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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62화 (62/420)

<62화> 미래를 위한 투자

돈도 여유 있겠다, 간만에 당직이고 뭐고 다 벗어던졌으니 좋은 음식과 좋은 술을 마시며 쉬고 싶었지만 우리는 다음 날부터 다시 항구 쪽 골목을 돌며 선술집을 찾아 다녔다.

돈맛을 알아버린 우르타와 네이선이 격하게 반대했지만, 매일 점심은 도심쪽에서 먹기로 하고, 선술집에서 먹는 것은 내가 사주는 조건으로 극적인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

분명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하라는 대로 군말 없이 다 했던 녀석들 같은데 왠지 요즘 반항적이 된 느낌이다.

선원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본토까지 가는 원양 상선이 뜸해서인지 몸이 달아있는 녀석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경력이야 뭐, 몇 가지만 물어봐도 알 수 있는 것이고(솔직히 연차까지는 모르고 경험이 있나 없나 정도) 인성은... 그냥 어차피 다 고만고만해서 아주 쓰레기만 아니면 통과다.

사흘째가 되자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그냥 보기만 해도 풋내가 풀풀 풍기는 소년과 청년들이 항구 쪽 술집을 기웃거렸다.

아, 그 전에 술집에 청년들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고 그런 주정뱅이 초짜들은 애초에 고용할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수습선원으로 쓸 녀석들은 조금 세심하게 골랐다.

일단 다른 선원들과 다르게 내가 스카웃을 하는 입장이 아니라 지원자를 골라내야 하는 입장이었고, 선장님에게 보고할 때 할 말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신체 조건이었다.

사지가 멀쩡한지, 힘은 좋은지, 아픈 곳은 없는지 이런 것은 제일 중요했다.

두 번째로 본 것은 조금 이상할지 몰라도 섬에 미련이 없는지를 따졌다.

원래 사람이 물러설 곳이 있으면 쉽게 포기하는 법이다.

섬에 미련이 남아있고,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거나 반겨줄 사람이 있다면 조금만 힘들어도 ‘포기’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게 되어있다.

세 번째는 지능 수준(?)과 인성의 차례였다.

경력직들이야 대충 시킨 일만 하면 쓰는 거지만, 수습선원들은 일을 가르쳐야 하니 멍청하면 골치가 아팠다.

그리고 이왕이면 말 잘 듣고 은혜(?)를 아는 인성이 올바른 녀석을 키워야 뒤통수를 안 맞을 것 아닌가?

자기가 키운 수습선원이 해적이 되고, 그 해적에게 걸려 마스트에 목이 매달리거나, 상어 밥이 되거나, 목과 몸이 분리되었다는 이야기는 너무 흔해서 맥주 안주거리도 못될 정도로 많다.

그렇게 이클로나가 도크에서 나온 날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모인 인원은 33명, 그 중에 7명이 18~22세의 신참이었다.

바흐카덴을 출발할 때 76명에 이르던 선원 중 죽거나 승선을 포기한 인원이 빠져서 41명밖에 남지 않았었으니 거의 출발할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맞춘 셈이다.

물론 충성도 높고 숙련된 제국군인 출신 선원이 절반 이상 빠진데다 수습선원이 7명이나 되니까 실제 전력은 급감했다고 봐야 했지만, 일단 배가 움직일 정도는 되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오펜이라는 소년이 오지 않은 것인데,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 * * * *

얄밉기는 하지만 벨리얀의 일처리는 완벽했다.

이클로나가 건선거에서 나와 내부 정리가 끝날 때 쯤 구매한 물건들이 속속 도착했고, 선원들은 일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일을 가져오는 능력 좋은(?) 갑판장을 욕하면서 꾸역꾸역 구매한 상품과 식료품 등을 배로 옮겼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부에즈 항구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이제 막 정오를 지나고 있으니, 간만에 단거리 항해 일정이 잡혀서 솜씨를 보여주겠다는 조리장 콘테씨가 열심히 조리중인 점심이 완성되면 그걸 먹고 바로 출항하게 될 터였다.

콘테씨 말로는 자기도 마음대로 물과 불을 쓸 수만 있다면 훌륭한 요리사라는데, 별로 신뢰는 안간다.

선창에 마지막으로 들어간 상품들의 정리를 시키고 갑판으로 나왔는데, 저 멀리서 우리 배 방향으로 뛰어오는 인영이 하나 보였다.

바로 새로 모집한 선원들의 계약서를 들고 테일러에게 보고하려던 나는 잠시 기다려 주기로 했다.

아직 아이니까, 한 번쯤은 봐줘도 될 것 같다.

“여어, 오펜. 안오는줄 알았는데?”

“헥, 헥, 죄, 죄송합, 니다, 가, 갑판, 헥, 헥, 갑판장님.”

얼마나 뛰어왔는지 이클로나의 현문앞에 엎어져서 고개만 겨우 들고 숨을 몰아쉬는 오펜을 보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뭘 또 죄송까지. 그런데 무슨 일이야?”

“저, 호, 혹시 너무 늦었나요?”

“당연히 늦었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이미 늦었다는 내 확답에 오펜의 얼굴이 빠르게 절망으로 물든다.

조금만 더 두면 울 것 같아서 나는 얼른 뒷말을 이었다.

“늦은건 맞는데 아직 현문 철거 전(정박 시 선박의 현측과 부두가 연결된 가교인 현문이 철거되면 선박은 항해상태로 간주되므로 일반적으로 사람이 타고 내릴 수 없다)이니까 한번 봐줄게. 따라와, 계약서 써야지.”

내 말이 끝나자 거의 울기직전이던 오펜의 표정이 활짝 펴지더니 재빨리 대답하고 현문을 넘어 이클로나에 발을 내디뎠다.

오펜을 데리고 갑판장실에 들어간 나는 책상 위에서 수습선원 계약서를 찾아 날짜를 써 넣고 오펜에게 건넸다.

“거기 밑에 네 이름을 쓰거나 지장을 찍으면 돼. 잉크는 거기에 있어.”

그렇게 말하고 잠시 책상을 정리하고 있는데, 서명을 하거나 지장을 찍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오펜의 반응이 없었다.

“왜 그래? 이름을 못 쓰는...!”

놀랍게도 오펜은 계약서를 ‘읽고’ 있었다.

고용계약서라는 것은 생각보다 평소에 쓰지 않는 단어가 많이 들어가서 우르타와 네이선도 최근에서야 겨우 읽을 수 있게 된, 꽤 고난이도(?)의 문서다.

중요한 것은 근무 기간과 임금이니까 숫자만 알아도 대충 이해하는것은 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선원들이 계약서를 읽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보기 드문 광경이기는 했다.

그리고 분명히 저 녀석 길거리 고아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나?

보통의 평민들도 대부분 글을 모르는 판에 고아인 녀석이 글을 읽는다니, 내가 눈으로 본게 아니면 나도 못 믿었을 것이다.

“허, 너 글을 읽을 줄 알아?”

내가 놀란 목소리로 묻자 그제야 계약서에서 시선을 뗀 오펜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네, 가게에서 잡일을 할 때 글을 알면 돈도 더 받고 일도 편하거든요. 그래서 조금 익혔어요. 그런데 이 계약서는 잘 못 읽겠네요.”

“그래? 그럼 이 책, 제목 읽을 수 있어?”

내가 미심쩍은 마음에 옆에 굴러다니던 책의 겉면을 보여주며 물어보자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 제목을 보던 오펜이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 항해, 소? 술? 음, 의 기초. 서해 항, 도? 의... 어, 이건 모르겠어요. 그 다음은, 에 대한, 일반적 대? 태? 성... 죄송해요, 잘 모르겠어요, 글을 제대로 배운 건 아니라서요.”

나는 잠시 대답을 미룬 채 책의 제목을 노려보았다.

‘항해술의 기초, 서해 항로의 조류에 대한 일반적 특성’

놀랍게도 오펜은 책 제목의 70%정도를 읽었다.

이정도면 의심의 여지없이 글을 읽을 줄 안다고 봐야한다.

일 년 가까이 붙잡고 가르친 우르타와 네이선만큼은 아니지만 군인 출신이 아닌 선원들 중에는 아주 독보적인 수준이다.

아, 군인이라고 다 글을 아는 것은 아니고 이클로나에 탄 인원들이 워낙 가려 뽑은(?) 인재들이라서 그런지 글을 조금씩이라도 아는 사람이 꽤 있었다.

‘도대체 이 녀석은 정체가 뭐야?’

그 워프인지 하는 형이 아직도 돌봐주고 있다면 모르겠다.

친형제라도 자기 삶에 도움이 안되면 내다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길거리 생활에서 그렇게 헌신적으로 동생을 위해서 살았다고 하니, 지금까지 살았으면 오펜의 더 나은 삶을 위해서 글을 배울 기회를 어떻게든 만들어 줬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혼자 살면서 글을 배웠다? 열 살도 못된 어린아이가 길거리에서 살아남을 확률도 낮지만, 거기에 글을 배웠다는 것까지 포함하면 전생의 로또 맞을 확률은 저리가라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나도 글을 배울 방법이 없어서 의도적으로 친해진 교회 수사님께 겨우 배웠으니 말이다.

“이봐, 오펜. 보통 길거리 아이들이 글을 배우는 경우는 없지 않아? 어디서 어떻게 배운거야?”

“시장에서 많이 배웠어요. 보통 물건 옮길 때 발주서랑 같이 옮기거든요. 틀리거나 수량이 안맞는다고 돈을 안주는 사람이랑 때리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래서 어깨너머로 조금씩... 글을 아는게 문제가 되나요?”

“아니, 아니다. 서명이나 해. 이름도 쓸 줄 알지?”

“......”

이 세계의 글은 어렵다.

진짜 문자가 이렇게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환생이라는 것을 하고 나니까 세종대왕 환생자설, 회귀자설을 더 믿게 될 정도로 글이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륙의 7개국이 같은 언어, 같은 문자를 쓰는 바람에 외국어 공부가 필요 없다는 것인데, 진짜 7개국 문자를 배우는 수준의 노오오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런 글을 어깨너머로 배웠다고 하니 도통 믿을 수가 있어야지.

“허, 그게 막 어깨너머로 배워지는 것이었나?”

“그런데 갑판장님, 여기 급여가 비어있는데요...?”

“응, 수습선원은 무급이야.”

“네? 그럼 전 어떻게... 저 돈이 하나도 없는데요?”

“밥도 주고, 재워주고, 네가 돈이 왜 필요해? 빨리 일 배워서 정식 선원이 될 생각이나 해.”

어라? 나 왠지 전생의 악덕 사장, 꼰대 똥별, 뭐 그런 인간 말종에 빙의된 느낌인데?

확실히 문자를 알면 획득하는 정보의 양이 늘고, 처리하는 정보가 늘어나면 두뇌 회전이 빨라지고, 그러면 생각이 많아지고, 똑똑해지고, 불합리한 것이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무급 노동이라는, 이런 불합리한 계약 조건에 정식으로 항의한 것은 오펜이 처음이다.

그리고 똑똑한 녀석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지.

나는 펜을 들어 비어있는 급여 항목에 100이라는 숫자를 써 넣고는 불만과 당황으로 얼룩진 오펜의 앞에 내밀었다.

“말 안 해도 돼, 네 말이 맞으니까. 그래, 불합리하지. 그런데 다 이렇게 하니까 너만 특별대우 할 수는 없어. 자,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야.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고.”

100로스. 정말 작은 금액이다.

전생 기준으로 따지면 대충 7~8달러 수준일까?

이게 일당, 정확하게 말하면 항해 수당이니까 배에서 숙식을 제공하지 않으면 한 사람이 살 수가 없는 금액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습선원 = 숙식만 제공’이라는 공식이 정론인 세상에 100로스만 해도 엄청난 파격이다.

그나마 내가 선장인 테일러랑 친분이 좀 있고, 설득의 여지가 있기에 이렇게 지르는 것이지, 보통은 돈을 줘가면서 수습 선원을 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저, 감사합니다, 갑판장님.”

오펜이 자신의 서명이 들어간 계약서를 내민다.

이것도 싫다고 했으면 내 시간을 낭비하게 한 죄를 물어 두들겨 패서 내쫓을 생각이었는데 역시 똑똑한 녀석이다.

그나저나 왜 늦었는지 이유를 들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멀리서 조리장의 자신감이 느껴지는 타종소리가 들리고 있거든.

선장, 부선장 정도면 자기 개인실에서 따로 식사를 한다.

더 큰 배에서는 뭐 갑판장이나 항해사도 독상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이클로나에서 독상을 받는 것은 현재로서는 테일러뿐이다.

그러니까 테일러가 식사를 받기 전에 빨리 보고를 해야겠다.

“그래, 지켜보도록 하지, 오펜. 나가서 밥 먹어. 혹시 지금 와서 뭘 가져와야 한다거나 하는건 아니지? 짐이 너무 없어 보이기는 하는데...”

“네, 필요한 것은 다 가지고 왔어요.”

“좋아, 나가봐.”

“갑판장님은 안가시나요?”

“어, 난 이거 먼저 보고해야 해. 누가 늦게 와서 말이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작게 ‘죄송합니다’라고 중얼거리던 오펜은, 내가 나가라는 손짓을 하자 조심스럽고 재빠르게 문을 열고 사라졌다.

내가 무슨 아동 인권 운동가나 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신입들을 잘 키워 볼 생각이다.

이 세상에서 잘 키운다고 해봐야 사실 별거 없다.

그저 뱃일에 적응되는 1년 정도의 기간 동안 사지 멀쩡하고 안 죽게만 해주면 되는 거다.

우르타도, 네이선도 다 그렇게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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