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이세계 소년의 삶
소년을 놀리고 있던 선원이 머쓱하게 코를 문지르며 물었다.
“아, 갑판장님 동생분입니까?”
“향료 제도 출신이셨나? 전혀 몰랐는데.”
이 멍청이들아, 여기가 내 고향이면 며칠 전에 그 난리를 피웠겠어?
내가 고향을 떠난지 한 20년쯤 지났다면 아는 사람이 없을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이제 고작 5년 남짓이다.
전생만큼 인구 유동이 심하지 않은 세상이니 고작 5년 만에 고향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선원들의 멍청한 소리 때문에 정신을 차린 나는 소년을 다시 한 번 유심히 뜯어보며 물어봤다.
“이봐, 도대체 누구랑 착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난 네 형이 아니야. 애초에 이 섬을 처음 방문한다고.”
그러자 반가워하던 얼굴이 바로 실망으로 물들었다.
뭐야 이 녀석? 포기가 너무 빠른데?
“그럼 워트 형이 아니예요?”
“아니, 나는 그런 이상한 이름이 아니야. 내 이름은 리안이고, 미리 말하지만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기억을 잃은 적이 없어.”
“아.....”
내가 워픈지 와튼지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에 단 한 마디의 반론도 없이 등을 돌리는 소년을 보자, 오히려 사연이 궁금해졌다.
보통 잃어버린 형을 찾다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이런저런 과거의 추억을 꺼내면서 기억이 안 나느냐고 물어보는 것이 정석적인 반응 아닌가?
“거기, 소년! 그냥 그렇게 가는 거야?”
내가 터덜터덜 현문을 내려가는 소년을 불러 세우자, 그 소년이 느릿느릿 다시 돌아서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본 것 같아요.”
“잘못 봤다는 것 정도는 알아. 하지만 왜 나를 형으로 착각했는지 궁금하네?”
옆에 있던 선원들이 그런 것이 왜 궁금하냐는 듯 신기한 동물을 구경하듯 보았지만 가볍게 무시해주고 소년을 주시했다.
잠시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소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워트 형이랑 나이도 비슷하고...”
“흐흠, 그 워트라는 사람, 나처럼 머리카락이 까맣나?”
솔직하게 내 머리카락은 검은색이라기는 조금 그렇고 대충 어두운 고동색쯤 된다.
하지만 이 세계는 어두운 색 머리가 많지는 않아서 이정도면 대충 검은색으로 취급되고, 자주 보기 힘들다.
우리 배에서도 내가 유일할 정도니까 말이지.
“어,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면 그런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그랬던 것 같아요’는 뭐람?
“저, 혹시 워트 형을 아시나요?”
“몰라.”
나는 망설임 없이 딱 끊어서 대답해줬다.
워트라는 이름이 드문 것은 아니지만 일단 내 또래에 나랑 비슷한 머리색을 가진 워트는 본적이 없다.
괜한 기대를 품게 하는 것보다 이렇게 대답해주는 것이 저 소년에게도 좋겠지.
“거기 소년, 몇 살이야?”
“제 이름은 소년이 아니고 오펜이예요, 열 다섯이구요.”
“그래 오펜. 그 워트라는 형은 언제 떠났는데?”
“제가 여섯 살 때요...”
올해 15세인 소년이 여섯 살 때면 무려 9년 전이다.
대충 보아하니 선원이 된다고 무작정 배를 탄 모양인데, 10년이 다 되도록 소식이 없다면 글쎄, 높은 확률로 죽었다고 봐야한다.
여러 번 말했지만 선원은 정말 위험한 직업이다.
해적을 만나서 죽고, 음식을 잘못 먹어서 죽고, 태풍으로 죽고, 병에 걸려서 죽고, 술에 취해 바다에 빠져 죽고, 뒷골목에서 시비가 붙어서 죽고, 뱃일을 하다가 사고로 죽는다.
그렇게 위험하니까 내가 이클로나를 탈 때도 한참을 고민했던 것이고.
그나저나 이 불쌍한 소년에게 진실을 알려줘야 할까, 헛된 희망을 계속 품고 살도록 놔둬야 할까?
그렇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데 소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아저씨, 저도 배에 탈 수 있나요?”
잠깐, 니 형이 나랑 또래인데 왜 나는 아저씨야?!
“그, 아저씨라는 호칭은 좀 잘못된 것 같지 않아?”
“어... 그럼 선원님?”
“관두자, 열다섯밖에 안된 꼬맹이는 안태워. 뭐, 돈을 내고 승객으로 타겠다면 선장님께 말씀은 드려보마.”
열다섯이면 수습선원이 되기에 충분한 나이지만 나는 일단 거절했다.
물론 배에 손실 인원이 많아서 선원을 충원해야 하지만, 아직 전생의 감성이 남은 나로서는 어린 아이까지 힘든 뱃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나 배를 처음 타면 보통 수습선원으로 시작하는데, 이게 사람 할 짓이 못된다.
내가 배를 처음 탄 나이가 열여덟, 신체적으로 거의 성장이 끝난 상황인데도 너무 힘들고 서러워서 자살까지 생각했을 정도였으니, 말해 뭐해?
보통 수습선원으로 일하는 기간은 1년 정도, 그 동안은 배에서 제대로 된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일당도 없다.
일은 힘든데다가 일을 가르칠 선배들이 교육을 잘 받은 지성인이 아니다보니 제대로 가르치기는커녕 때리지만 않아도 감지덕지였고, 정말 좋은 선장을 만나도 특별한 부수입이 있거나 항구에 기항할 때, 용돈처럼 몇 푼 받는 정도가 수입의 전부였다.
전생이었으면 아동 노동력 착취나 학대 따위로 신고당하고 남을 정도지.
내 대답에 소년은 더욱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돌아섰다.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하고 있는 모습에 약간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나는 조용히 마음을 다잡았다.
하고 있는 차림새를 보아하니 있는 집 자식은 아닌 것 같고, 삶이 꽤나 고달플 것으로 보이지만 사람이 땅을 밟고 사는게 맞는거다.
그걸 알고 있는 내가 왜 배를 타냐고?
나야 뭐, 어느 날 아버지가 탄 배가 돌아오지 못하고, 그렇게 수입이 끊기자 이미 앓고 계시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위에 형들은 역병으로 애 저녁에 다 죽었고, 별 수 있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묻어야겠는데, 어머니를 모실 장의차는 개뿔, 지게도 없더라.
그래서 한밤중에 동생이랑 썩기 시작하는 어머니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서 암매장을 했거든.
삽도 하나밖에 없어서 고작 60~70cm나 팠으려나?
도저히 더 팔 엄두가 안나서 어머니를 매장하고 잠깐 누웠는데, 눈물이 나기는커녕 힘들고 기가 막혀서 욕밖에 안나오더라구.
더 기가 막히는건 겨우 집에 오니까 여동생이 배가 고프대서 부엌에 갔는데 먹을게 딱딱한 빵 몇 쪽이 전분거야.
그래서 구걸도 하고, 도둑질도 하고, 허드렛일도 하고 그렇게 겨우 살았던게 딱 열흘이다.
열흘째 되던 날, 그날도 여기저기서 얻어맞고 곰팡이 핀 빵 몇 개를 들고 돌아왔는데 다 쓰러져가는 집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가쁜 숨소리,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집 안의 상황이 상상되어 눈이 뒤집혀서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그리고 죽어가는, 혹은 죽어있는 여동생을 깔고 엎드린 그 개만도 못한 자식을 봤다.
첫 살인, 사실 그 순간에는 별거 아니었다.
나는 뒤통수가 깨져서 널부러진 쓰레기보다 바닥에 쓰러진 내 여동생이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여동생의 심장은 멎어있었고, 이미 몸이 식어가는 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미 사망한지 수십 분이 지났던 것 같다.
전생의 기억을 총동원해서 심폐소생술도 하고 인공호흡도 하고 별짓을 다했지만 결국 그 아이의 숨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제서야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자각이 들었다.
옷이 다 찢겨져 나체로 목이 졸려 죽은 여동생의 시신이 눈앞에 있다보니 딱히 죄책감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법이라는 것이 있었고, 살인은 충분히 큰 범죄였다.
여동생이 당한 것을 감안해도 최소한 감옥행은 확정이었고, 연고도 없는 소년이 감옥에서 살아 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여동생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도 못하고 도망쳤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신이 보이지 않도록 남은 옷가지들로 대충 덮어주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뭐, 그런거다.
그렇게 도망치다가 생각한 것이 어차피 이 동네에서는 잡힌다는 것이었고, 항구로 가서 막 출항하려는 배를 붙잡고 태워달라고 빌었다.
엉망진창인 옷차림에 피까지 묻은 나를 보고 피식 웃은 그 배의 갑판장은 나를 태워주었고, 그렇게 나는 반 노예같은 수습선원 생활을 시작했다.
뱃일을 좀 익히자마자 그 배에서 도망쳐 다른 배에서 다시 수습선원 생활을 시작했지만, 내 사정을 짐작한 갑판장 덕분에 진짜 거기는 지옥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길어졌군.
소년이 사라진 것을 확인 한 나는 선원들에게 쓸데없는 소문내면 죽여버린다는 협박과 함께 선원들에게 예인준비를 하도록 시켰다.
오늘은 이클로나가 수리를 위해 건선거(물을 다 빼고 선박의 전체를 수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도크)에 들어가는 날이다.
자력항해가 아주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지만 항구 내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하니까 예인선들이 예인을 해서 도크로 들어가는게 편했다.
* * * * *
이클로나를 건선거에 집어넣고, 조선소측에서 제공하는 창고에 중요한 집기들을 옮겨 넣고, 금고에 들어있는 돈을 모두 근처 은행에 보관(일정 수수료를 내면 임시보관을 해준다)하고 나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제 당분간 자유구나!”
우르타가 양 손을 하늘로 번쩍 치켜들며 소리쳤다.
배가 정박한 상태라면 당직을 서야하지만 건선거에 들어간 이상 당직을 설 필요가 없었다.
돈이 없는 선원들은 배에서 잠을 잘 수 없으니 울상을 지을지도 모르겠지만, 다들 돈을 넉넉하게 받았으니 당장 오늘부터 울상인 녀석은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 녀석들이 참 고생이 많다.
지금도 다른 선원들은 창고 작업이 끝나기 무섭게 다들 튀어나갔는데, 내가 믿을 수 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잡혀서 무거운 동전 주머니를 옮기지 않았는가?
“가자, 고생들 했어. 오늘 술은 내가 사줄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네이선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진짜? 마음대로 먹어도 되는거야?”
미친놈이? 누구 주머니를 거덜 내려고...
“아니! 넌 절대로 마음대로 먹지마. 나한테 허락받고 마셔!”
실망한 네이선이 볼멘소리를 내뱉고, 그걸 보고 우르타가 놀리고, 그런 우르타를 네이선이 쫓아가고, 기어이 네이선에게 한 대 맞은 우르타가 나를 보고 손짓한다.
새빨간 석양을 배경으로 이국적인 풍경, 천진난만한 친구들, 두둑한 주머니까지.
전생에서 꿈꾸었던 완벽한 휴가가 바로 이런 것 아니겠나?
갑판장으로서 부족한 선원을 충원해야 한다는 부담감만 없으면 딱 금상첨화일텐데.
* * * * *
“그러니까 하필이면 네가 여기서 일한다고?”
“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어쩔 줄 몰라하는 소년을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앞에 있는 소년의 이름은 오펜, 낮에 이클로나에서 나를 형이라고 불렀던 소년이다.
무슨 일인가 하면, 우르타와 네이선을 데리고 항구 쪽이 아닌 도심 쪽 술집을 찾아서 식사를 하며 술을 마시고 있는데, 화장실을 다녀온 네이선이 이상한 말을 했다.
어떤 남자애가 자기보고 형이라고 불렀다며 낄낄거리는데 뭔가 이상하잖아?
혹시나 해서 인상착의를 물어보니까 왠지 낮에 본 소년 같았다.
이정도 되면 상습범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대충 자기랑 나이가 10살쯤 차이나면 일단 형이라고 부르고 보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해서 뭘 얻는다는 말인가?
술집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는 소년을 보고는 이왕 이렇게 된 것, 호기심이나 풀어보자는 생각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내가 오펜을 데리고 와서 자리에 합석시키자 주인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내 주머니에서 나온 은화 한 개에 세상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못 본 척 해주었다.
“자, 소년. 이제 자네가 그토록 찾아 헤메는 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볼까?”
“오... 리안에게도 형이라고 부르고 나도 형이라고 불렀겠다? 리안이랑 비교되다니 자존심 상하는데?!”
네이선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는데 왠지 기분이 팍 나빠졌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나도 그럭저럭 잘생긴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네이선은 뭐, 휴...
얘는 요즘 운동을 해서 그런가, 얼굴도 각이 살아나고 몸도 엄청 좋아져서 전생의 모델 뺨치게 생겼다.
최근에 여러 가지 문제로 좀 못 먹어서 근육도 조금 줄었고 얼굴에 살이 좀 심하게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원판 불변의 법칙은 여기서도 적용되더라.
“자, 저런 개소리는 신경쓰지 말고. 소년, 대답해봐.”
“저는 오펜이예요.”
“그래 오펜 소년. 분명히 내게는 나와 머리색이 비슷하다고 하지 않았어?”
그리고 보라는 듯이 네이선을 턱으로 가리켰다.
네이선은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보라는 듯이 양손으로 잡아들고 웃기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입술을 깨물던 오펜이 결심한 듯이 물었다.
“혹시, 사실대로 말하면 믿어주실 건가요?”
“내가 왜? 풉, 그래도 일단 떠들어 봐. 그거 들으려고 저기 주인아저씨한테 은화까지 던져준거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우리는 기구한 소년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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