욕을 오지게 먹을 뻔 했다.
그에 비하면 판매 교섭은 쉽게 끝났다.
이미 환경적 요소에 대한 이야기는 어제 이야기가 다 끝났고, 대략적인 거래 시세도 확정되었으며, 눈앞에서 상품을 확인할 수 있다 보니 양쪽이 제시하는 가격이 얼추 비슷했기 때문이다.
계약서 작성이 끝나고 상인들이 대금을 준비하겠다고 빠져나간 사이에 벨리얀이 말을 걸었다.
그는 오늘 계약에는 한 번도 나서지 않았는데, 오늘의 상품들이 자신의 주력 품목이 아니라고 해도 꽤나 겸손한 반응이었다.
바로 어제 바야무트를 끌어내린 자타공인 상인회의 1인자이니, 조금쯤 바야무트와 같은 권력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 보통 사람이니까.
“거래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네, 벨리얀님 덕분에 좋은 가격에 거래를 마쳤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구매하실 상품을 좀 보러 가시겠습니까?”
“아, 네. 그러시죠.”
으음, 사실 이 부분이 조금 애매한 부분이다.
어제는 상황이 그랬던 만큼 오늘 구매 목록은 벨리얀에게 맡기겠다는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선장님께 보고하면서 생각해보니 이 섬의 물가가 상당히 올라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바로 본토로 귀환할 작정이 아닌 이상에야 굳이 물가가 비싸진 곳에서 구매를 진행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심지어 우리는 잃어버린 선단의 자취를 찾기 위해서라도 예정 항로를 역순으로 추적해야 하는 판이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벨리얀을 따라 통로를 몇 개 지나자 커다란 창고가 나타났다.
이미 언질이 있었는지 입구를 지키던 경비는 벨리얀을 보자 바로 문을 열어주었고, 우리는 창고 안에 들어섰다.
채광도 잘되고, 어두울만한 부분에는 유등까지 달아놓은 창고에는 여러 가지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직접 본 것은 별로 없었지만 책으로는 봤던 것들이었다.
닥터 롱베르가 좋아할 것 같은 약초들, 후추와 마늘로 대표되는 향신료들, 여러 가지 향이 은은하게 뿜어지는 향료들, 정체를 알 수 없는 말리거나 절인 과일까지, 대부분 농장에서 재배되는 농산품들이었다.
특이한 것이라고 하면 저쪽에 있는 작은 모피들, 크기로 봐서는 토끼정도 크기 같은데 잘 모르겠다.
내 시선이 모피에 머무는 것을 느꼈는지 벨리얀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쪽 향료 제도의 몇몇 섬에서 자생하는 동물의 모피입니다. 이쪽 원주민 말로 팍시틀이라고 부르는 녀석인데, 제법 인기가 있...”
한참 설명에 열을 올리던 벨리얀의 말을 끊으며 나는 들으라는 듯 억지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아이고 벨리얀님. 그건 좀 아니죠. 지금이 모피가 좋을 계절도 아니고... 그렇게 털이 좋은 것 같지도 않은데요?”
그러자 피식 웃음을 흘린 벨리얀이 모피 한 장을 집어들며 말했다.
“회계사님, 이 쪽은 잘 모르시는군요? 한 번 만져보시겠습니까?”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벨리얀이 내쪽으로 모피를 내밀면서 재촉했다.
사실 진짜로 난 모피는 잘 모른다.
그저 아는거라고는 겨울에 잡은 짐승의 모피가 더 좋다는 정도?
그런데 뭐가 잘못된건지 벨리얀이 다 이긴 승자의 표정을 하고 있으니 미치고 곡할 노릇이다.
그리고 만져봐야 내가 뭘 알겠어? 그냥 털이 부드럽다고 느끼는게 고작이지.
“......”
“회계사님이 만져보신것처럼 털이 빽빽하죠? 전부 겨울에 잡아서 정성스럽게 처리한 녀석들입니다. 설마 겨울에 잡은 짐승의 모피를 겨울에 팔겠습니까? 무두질 공정이 얼마나 오래걸리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아, 네...”
사실은 잘 모른다.
물론 무두질이 어렵고, 더럽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정도는 아는데, 그게 얼마나 걸리는지까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래도 겨울에 잡은 동물의 모피를 여름에 파는 것은 좀 심하잖아!
“그래도 지금이 8월인데 겨울에 잡은 것은 좀...”
“정말입니다. 다른 것도 한 번 확인해 보시죠.”
마지못해 다른 것들도 살펴보는데, 확실히 품질을 균일해 보이기는 했다.
“다른 것보다 내구성이 좋습니다. 일반적인 모피들에 비하면 가격도 저렴한 편이구요.”
“내구성이요?”
“네, 보시다시피 고급 모피들에 비하면 조금 거친 편이고 색도 별로지만 내구성만큼은 다른 모피들과 비교가 안됩니다. 처리과정을 더 길게 하고 장기 보관을 하더라도 이런 품질이 유지되는 이유죠.”
와, 역시 사람은 알 수 없는거다.
벨리얀이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인줄은 진짜 몰랐다.
역시 상인은 상인인 모양이다.
“으음, 가격은요?”
‘내구성’이라는 말에 혹한 나는 모피답지 않은 저렴한 가격을 듣고는 구매를 결정했다.
지금부터 섬을 몇 개나 들러야 본토로 귀환할지 모르는 판인데, 괜히 장기 보관이 힘든 상품을 샀다가는 출발도 하기 전에 폐기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통 상선과는 다르게 선장이 수익률에 별 관심이 없는 이클로나를 탄 만큼, 여러 가지 상품을 취급해 보려는 개인적인 욕심도 조금 있었다.
구매할 물량을 결정하고 다른 상품을 보고 있는데 또 눈에 들어오는 상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방화용 모래나 뭐 그런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양이 좀 많은 것 같아서 확인해보니, 모래알 크기부터 호두보다 조금 큰 녀석까지 크기가 다양한 밝은색 광물이 놓여 있었다.
분명히 향료 제도에는 광산이 없다고 들었는데?
“벨리얀님, 이건 뭡니까? 이것도 파는 건가요?”
“아, 쿼트석 말씀이시군요.”
“이게 바로...”
쿼트석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다.
마도구를 제작할 때 핵심이 되는 마력회로를 그려 넣는 기판을 만드는 재료로 주로 쓰이는 광물이라고 했는데, 마법이니 마도구니 하는 것들이 전생의 기억으로는 판단 자체가 불가능한 것들인지라 기억하고 있었다.
“이곳에 쿼트석 광산이 있습니까?”
광산이라는 말에 쓴웃음을 지은 벨리얀이 설명을 시작했다.
“광산은 없습니다. 그런데 개간을 위해 땅을 파다보면 이런 쿼트석이 주로 매장된 부분이 지금도 가끔씩 발견되고는 합니다. 예전에는 쿼트석 광맥을 찾겠다고 난리가 난 시절도 있었다고 합니다만, 아무도 광맥을 발견하지는 못했죠.”
“아, 그렇군요...”
“그래서 양이 얼마 되지는 않습니다. 이 걸 전문적으로 다뤄보겠다는 상인들도 있었지만, 애초에 공급자체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보니 다들 포기할 수 밖에요. 농사에 도움은 안되는 녀석이라 발견되면 파내서 버리는 사람도 꽤 됩니다.”
일단 마도구의 재료라면 본토 어디건 간에 수요는 충분할거다.
무엇보다 광물이다, 무려 광물. 얘는 한 1년쯤 바다를 떠돌다가 입항하더라도 무사할 확률이 매우, 매우 높다.
그리고 나중에 싣게 될 향료, 향신료, 약초 등은 보통 부피에 비해 무게가 가볍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부피에 비해 무거운 상품이 들어가도 상관없다는 말이지.
마지막으로 벨리얀이 강력 추천하는 설탕과 견과류 하나를 구매하기로 결정 한 뒤, 처음 교섭했던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는 이미 다른 상인들이 거의 다 모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묵직해보이는 돈 자루를 들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인들은 대부분 계약서를 들고 있었고, 그 뒤에 수행원들이 자루를 들고 있었다.
저것도 다 계산하라면 머리 좀 아프겠다.
화폐 종류가 많다보니 계산을 할 때마다 고역이다.
로스라는 공용 단위가 있기에 그나마 나은 편이지, 만약 화폐간의 상대적 가치를 비교해서 계산을 해야 했다면 회계사는 절대 못한다고 했을 것 같다.
* * * * *
관례대로 구매한 상품들은 우리가 출항하는 날에 맞추어 배 앞으로 배달해 주기로 했기 때문에, 거래를 마친 나는 상자를 가득 채운 금화와 은화를 선원들에게 들게 한 뒤 배로 복귀했다.
상자를 채운 금화와 은화라니... 워낙 거액이라 간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지만, 대낮인데다가 상인회에서 호위들까지 붙여줘서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벨리얀이 지급한 보상금까지 포함하니, 대략 원래 구매가의 20%정도는 이득을 본 것 같다.
목숨을 걸고 장거리 교역을 한 것 치고는 초라한 결과다.
하지만 거의 40%의 교역품을 파기했고 나머지 상품들도 가치가 많이 떨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괜찮은 이익이기도 했다.
물론 그 이익도 전투와 폭풍의 손실을 만회하기에는 턱도 없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계약서와 거래 보고서를 다시 확인하고, 돈이 든 상자가 봉인되는 것을 확인한 뒤 열쇠를 들고 테일러에게 보고를 했다.
그리고 보고를 다 들은 테일러가 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번 거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네? 뭐,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만...”
“나쁘지 않다. 흠,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좋은 거래는 아니었어, 그렇지?”
난 왠지 등에 식은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평소에 테일러가 워낙 관심이 없고 우선순위에서 항상 다른 일들보다 밀렸었기 때문에 거래 결과로 깨질 줄은 몰랐다.
“자네도 설탕과 그 견과류는 잘못 샀다는 것은 인정하겠지? 어디까지나 어제 일에 대한 연장선으로 구매한 것이니까 말이야.”
“네... 하지만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이 섬의 인플레이션을 생각하면.”
“그래, 그건 어제의 연장이라고 넘어가지만 말이지, 이 모피와 쿼트석은 어떻게 생각하나?”
“네? 그건 그래도 괜찮은...”
“나도 상행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기는 하네만, 이 모피는 들어봤네. 저기 일레드 북쪽에서 유행한다더군. 평민들도 쓸 수 있는 저렴한 모피로 말이야.”
일레드라니... 제기랄, 잘못 건드렸군.
일단 일레드 왕국과 몰로스 제국간의 긴장관계 때문에 우리가 일레드 북부까지 가서 파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고 아무데서나 팔자니 다시 배를 타고 운송하거나 육로로 운송해야하니 제 값을 받기 힘들게 뻔하다.
그러고 보니 벨리얀이 그냥 인기가 많다고 했지, 어디서 인기가 많다고는 안했다.
“그리고 이 쿼트석... 휴, 이건 본토에서도 꽤 흔하네. 차라리 마정석이면 모를까...”
아니, 잠깐만! 이건 진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벨리얀도 별로 열의를 가지고 팔려고 하지 않았고, 가격도 저렴했다.
판매자가 열의가 없다는 것은 상당히 좋은 반응 아니야?!
“자네 혹시, 그 상인에게 ‘내구성’이나 ‘폭풍’, ‘사고’, ‘보관’... 뭐, 이런 말들을 자주 듣지 않았나?”
어라? 생각해보니까 조금 그런 것 같기도 한데?
“그걸 선장님이 어떻게...?”
피식 웃은 테일러가 얼빠진 표정의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네, 이번에는 제대로 한 방 먹었군? 그 벨리얀이란 자, 제법이야. 자네에게 일부러 최근 사고의 트라우마를 상기시켜서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판 모양이군. 하긴 딱 봐도 악성 재고들로 보이기는 하는구만, 허허허!”
곧 9월, 사냥철이 다가오는 동물의 모피...
무겁고 가격도 싸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적은 양의 광물...
......
내 석궁이 어디 있었지?
이정도면 암살해도 무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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