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책임에 대한 권리, 권리에 대한 책임
테일러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동안 쌓은 친분도 있고 해서 잘하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왠지 분위기가 별로 안 좋다.
“수습선원이 8명이라... 갑판장, 지금 우리가 수습선원을 쓸 상황인가?”
“그게...”
아니,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시면 제가 또 ‘네’ 라고 대답하기 참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나도 수습선원을 제외하면 선원수가 약간 모자라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도 실제로 항해에 별 영향이 없는 포병대와 해병대에서 이탈자가 5명이나 나왔으니 수습선원을 제외하고 총원 67명이면 심각한 상황은 아닌데...
문제는 이 수습선원들이 가용 인력을 까먹는다는 것이다.
할 줄 아는 일이라고 해봐야 간단한 잡일 정도에 불과한데 누군가 붙어서 일을 알려주거나 관리를 해야 하니, 사람은 늘었지만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줄어드는 기묘한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수습선원을 제외한 일반 선원 모집을 32명이나 했다.
6명이나 소식이 끊길 줄은 몰랐던 것이 패착일 뿐.
“그저 갑판장의 의견을 묻는걸세.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선장님의 우려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어차피 복귀하시면 해군 병력을 양성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솔직히 경력이 있는 선원들은 대부분 제국군이 되라고 하면 배에서 내리는 것을 택할겁니다. 현재 장거리 항해 경험이 있는 선원들이 상당히 손실된 상황이니, 여기서 모집한 인원이라도 최대한 군에 남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그럼 갑판장 생각에 저 수습선원들은 제국의 해군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 생각하나?”
“다는 아니더라도 상당수는...”
여기서 먼저 집고 넘어갈 부분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해군 병사는 직업 선호도에서 거의 최하점을 받는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선상 생활이라는 것이 의식주 모두 그리 행복하지 않고, 사망이나 부상의 위험도 높으며, 군기가 엄청 빡세다.
그런데 그만큼 수입이 높은가라고 물으면 글쎄? 평민들보다야 낫겠지만 한 몫 잡을 정도는 아니고, 뱃사람이라는 것들은 애초에 대부분 돈을 모을 줄 모른다.
업무상 스트레스가 심해서인지 몰라도 돈이 주머니에 남아있는 꼴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상선을 타던 뱃사람 중에 원해서 군인, 그것도 타국의 해군이 되는 경우는 사실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두 번째는 향료 제도의 정치적인 입지다.
향료 제도는 공식적으로 쿠샤 왕국의 속령에 해당한다.
벨로키나 왕국이나 일레드 왕국이 조차해서 군항을 설치한 섬이 두 개 있기는 하지만, 그 외에 실질적인 생산력을 갖춘 모든 섬들은 쿠샤 왕국 소속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진짜 쿠샤 왕국이 실질적인 지배를 하고 있는 것은 또 아니다.
굳이 말하면 정치적인 완충지대라고나 할까?
땅과 경제를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농장주와 상단주들이고, 그들은 향료 제도에서 함대를 운용하는 쿠샤, 벨로키나, 일레드 3국에 보호비를 빙자한 세금을 낸다.
그래서 향료 제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수습선원들에게는 국적이라는 것이 그리 의미가 없으니, 다른 선박에서 일한 경험이 없는 그들은 제국 해군이 된다고 해도 저항감이 낮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녀석을 봐주십시오.”
수습선원이 필요한 이유를 한참 설명한 나는 쐐기를 박기 위해 오펜의 계약서를 찾아 맨 위로 올렸다.
“흐음.... 수습선원이 항해수당이라? 큰 돈은 아니지만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
“선장님도 글을 익힌 선원이 얼마나 드문지 아실 겁니다.”
“계속하게.”
“이 녀석, 혼자서 글을 익혔더군요. 글이라는 것이 선생을 두고 시간과 돈을 들여서 배워도 쉽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제법 쓸만한 인재가 될 것 같습니다.”
약간 흥미롭다는 반응이었던 테일러가 내 설명을 듣고는 진중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확실히, 갑판장 말대로라면 잘 키워봐야겠군. 그렇지 않아도 내 전속 전령이 필요한 참이었는데, 이 아이로 하지.”
테일러가 잘 키우겠다고 했으니 전령이라고는 하지만 나처럼 빡세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선장 전속 전령만 해도 다른 수습선원들에 비하면 일이 엄청 편할테니, 아주 잘 풀렸다고나 할까?
나이도 다른 애들보다 많이 어린데 오히려 왕따는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대충 보고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선장님, 식사입니다.”
“음, 들어오게.”
문이 열리고 식사를 든 선원이 들어오려다가 나를 발견하고 어색하게 멈춰섰다.
“좋아, 이제 갑판장은 나가보지. 그리고 출항 준비되면 오늘부터는 일등 항해사와 당직을 함께 서게. 바다를 읽을 줄 알아야 진짜 항해사가 되는거니까.”
“네, 선장님. 그럼 출항 준비가 끝나는 대로 다시 오겠습니다.”
선장님 식사 배달을 마친 선원과 함께 선장실을 나서면서 질문을 던졌다.
“오늘 점심 어때? 선장님 식사는 제법 그럴 듯 해 보이던데.”
“냄새는 꽤 괜찮아서 저도 기대했습니다만, 이게 참, 뭐랄까, 확실히 쉽비스킷이나 염장육포보다는 낫기는 한데...”
“비교대상이 너무 최악 아니냐? 그건 음식도 아니고 그냥 생명 유지를 위한 칼로리 확보 수단 같은거잖아.”
“예? 생명, 뭐요?”
“...관두자. 내가 직접 먹어봐야지 물어서 뭐하겠냐.”
좀 걷다보니 갑판 여기저기에 옹기종기 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는 선원들이 보였다.
바게트 비슷한 빵에 그릇에 들어있는 따뜻한 스프 종류, 적당한 크기의 햄과 치즈도 한 덩이씩 있고 커다란 잔에 맥주가 담겨 있었다.
메뉴 구성은 괜찮아 보이는데, 저건 딱히 요리사의 실력을 뽐낼 수 있는 뭔가가 없는데? 스프?
조리실에서 식사를 받으며 조리장인 콘테씨에게 슬쩍 물었다.
“도대체 뭘 요리하셨다는 겁니까? 제가 보기에는 여기 이 스프야, 죽이야, 뭐야? 이거 하나 밖에 안보이는데?”
“그 정도면 훌륭한 식사 아니오?”
“아니, 훌륭하다 안하다의 문제가 아니고 조리장님이 뭐 하셨냐구요.”
“당연히 요리를 했소!”
“내 참, 이 빵, 햄, 치즈, 전부 다 저랑 같이 시장에서 샀던거 아닙니까? 내가 보기에는 그냥 산 그대로 잘라서 내주신 것 같은데?”
“그럼 갑판장님은 도대체 뭘 기대하신거요?”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궁색하다.
배에서 만드는 요리를 뭐 얼마나 기대한 거지?
얼핏 봤던 선장님 식단처럼 잘 구워진 스테이크나 조미료와 향신료를 아끼지 않은 볶음 요리,
상큼한 과일 드레싱에 버무려진 샐러드... 는 애초에 선원에게 주어지는 수준이 아니잖아?
“그래도 뭐, 굽거나, 볶거나, 튀기거나, 그런 거 없어요?”
“선장님 식사만 하기도 힘들어, 기름도 부족하고. 그리고 선장님 한 분거면 몰라도 여기 80명이나 되는 인간들 요리를 다 그렇게 하면 장작이 남아나겠소? 짧다고 해도 적어도 3일은 써야 할텐데.”
“선창이 많이 비어서 장작 꽤 실었을텐데요?”
내가 자꾸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콘테씨의 눈썹이 슬슬 올라가기 시작했다.
“갑판장님은 그냥 쉽비스킷을 먹는게 더 나은 모양이구려?”
“어이쿠, 뭐 그렇게 무서운 말씀을!”
“배에서 뜨거운 국물을 먹는 것만 해도 어디야? 오늘 들어온 신입놈들 아주 신났을 거요.”
음, 콘테씨는 열 받으면 말꼬리를 잘라먹는 버릇이 있다.
평소에는 나이도 어린 내게도 곧잘 존댓말로 말씀하시는데, 슬슬 반말이 나오는걸 보면 그만 하는게 좋을 것 같다.
괜히 쉽비스킷 따위를 먹고 싶지는 않으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입 밖으로 내지 말아야지.
‘글쎄요, 이거 솔직히 선원용 선술집에서 먹는 간단한 음식 수준 아닙니까?’
‘육지에서 살던 아이들이 놀랄만한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요...’
* * * * *
타륜(배의 방향을 조종하는 운전대)은 배의 진행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구조물이고, 이 타륜을 조종하는 사람을 조타수라고 한다.
당연히 돛과 닻과 함께 선박에서 아주 중요한 구조물 중 하나다.
그런데 의외로 배 좀 타 본 사람 중에 타륜 안 잡아 본 사람은 별로 없는데, 이유는 실제로 선박을 지휘하는 항해사(선장이나 부선장 포함)들이 직접 타륜을 계속 붙들고 있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일단 물리적으로 타륜을 계속 조종하는 것이 힘든 것도 있고, 당직 항해사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람에 따라 돛도 조종해야 하고, 현재 위치도 자주 확인해야 하고, 날씨도 신경 써야 한다.
하지만 조타수들은 항해사가 시키는 대로 타륜을 돌리기만 할 뿐 임의로 돌리는 경우는 없다보니 일등항해사 알리샤에게 배우는 조타술(타륜을 조종하는 기술)은 선원 조타수로서 배우는 간단한 조작법과 상당히 달랐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계속 현재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지만, 그건 너무 번거로우니까. 타륜을 잡고 조류를 느끼는 감이 필요한 걸세. 지금 타륜을 놓아보게.”
알리샤의 말이 끝나고 내가 타륜을 놓자, 타륜이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보다시피 바람과 조류에 따라 키(타륜으로 방향이 바뀌는 선박 후방의 방향 조종 장치)가 조금씩 움직이면서 타륜이 함께 움직여. 그러니까 그 저항을 느끼고 조류의 방향과 속도를 추측하고 바람까지 고려해서 배의 실제 진행 방향이...”
아, 그냥 항해사가 시키는대로 타륜 돌리던 시절이 좋았던 것 같다...
말 자체는 이해했지만 도대체 뭘 느껴야 하는지 감도 못 잡고 버벅대고 있는데 베이커가 다가와서 말했다.
“갑판장님, 신입들 자리 배치 끝났습니다. 한 번 확인 하시겠습니까?”
“아, 베이커씨. 수고하셨어요. 뭐 확인 안해도 잘 하셨겠죠. 그보다 수습선원들은 어때요?”
내 질문에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하늘의 구름을 구경하던 베이커가 대답했다.
“그 꼬맹이 있잖습니까? 오펜인가? 선장님 전속 전령이라니까 다른 녀석들이 좀 질투하는 모양입니다. 다들 그 근처에 사는 녀석들이라 안면 있는 녀석들도 있고... 동네에서는 한참 어린 동생이었을테니 그럴만하죠.”
뭐, 예상 못한 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나도 지금 임시 갑판장 자리를 공고히 하기까지 쉬운게 아니었던 것처럼, 오펜도 특별한 대우를 받으려면 그 정도 난관은 직접 이겨내야 할거다.
일반 선원들이 마음먹고 괴롭히는 것만 아니라면 내가 개입하기도 조금 그렇고 말이지.
“베이커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똑똑한 녀석입니다. 갑판장이 왜 특별하게 생각하고 선장님 전속 전령을 시켰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하지만 다른 꼬맹이들과 나이 차이가 좀 심해서 문제죠.”
나도 오펜과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을 몇 명 뽑을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오펜이 특별했던 것이지, 다른 십대 중반의 아이들은 말 그대로 애였다.
배가 무슨 고아원이나 보육원도 아니고, 그런 애들을 고용하기는 그래서 하나씩 제외하다보니 결국 성장이 대충 끝난 18세부터만 남게 된거다.
“어차피 오펜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죠. 베이커씨는 최악의 상황이 되지만 않게 조금 신경 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당직자들 빼고 좀 쉬라고...”
“에이, 무슨 말을! 하부갑판 쪽에 타르도 좀 칠하고, 선창 정리도 다시 해야 하고, 쥐덫도 놔야 하잖아요? 야간 초번 당직자들만 재우고 나머지는 소집하세요.”
내 말에 베이커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구겨지면서 대충 고개만 까딱하고는 선교에서 멀어졌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욕이 다 들리기는 했지만 원래 갑판장이란 자리가 욕먹는 자리니까 그냥 그러려니 했다.
“갑판장, 할 일이 좀 많은 것 같군. 이론은 다 설명했으니까 야간 당직시간에 보도록 하지. 일 보게.”
알리샤가 쓴 웃음을 지으며 나를 놔주자,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그러게요, 왜 일은 하면 할수록 많아질까요? 그럼 조타수 한 명 올려 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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