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61화 (61/420)

<61화> 수습선원

소년의 특별한 기억은 다섯 살에서 시작했다.

원래 길거리의 아이들은 자기 나이를 모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소년이 나이를 아는 이유는 그 기억 때문이었다.

얼굴도, 머리색도 희뿌연 남자가 약간의 검댕이 묻기는 했지만 처음 만져보는 희고 부드러운 빵을 건네주며 말한다.

“생일 축하해, 오펜. 이제 다섯 살이네?”

친 형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오펜의 나이를, 이름을, 심지어 생일이라는 것까지 어떻게 아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오펜도 그 생일이 언제였는지 기억을 못하지만 분명히 생일을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오펜의 이야기대로 라면, 오펜에게 워트는 그냥 형이 아니었다.

항상 그를 보호해주는 든든한 아빠였고, 먹을 것을 구해주는 엄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펜이 기억하는 것은 워트가 자신보다 9살이 많다는 것 뿐이었다.

길거리 아이들의 삶이 원래 불행하기는 하지만, 오펜이 진짜 불행해진 것은 다음해였다.

다시 생일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던 오펜에게 워트가 청천벽력같은 말을 꺼냈다.

“배를 탈거야, 오펜. 힘들겠지만 조금만 기다려줘. 꼭 멋진 배를 타고 다시 돌아올게.”

가지 말라고, 같이 가자고 떼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웬일인지 워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고, 결국 다음날 아침, 울다 지친 오펜을 두고 떠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배를 탄 것을 본건 아니구나?”

“아! 네... 하지만 배를 탄다고 했어요...”

“그리고 얼굴도 기억을 못하고?”

“네...”

“머리카락 색도 거짓말이고?”

“...네...”

“그래서 나이대가 비슷한 사람이 배를 타고 오면 일단 형이라고 부르는 거라고?”

“......네...”

이야기가 끝나고 내 질문이 반복되자 오펜의 대답에 힘이 빠지며 목이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일단 이야기의 신뢰성을 떠나서 굳이 비슷한 나이대의 모든 사람에게 일단 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

찾아올 형이면 알아서 잘 찾아올 것이고, 안 찾아올 사람이면 우연히 보더라도 모른 척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네이선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그런 형이라면 네가 찾지 않아도 찾아오지 않겠어? 솔직히 10년이면 돌아온다는 약속 지키기 어려울 것 같은데?”

어우야, 네이선 이 녀석 왜 이렇게 직설적이야?

“돌아올 생각이 없거나, 돌아올 수 없거나.”

거기에 우르타가 던지듯이 쐐기를 박는다.

이것들이 진짜?!

“애한테 말을 왜 그따위로 해? 애 울겠다, 그만해!”

일단 큰 소리를 쳐서 녀석들의 입을 다물게 만든 뒤 오펜을 보았다.

진짜 우는건 아니겠지?

“형은, 워트형은 꼭 돌아온다고 했어요! 분명히 못 올 사정이 생긴 거예요!”

다행히 울지는 않는데, 네이선과 우르타를 노려보는 눈이 꽤 매섭다.

그래봐야 아직 성장기도 안 끝난 15살 꼬맹이이긴 하지만 말이지.

나나 우르타나 네이선도 딱히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클로나의 선원 전체로 놓고 보면 꽤 젊은 축에 속한다.

20대 혹시 10대의 선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배의 특수성(전직(?) 군인이 많은) 때문에 젊은 사람이 좀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도 선원으로 사회(?)에서 굴러먹은 짬밥이 있는데, 아직 십대 중반의 꼬맹이가 노려본다고 신경 쓸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하여간 길고,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이 시대의 어린이들은 대부분이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고아는 더 힘들고 어렵다.

오히려 스스로의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까지 사지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오펜은 행운아라고 봐야 할 정도니까.

“그래 오펜. 이야기 잘 들었어. 우리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고 네 인생에 뭔가 영향을 줄 사람들이 아니야. 그러니까 저 멍청이들이 한 말은 잊어버리고 앞으로도 잘 살기바래.”

정중한 축객령(?)을 내리며 베덴 은화 한 개를 꺼내주었다.

내 주머니에 계속 있었다면 쓸데없이 네이선의 술값으로 다 나갈 돈이지만, 허드렛일로 연명하는 오펜에게는 꽤나 도움이 되는 돈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은화를 받아들고도 여전히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설마 돈이 적다고 이러는 것은 아닐 테고...

“오펜, 할 말이 남았어?”

내가 나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묻자, 주저하던 오펜이 입을 열었다.

“저, 선원님은 배에서 높은 분이시죠? 저도 배에 태워주실 수 없나요? 저 일 잘한다고 칭찬도 많이 들어요, 조금밖에 안먹구요, 튼튼해요.”

“응, 우리 배는 어린애는 안태워.”

난 여전히 딱 잘라서 거절했다.

이런 것은 일말의 여지도 주면 안 된다.

보통 희망고문이라고 하잖아? 그거 진짜 나쁜 거다.

하지만 늘 사건 사고를 만드는 건 우르타다.

“응? 리안, 어차피 우리 선원모집 해야 하는거 아냐? 얘도 수습선원으로 쓰면 되겠네.”

당연한 말이지만 우르타와 네이선도 수습선원 기간을 거쳤다.

그때는 뭐, 나도 고작 2, 3년차였고 고드실카의 갑판장님이랑 아주 친밀한 상황은 아니라서 엄청 챙겨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름 뱃사람으로 경력을 인정받기 시작할 무렵이라 저 녀석들은 수습선원시절을 정말 편하게 보냈다.

내가 바로 위의 교육 담당이었으니 얼마나 편했겠어?

게다가 두 사람은 배를 탈 무렵에 이미 스무살 근처였다. 별거 아닌 나이차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덜 자란 15세와 다 자란 20세는 할 수 있는 일 자체가 다르다.

하지만 누구나 처음이라는 것은 단 한번 뿐이고, 유일한 수습선원 경험이 매우 꽃밭이었던 우르타인만큼 저런 발상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겠지.

“야, 애들한테 무슨 수습선원이야? 힘들어서 못해.”

그러자 네이선이 술을 마시다 말고 딴죽을 걸었다.

“무슨 소리야? 다른 배들은 더 어린 애들도 수습으로 쓰던데? 그 뭐야, 어디더라? 하여간! 어떤 배는 열두살, 열세살도 쓰던데 뭐.”

어떤 X같은 배냐? 열두살은 너무 많이 간 것 아니야? 아직 골격도 제대로 안 잡혔을 아이한테 뭘 시키는 거야?

이게 왜 양아치 짓이냐면, 만약 열두살에 수습선원으로 시작해서 계속 뱃일을 한다면 20대 초반에 10년차 숙련 선원, 30대 초반에 20년차 베테랑 선원이 된다.

막말로 30대 초중반이면 보통 배의 갑판장이랑 경력이 비슷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20대 초중반에 10년차는커녕 나처럼 5~6년차에 이르는 숙련 선원도 굉장히 드물다.

그러니까 갑판장을 할 정도면 나이가 보통 40대, 50대인거다.

무슨말이냐고?

십대 초중반에 뱃일을 시작한 애들은 스무살을 채우지도 못하고 거의 다 죽는다는 뜻이다.

나처럼 십대 후반에 시작한 놈들도 태반이 죽어나가는데 십대 초중반, 말 그대로 어린이들이 어떻게 버티겠어?

여기가 전생처럼 뭔가 아동 보호나 아동 인권에 민감하고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면 모르겠지만, 애석하게도 이 세상에서 아이는 그저 가격이 싼 소모품에 불과하다.

“그래 맞아, 그리고 어차피 갑판장이 리안이잖아?”

열두살이라는 말에 갑자기 열이 뻗쳐서 가만히 있었더니 눈치 없이 우르타가 또 변죽을 울려댔다.

그래, 내가 임시라도 일단 갑판장이니까 정도가 심한 노동이나 폭행에서는 구해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 뿐이다. 어차피 나도 간부고, 수습선원들이 하루 종일 부대껴야 하는 사람들은 고참 선원들이다.

그것이 악습이라도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것을 내가 타당한 이유 없이 직권으로 막는다면, 선원들의 불만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애초에 내가 인권이 어떻고, 미래의 희망이 어쩌고, 인류의 발전이 어쩌니 말해도, 그 말을 이해할 선원은 한 명도 없을 거다.

우르타와 네이선이 자신의 말을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오펜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사실 우르타와 네이선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어차피 남의 일이라고 막 말하는 것이고 내가 오히려 더 저 녀석을 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하려나 모르겠다.

그래, 모르는 것 같다.

상황이 이쯤 되면 더 이상 거절하는 것도 이상했다.

지금 주점의 손님들 중에는 선원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지만, 원래 이런 항구의 소문이 무섭도록 빠른 법이다.

그런데 이 소문이라는 것이 돌면 돌수록 이상하게 변하게 마련이라, 재수 없으면 선원 모집에 난항을 겪을 수도 있었다.

이만큼 했으면 나도 할만큼 했다.

“그래, 우리 배는 알지? 수리하고 다시 짐 채우려면 적어도 8일은 걸릴거야. 8일 후에 우리 배로 와. 알았지?”

“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열심히 할께요! 감사합니다!”

몇 번이고 뒤돌아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는 오펜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뭔가 찔리는 것이 있었는지 네이선이 괜히 호기를 부렸다.

“뭐!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야 이 자식아! 내가 수습 때 잘해주니까 세상이 쉬워 보이지?! 너 이 새끼, 너는 그렇게 막 던지고 해병대 놈들이랑 구석에 쳐 박히면 그만이지만 저 꼬맹이는 어쩔건데? 엉?!”

“아니, 그거야 뭐... 리안이 갑판장이니까...”

“그래! 내가 ‘임시’ 갑판장이지! 그래서 선원들 터치하기 더 힘든 거 알아, 몰라?!”

단 두 번의 공방으로 네이선이 완전히 침몰하자 우르타가 용기 내어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리안, 너무 불쌍하잖아... 내가 잘 돌봐 줄...”

“너도 닥쳐! 맨날 견시대 아니면 포갑판에 있는 놈이 누구를 돌봐?! 불쌍? 불싸앙? 불쌍하면 그냥 육지에서 잘 살게 놔두지, 왜 엄한 애를 배로 끌어들여? 솔직히 배가 편하냐, 땅이 편하냐?! 배가 편하다고 하면 넌 앞으로 상륙 금지야!”

“...미안.”

한참을 씩씩거린 나는 점원이 다가와 소리를 좀 낮춰달라는 요청을 할 때까지 두 사람을 쪼아댔다.

어차피 상황은 꼬여버렸고, 이 녀석들이라도 쪼아야 스트레스가 풀리지.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것, 수습선원을 몇 명 더 받아야겠다.

혼자서 온갖 잡일과 텃세를 견디는 것 보다는 같이 욕먹을 동기가 있는 것이 좋을 테니까.

에이, 선장님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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