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뫼비우스의 띠
- 벨로키나 왕국 스코타 후작령, 후작저택 입구 -
스코타 후작가는 벨로키나 왕국에서 손에 꼽히는 대귀족이다.
몇십년 전에는 정치적으로 크게 몰린 적도 있었지만, 당대 후작이 딸을 프레티아 왕국의 왕비로 만들면서 정치적 반전에 성공해 예전의 성세를 되찾았다.
게다가 해상 무역이 가문의 성세를 좌우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 델라라는 견실한 교역항을 가지고 있고 상선대까지 보유한 후작가가 탄탄대로를 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후작가의 정문을 지키는 가드인 제임스는 자신의 직업에 꽤나 만족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일 자체가 어렵지 않았다.
3교대로 근무를 하는 것만 조금 힘들 뿐, 일 자체는 그저 서있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굳이 어려운 일을 꼽자면 저택을 방문하는 손님을 상대하는 일 정도일텐데, 애초에 그런 일은 사전에 집사들이 전달해 주고, 가드들은 약속한 손님이 오면 집사에게 전달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침입이나 공격에 대한 대비? 당연히 그게 주목적이기는 한데, 일을 하면서 저택에 대한 공격이나 침입 시도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쉬운 일에 비해 급여는 충분할 정도로 많았고, 도시에서는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기에 충분한 위치였다.
세련된 디자인이 돋보이는 근무복을 입으면 상인과 깡패들은 물론이고 치안대도 한수 접어줄 판이니, 평민들 사이에서는 나름 실세라고 할만 했다.
그래서 멀찌감치 넋 놓고 저택을 바라보는 두 명의 부랑자들을 보면서도 딱히 불쾌하지 않았다.
시골에서 올라온 촌놈들이 자주 하는 행동이었으니까.
그들 눈에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저택이 마법의 성으로 보이고, 그 앞을 지키는 멋진 자신과 동료는 기사님쯤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왠지 모르게 콧대가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우월감을 충족시키고 있는데, 부랑자들이 저택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먼저 눈치 챈 것은 함께 근무를 서던 퍼펠이었다.
“뭐야? 저놈들,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뭐?”
“저기 저 부랑자놈들 말이야.”
드물기는 하지만 저런 멍청이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촌의 무지렁이들이 저택을 자세히 보겠다고 다가오기도 했고, 가드인 자신과 친구에게 누구의 집이냐는 같잖은 질문을 하기 위해 접근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소리를 몇 번 지르면 다들 혼비백산 하며 도망가게 마련이다.
“정지! 웬놈들이냐!”
“더 다가오면 공격하겠다!”
거기에서 첫 번째 이상함을 느꼈다.
두 사람 중 더 작은 한 사람이 잠시 멈칫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경고를 무시하고 다가왔던 것이다.
당황하는 사이에 덩치 큰 부랑자, 아니 부랑자 차림의 남자는 3m까지 다가왔고, 제임스와 퍼펠은 허리춤의 아밍 소드를 뽑아들었다.
“이놈이! 멈ㅊ...!”
제임스는 단순하게 위협만 할 셈이었다.
그래서 가볍게 칼을 휘둘렀을 뿐인데, 갑자기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덕분에 잠시 후 정신이 들었을 때, 혼이 나간 표정의 퍼펠이 자신의 아밍 소드를 돌려줄 때까지도 자신이 칼을 빼앗기고 기절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 * * * *
다짜고짜 제임스를 쓰러뜨리는 남자를 보며 기겁한 퍼펠은 온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남자가 제임스를 공격했다는 것도 그의 손에 제임스의 칼이 들려있기 때문이지, 공격 자체를 보지도 못했다.
제임스는 죽은 걸까? 자신도 죽는 걸까?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은 정말 몰랐다.
“네놈들이 함부로 입에 올릴 분이 아니시다. 집사장을 불러.”
다행히 그 남자는 퍼펠마저 죽일 생각은 없었는지 행동을 멈추고 조용히 말을 전했다.
하지만 공포로 굳어버린 퍼펠의 머리는 언어를 분석하는 법도 잊어버린 것인지 영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 예? 무슨...”
그리고 머리가 일하지 않은 댓가는 끔찍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제임스의 칼이 자신의 목 앞까지 들어온 것이다.
솔직히 순간적으로 목이 잘리는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았을 정도였다.
“집사장을 불러라. 한 번만 더 말하게 한다면 내가 직접 들어갈 것이다.”
“네! 네! 제발 이 칼 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목젖이 살짝 베인 듯 피가 스며 나왔지만 아프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 * * * *
알렌은 처음부터 이렇게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후작 저택을 방문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끝났다는 안도감과 도피 생활의 고단함이 울분으로 바뀌면서, 자신과 왕녀를 깔보는 듯한 경비병들의 태도를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었다.
보통의 귀부인이라면 도저히 버티지 못했을 도피 생활마저 꿋꿋하게 버텨낸 왕녀님이었다.
천한 것들이 함부로 저따위 눈으로 보아도 되는 분이 아니었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잠시 이성의 끈이 끊어졌던 모양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경비 하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한 명은 목에 댄 칼이 목젖에 상처를 내는 것도 모른 채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더 안 좋은 것은 저택의 2, 3층 테라스와 지붕에까지 궁수들이 배치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얼핏 봐도 10명 이상, 이 정도 근거리라면 절대 살아나갈 수 없는 숫자였다.
“누가 감히 스코타 후작가를 공격하는가!”
설상가상으로 저택안에서 십여 명의 경비병이 더 튀어 나왔다.
심지어 그들을 이끄는 자는 기사로 보였다.
경비병들도 얼마나 훈련이 잘 되었는지, 전혀 망설임 없이 촘촘하게 알렌과 엘리안을 포위했다.
포위가 완성되자 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나오며 냉소를 피웠다.
이제 삼십대 초중반 정도, 검사로서 전성기가 시작될 나이였다.
“후작가 사람을 죽이지 않은 것을 불행 중 다행으로 여겨라. 한 명이라도 죽었으면 이렇게 대화할 시간도 없었을 테니까. 어디서 온 누구지?”
알렌으로서는 대답하기 난감했다.
욱하는 마음에 너무 생각 없이 일을 키웠다는 것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을지, 할 말을 고르고 있는 와중에 기사로 보이는 남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더니 신음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메, 메릴, 린... 님?”
낯선 남자에게서 나온 그리운 이름에 깜짝 놀라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리자, 로브의 후드를 벗어 넘긴 왕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마구 자른 상태로 멋대로 자라서 엉망진창인 머리카락, 얼룩이 군데군데 묻은 얼굴, 갈라지고 터진 입술, 피로에 푸석푸석해진 피부까지, 알렌의 기억에 각인된 메릴린 전 왕비의 평소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메릴린 전 왕비와 똑같은 모습의 아름다운 처녀가 서 있었다.
“그, 그럴 리가, 그런데 이건...”
기사가 반쯤 정신이 나가서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병사들도 주춤거리며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약간 갈라지고 힘이 없기는 해도 알 수 없는 위엄이 서린 앳된 음성이 장내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제 이름은 메릴린이 아니예요. 저는 엘리안 미르바 프레티아. 스코타 후작께서 제 외할아버님이 되십니다. 안내를 받을 수 있을까요?”
* * * * *
모후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품이 없어서 어떻게 신분을 증명할지도 고민이 되는 판이었는데, 알렌이 먼저 사고를 쳐 버렸다.
갑자기 경비병들을 때려눕히더니 ‘아차’하는 사이에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버렸던 것이다.
좋게 이야기를 해도 못 믿을 판인데 이렇게 사고를 쳤으니 일이 더 꼬이게 생겼다.
아니, 그냥 이렇게 죽는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조금 지쳤다...
......
하지만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지.
여기에서 쉽게 포기할 거였다면 그동안의 도피 생활이 너무 억울하다.
얼마 전 알렌경이 내민 정체 모를 고기를 받았을 때에는 진짜 현기증이 올 정도였으니까.
차라리 진짜로 정체를 몰랐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들쥐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 고생까지 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그냥 정신 나간 여자로 죽는 것은 사양이다.
때마침 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정체를 물어보자 자연스럽게 후드를 벗어 넘겼다.
알렌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듯 묵묵부답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말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배에 힘을 주고 말을 꺼내려는데 후드를 벗을 때부터 날카로운 눈으로 주시하던 기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모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모후를 알던 사람...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기사의 나이 대를 고려하면 모후의 소꿉친구 정도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신분 증명에 대해 고민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스코타 후작가에서 자신의 얼굴은 그 자체로 신분과 혈연의 증명이었다.
처음으로 ‘그렇게 닮았나?’라는 기묘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지금의 꼴을 보라. 어딜 봐서 귀족 영애의 느낌이 남아있는가?
그런데도 처음 봤던 젊은 기사부터 늙은 집사장, 있는지도 몰랐던 외가 쪽 친척들까지, 그녀의 얼굴을 보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외할머니는 그녀를 보자마자 왈칵 눈물을 흘리며 더러운 옷도 개의치 않고 자신을 꼭 껴안으며 잘 왔다는 말을 반복했을 정도였다.
알렌에 대해서도 관대한 처분이 내려졌다.
경비병들의 무례는 인정되었고, 알렌은 내가 여러 사람을 만나며 신분을 증명 받는 동안 지하 감옥에 수감되는 정도로 일이 마무리 되었다.
기사로서 감옥에 수감되는 것은 상당한 치욕이겠지만, 어차피 자신이 벌인 일도 있고 기간도 만 하루가 안되니까 알렌도 선선히 수긍했다.
감옥의 간수들도 돌아가는 사정 정도는 알 테니까 함부로 대하고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신분 증명이 끝나고 나는 오랜만에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목욕을 했다.
새까맣게 변하는 물을 보니 창피하기도 하고 그동안의 고생이 생각나서 울컥하는 기분도 들었지만 겨우 참아 넘겼다.
물을 두 번이나 갈아 치우고 나서야 겨우 목욕을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옷을 맞추고, 머리를 다듬었다.
손톱도, 발톱도, 온 몸의 구석구석에서 도피 생활의 흔적을 지워 나갔다.
이 단장이 끝나면 다시 ‘레이디’의 생활이 시작될 것이다.
감정을 들키지 말고, 튀지도 말고,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아는 척, 세상에서 ‘나’를 지우고 ‘엘리안 미르바 프레티아’의 흔적을 남기는 생활 말이다.
아니, 어쩌면 더 이상 ‘엘리안’이라는 이름으로 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말로는 ‘반갑다’, ‘잘왔다’ 라고 했지만 외할아버지인 스코타 후작의 눈빛은 냉철하기 그지없었다.
이해는 된다.
그는 내 외할아버지이기에 앞서 벨로키나 왕국의 후작이며, 스코타 가문의 가주였다.
고작 처음 보는 외손녀를 위해서 정치적인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겠지.
이 자리에 서기까지 내 의지가 절반, 알렌경의 집념이 절반이었다면, 이제 내 인생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흐르게 되었다.
아쉬울 것도, 서운할 것도 없다.
그저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이제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도피 생활은 안녕이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경험한 수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만났던 사람들. 나와 어울리지 않았던 것들과도...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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