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돈은 귀신도 부린다
- 부에즈 항구, 이클로나 호 선장실 -
뒷맛이 쓰기는 했지만 이미 계약서를 쓰고 대금까지 지불한 것을 취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테일러도 딱히 책임을 묻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내가 당했다는 것을 환기시켜 주신 정도였기에 나는 한 수 배웠다고 생각하고 잊기로 했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닌데다가 일단 엉망진창인 상품을 제값에 판 것만 해도 반쯤 성공한 것이니까, 비전문가 치고는 양호한 결과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찌되었건 보고도 끝났고 테일러도 대충 말이 끝난 것 같아서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선장님.”
“그래, 수고했... 아니, 잠시만.”
몸을 돌리려던 내가 다시 테일러를 보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그 라이터라는 마도구(마법이 부여된 도구) 대금을 안준 것 같군. 함께 금고로 가지.”
“아, 네! 앞장서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깜빡 잊고 있었군.
얼마 전에 가스를 다 써버린 라이터를 테일러가 사간 적이 있었다.
가스를 다 써버린 것이 자신이기도 했고, 라이터를 최신식 마도구로 착각해서 복제를 염두에 두고 20만 로스라는 고가에 사기로 했던 것이다.
라이터는 마도구가 아니니까 아마 분석이나 복제에 실패하겠지만, 그걸 담당할 사람들은 제국의 마공학자(마도구 제작 기술을 가진 전문가)들일테니 테일러가 문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 지불할 금액이 워낙 거액이라서 테일러가 항구에 입항하면 준다고 약속을 했었는데, 그 약속을 지키려는 것 같다.
문명 수준에 비하면 확실히 오버 테크놀로지에 해당하는 은행 시스템이지만, 전생의 진짜 은행 시스템에 비해서 불편한 점 중에 하나가 바로 계좌 이체가 불가능 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거상들끼리 거래할 때에는 어음 같은 것이 자주 사용된다고 한다.
일단 화폐 자체가 충분히 무거운 금, 은, 동을 주요 재료로 하고 있기 때문에 거액의 돈은 당연히 그만큼 무거워서 운반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금고는 선장실의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금고의 잠금을 해제한 테일러는 내가 들여놓은 상자를 열더니 들고 온 커다란 동전 주머니를 뒤집어서 동전을 섞어버렸다.
“흠, 언제 날 잡아서 분류 좀 해야겠군. 갑판장이 수고 좀 해주게.”
테일러의 기행에 얼이 빠지는 나는 멍청하게 대답했다.
“네? 네, 네.”
내 대답이 이상한 것을 눈치 챈 테일러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러나?”
“아니, 저, 그러니까, 확인을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적은 돈이 아닌데요, 횡령이라거나 그런 것을 의심해볼 수 있는, 으윽! 제가 횡령을 했다는 게 아니고, 그래도 확인 차... 아니! 물론 제가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만 그래도...”
내가 횡설수설하자 작게 웃은 테일러가 대답했다.
“그만하지. 자네가 횡령 같은 작은 일로 내가 준 기회를 걷어 찰 바보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그, 감사, 감사합니다.”
내가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테일러에게 멋쩍게 고개를 숙이자, 테일러가 장난스럽게 말을을 이었다.
“게다가 갑판장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나는 이런 작은 재물에는 관심이 없어.”
물론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무관심하면 뭔가 선장으로서 실격 아니야?
그래도 이클로나는 상선인데 돈에 별로 관심이 없는 선장은 조금 안어울리는 것 같다.
“하지만 선장님, 그런 모습을 다른 선원들이 본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장 이 돈이 없으면 이클로나의 수리나 비품 보급은 어떻게 하실겁니까?”
“하핫, 자네 은행을 이용한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네, 이용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배라는 공간이 보안이나 보관에는 영 취약하니까요.”
“지금은 처지가 조금 나을 텐데도 여전히 이용한다던데.”
하긴, 일개 선원이었던 예전에 비하면 개인실을 가진 요즘은 훨씬 좋기는 하다.
하지만 여전히 보안문제는 글쎄?
일단 방에 잠금장치가 있기는 하지만 성인 남자라면 간단한 도구로 충분히 부술 수 있을 정도로 허술했고, 방 안에 보관할 공간도 영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여전히 평소에 몸에서 거의 떼놓지 않는 돈주머니에 어느 정도의 필요한 돈을 가고 있을 뿐 은행을 이용하는 편이었다.
아, 비상용 금화 몇 개를 방안에 숨겨둔 것은 나만 아는 비밀이다.
우르타나 네이선도 모르는 일이다.
비상금은 원래 남자의 로망이니까.
“갑판장실에 도둑질을 하러 들어오는 정신 나간 녀석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금액이 커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 지금처럼 정박했을 때에는 외부의 문제도 있을테니. 말이 다른 데로 많이 샜는데, 나도 은행을 이용하고 있네. 실제로 이번 프로젝트의 중요 자금들은 은행에 보관되어 있지.”
크, 역시 스케일이 다르시군.
내 눈앞에 있는 상자에 담긴 금액만 해도 거의 300만 로스에 달한다.
금화 비중에 작은지라 상자라는 엄청난 양에 비해서 큰돈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보자면 사람을 강제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큰 금액이다.
저 돈이 있다면 당장 중고 중형 상선을 한 척 사서 독립할 수 있으니, 바로 내 인생 목표 달성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테일러는 저 돈을 푼돈 취급할 정도로 큰 금액을 프로젝트 진행 비용으로 받아서 사용하고 있었다.
이거야 원, 지금도 이 배 어디선가는 10로스, 20로스짜리 동화가 걸린 카드게임을 하다가 멱살을 잡는 선원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조금 우울해진다.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이것 받게.”
“네? 아, 감사합니다.”
잠시 멍하니 서있던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테일러가 건네주는 돈을 받았다.
금화로만 8개, 모두 같은 금화 같았다.
영롱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신비한 광택을 가진 금화를 홀린 듯 바라보던 나는 그 가치를 깨닫고는 부지불식간에 소리를 질렀다.
“으억! 피, 필로스 금화 아닙니까?! 선장님 이건 너무 많습니다.”
필로스 금화. 대표적인 고액 화폐로 훼손 방지를 위한 마법 때문에 어두운 곳에서 보면 신비한 광택을 내는 녀석이다.
상황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충 3만 로스 전후의 가치로 인정받는다.
그러니까 원래 받을 돈이 20만 로스인데, 대충 4만 로스, 20% 정도를 더 받은 것이다.
내가 한 달을 꼬박 항해하고 항해 수당을 받으면 대충 6만 로스 근처일테니, 4만 로스면 자투리 돈으로 생각하기에 큰 금액이었다.
“마무리가 조금 어설프기는 했지만 이번 일을 잘 해결한 것에 대한 포상금이라고 생각하게.”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이렇게까지... 감사합니다.”
“나도 자네가 맡은 일이 과중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네. 분명히 오늘의 고생이 보상받을 날이 있을테니 조금만 더 참게나.”
아! 우리 테일러 선장님, 확실히 사람을 부릴 줄 아는 분이시다.
충성심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역시 금고 열쇠는 회계사가 맡는 것이 좋겠지. 앞으로 금고 열쇠는 자네가 관리하게. 으음...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감동의 폭풍에 몸을 맡기고 있던 내게 신뢰를 가득 담아 금고의 열쇠를 넘겨주신 테일러 선장님은 점잖은 걸음으로 선장실로 들어가셨다.
혼자 남은 나는 역시 돈 관리를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계속 거래를 할 때마다 상자를 뒤적이면서 필요한 화폐를 골라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화폐를 종류별로 나누는 일은 온전히 나만의 일이었다.
우르타나 네이선 같이 신뢰할만한 녀석들을 데리고 함께 할 수도 있기는 한데, 그러면 괜히 측근(?)들과 금고에서 나쁜짓(?)을 한다는 루머가 돌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화폐가 단순하게 금화, 은화, 동화로 구분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그 정도로 나누어 두려고 했는데, 막상 그렇게 나누어 놓아도 뭔가 일정 금액을 빠르게 꺼내는 것은 힘들었다.
그나마 동화는 숫자도 많고 종류에 상관없이 크기로 대충 가치를 정하는 편이라, 금화랑 은화만 종류별로 나누어 보았다.
그래서 금화랑 은화를 작은 상자에 종류별로, 혹은 가치가 비슷한 것끼리 담아놓으니, 혼자서 마구잡이로 뒤섞여있는 동화 상자가 자꾸 눈에 밟혔다.
결국 동화도 크기(가치)별로 나누고 나니,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어있었다.
쪼그려 앉아서 하는 장시간의 고된 노동에 항의하듯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내는 허리를 쭈욱 곧게 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선장님, 사람을 참 잘 부리시는 것 같다...
왠지 밖에 나가기도 귀찮을 정도로 녹초가 되서(간부들은 적당히 알아서 외박을 한다) 배에서 자고 일어났는데, 현문 쪽에 작은 소란이 일고 있었다.
“좀 태워달라구요!”
“하, 거참... 너같은 꼬맹이는 배에 못 탄다고 몇 번을 말하냐?”
“애새끼가 말 안 들으면 쥐어 박아버려. 그러면 아주 말을 잘 듣는 다니까? 흐흐흐”
“그럼 그 형이라도 불러줘요! 네?”
“아니, 이 배에 네가 말하는 형이 없다니까 그러네?”
현문 쪽을 보니 현문 당직을 서는 선원들이 한 앳되보이는 청년과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청년이라기보다는 소년쪽에 가깝다.
까맣게 탄 피부, 대륙 출신의 선원들 보다 약간 낮고 짧은 콧대, 넓은 광대까지 약간 이색적인 외모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 원주민과 혼혈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우리 배에 혼혈인 사람이 있었나?
뭐, 혼혈이라고 항상 양쪽 특성을 다 가지는 것은 아니니까 있을 수도 있겠다.
“뭐야, 무슨일이야?”
“아, 갑판장님. 여기 이 꼬마가 자꾸 형을 찾아서요.”
“형!”
나를 보고 반갑게 형을 찾는 소년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선원들을 보며, 나도 혼란에 빠졌다.
어? 나?
내가 그, 네가 찾던 그 형이야?
아니, 난 분명히 부모님 얼굴과 돌아가신 모습까지 기억하는데?
물론 나도 형제가 있기는 했지만, 다 죽었다는 말이지.
내가 형제들 시체를 다 봤는데 이게 무슨...
그것보다, 난 혼혈이 아닌데?
우리 부모님도 절대로 혼혈은 아니었다고!
태어나서 동네도 못 벗어나본 어머니와 연안 상선을 타다가 어머니를 만난 이후로 고깃배나 타셨던 아버지 사이에서 저런 동생이 나올 리가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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