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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64화 (64/420)

<64화> 열길 물속은 알아도...(1)

소집된 선원들을 나누어 일을 시키고 갑판에 나오니, 선교에 볼라트 항해사가 보였다.

원래 우리 배 소속도 아닌데, 어느새 그냥 이클로나의 이등 항해사처럼 일하고 있다.

볼라트가 망원경으로 보고 있는 방향을 보니, 저 멀리 배 한척이 보였다.

“여, 볼라트 항해사님. 당직이십니까?”

“갑판장님! 오늘도 고생하시네요. 오늘부터 조타술을 배우신다죠?”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무슨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하하하, 저도 항해학교에서 실습을 할 때 처음에는 정말 이해가 안되더군요. 조타술은 그냥 여러 번 해보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어휴, 생각만 해도 지치네요. 타륜은 왜이렇게 뻑뻑한건지 원.”

“에이, 이 정도면 잘 만들어진 타륜이죠, 엄살이 심하시네요.”

미안하지만 내 기준은 당신과 다르다는 말이지.

전생에서 그렇게 부드럽게 잘 돌아가는 자동차 핸들이 기준인 나에게 이 시대의 타륜은 굉장히 돌리기 힘든 녀석이다.

“그보다 뭘 보고 계셨던 겁니까? 한참을 보시던 것 같은데.”

내 질문에 다시 한 번 망원경을 들여다 본 볼라트가 내게 망원경을 건네며 말했다.

“한 번 보시죠. 아무래도 해적 같습니다.”

“네?!”

해적이라는 말에 온 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급히 망원경으로 볼라트가 보던 방향을 확인했다.

대충 이클로나에서 10km정도 떨어진 범선이었는데, 상선이라고 보기에는 흘수선이 너무 높았다.

화물을 잔뜩 실었다면 저 정도 높이가 나올 수 없지.

“이런 제기랄! 전투 준비를 해야 할까요?”

선단을 구성하고 있는 상태도 아니고, 새로 모집한 선원도 많아서 전투력이 급감한 상황.

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의외로 평온한 볼라트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아직 경계할 정도는 아니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해적들도 가성비가 좋은 선박을 공격합니다. 솔직히 지금의 이클로나는 해적들 입장에서는 그리 가성비가 좋지 않아요.”

“네?”

“우리가 출항한 항구가 부에즈잖아요. 일반적으로 부에즈까지 갔다면 사실 본토에서 가져온 교역품은 거의 다 처분 한거고, 향료 제도에서 나오는 교역품은 돈이 별로 안되니까요. 옛날 은행이 없던 시절이라면 교역품 판매 대금이라도 있겠지만, 요즘 큰 돈은 다 은행에 넣지 않습니까? 심지어 이클로나는 대포만 10문 이상 무장하고 있으니 리스크는 크고 기대 수익은 얼마 안되는거죠.”

우리는 판매대금이 고스란히 금고에 있지만, 해적들이 그것까지는 모를 테니까 볼라트의 말이 타당하기는 했다.

그래도 여러 척이 동시에 달려들면 우리 배 정도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도 저번처럼, 그 열 척 이상은 아니더라도 해적선이 서너척만 되도 우리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하하, 그 정도 규모로 해적선을 운용하는 대해적들은 이런 잔챙이들이 다니는 곳에서 영업하지 않습니다. 향료 제도의 입구인 실디어 섬 근방이나 푸에리오다 제도, 마다카트 근처에서 활동하죠. 저기 보이는 저 해적선도 아마 혼자서 다니는 연근해용 화물선이나 노리는 잔챙이일 겁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경계는 강화하겠습니다.”

“그건 갑판장님 마음대로 하세요. 변화가 있으면 바로 말씀드리죠.”

해적이 제일 많은 곳은 바흐카덴이나 론 근처 같은 본토 쪽인 줄 알았는데, 아직 가보지 못한 푸에리오다 제도 쪽도 해적이 많은 모양이다.

돌아가는 길에는 올때처럼 재수 없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니, 그쪽에서는 좀 조심해야겠다.

그나저나 우리는 원래 선단에 다시 합류할 수는 있을까?

선단의 다른 배들이 어떻게 된건지 알지도 못하는 판이니... 볼라트 항해사는 자기 원 소속 선박인 힐레아테가 꽤나 걱정될 것 같은데 전혀 티를 안내니 참 대단하기는 하다.

“그보다 항해사님은 괜찮으세요? 힐레아테가 걱정되실 것 같은데...”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볼라트는 쓴웃음을 짓더니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제가 걱정한다고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클로나가 선단과 과하게 떨어져 있어서 이탈한 것일 뿐, 태풍 자체는 엄청 강력한 편이 아니었으니까요. 선장님이 그런 태풍을 한두번 겪으신 것도 아니니, 분명히 잘 탈출해서 원래 계획대로 움직이고 계시겠죠. 제 계산이 맞는다면 다음에 기항하는 웨던 섬에서 선단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원래 선단의 향료 제도 첫 번째 기항지는 실디어 섬의 세르비아 항구, 이후 서쪽으로 섬들을 차례대로 들르다가 다섯 번째로 기항하기로 한 웨던 섬은 오르윔 섬과 실디아 섬의 중간쯤에 위치한 곳이다.

물론 중간에 시세 변화나 상황에 따라 기항하는 항구에 변화를 주기로 했지만, 서로 연락이 안되는 지금으로서는 기존 계획에 따라 움직인다고 가정하는 수 밖에 없고, 우리가 있던 오르윔 섬에서는 웨던 섬이 가장 가까운 곳이라서 다음 기항지로 선택된 것이었다.

볼라트 말대로 원래 계획대로 움직였다면 지금쯤이면 선단이 웨던 섬에 도착할 시기이기도 했다.

돌아가는 길도 왔던 길 못지않게 고난이 예상되기 때문에 선단을 구성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선단이 전멸했거나 선단과 합류하지 못하는 최악의 경우, 웃돈을 주고서라도 다른 선단에 합류하거나, 쿠샤 왕국의 해군의 순시 일정에 맞추는 방향까지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다행히 볼라트의 말대로 해적선으로 추측되는 선박은 잠시 우리를 탐색하는 듯 근처에서 얼쩡거리더니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와 볼라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전투 준비를 한다고 쓸데없는 일을 했던 선원들은 욕을 내뱉었다.

“귀 간지러우니까 그만들 하고 이제 다시 정리하지? 해 지겠다!”

‘에이 씨XX', '이럴거면 처음부터 시키지를 말던가’, ‘XX, 무슨 X개 길들이기도 아니고’ 같은 욕설이 적나라하게 들렸지만 참아보기로 했다.

나도 저러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저 새끼는 눈빛이 좀 거시기 한데?

나는 딱 봐도 도전적인 눈빛을 내뿜는 수습선원 놈과 눈을 마주치고는 피식 웃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분명히 면접(?) 볼 때는 쾌활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던 녀석이었는데, 내가 오지도 않는 해적선 때문에 난리를 치고 선원들이 욕을 해도 가만히 있으니까 만만하게 보인 모양이다.

에휴, 저런 놈이 꼭 사고를 치지... 역시 사람은 잠깐 봐서는 모르는 거다.

* * * * *

아니나 다를까? 알리샤의 야간 당직시간에 야간 조타술과 별자리, 아스트롤라베(천문과 시간  측정을 위한 고난이도의 항해도구)의 실제 사용법에 대해 배우고 거의 기절하다시피 잠이 들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갑판장님, 주무시오? 잠깐 나와보셔야겠는데?”

아오, 이제 막 잠든 판인데! 비몽사몽간에 억지로 정신을 챙겨서 몸을 일으키고 물었다.

“누구? 베이커씨?”

“으흠, 피곤하신거 아는데 좀 나와보셔야겠소.”

내가 하품을 참으며 문을 열자 약간 난처한 표정의 베이커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일인데요?”

“쩝, 내가 갑판장님이 낮에 해준 말도 있고 해서 신경을 쓴다고 썼는데... 면목없수다. 애들끼리 대판 싸운 모양이야.”

“대충 베이커씨 선에서 해결 하지, 애들 싸운 걸로 굳이 저까지...”

“그게, 부상이 좀 심하오. 선의 양반 말로는 왼쪽 눈 시력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다는군.”

베이커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전에 말한 것처럼 선원이라는 직업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폭력적인 직업이다.

그래서 선원들끼리 싸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워낙 육체적으로 단련된 사람들이다보니, 싸움이 벌어지면 일단 어디 한군데 터지는 일도 다반사다.

그렇다고 마냥 놓아두면 선내 기강이 엉망진창이 되기 때문에 이런 싸움을 벌이면 경중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

가벼우면 ‘기피 업무 담당’ 정도지만 상황이 심각해지면 ‘감봉’을 당하거나 ‘채찍질’을 당하기도 한다.

사안이 중대할 경우 마스트에 묶이거나 제국군의 전통(?)이라는 징벌방에 갇히기도 하는데,  사실 사형수로서 마스트에 묶이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친한 선원들이 오며 가며 물도 몰래 주고 묶는 것도 적당히 묶다보니 선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벌은 징벌방이었다.

제국군 출신임이 확실한 몇 선원들이 말하기를 제국군의 전통이니 뭐니 말하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냥 악습이다.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필이면 뒤주만한 방에 사람을 감금하는 것이 정상은 아니잖아?

원칙적으로 배의 모든 결정권은 선장에게 있지만, 실제로 선장이 일개 선원의 처벌을 결정하는 경우는 살인이나 그에 준하는 사건이 발생 경우일 뿐, 대부분은 선원들의 1차 관리자인 갑판장이 처벌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마저도 사소한 다툼은 선임 선원들이 대충 중재하는 정도로 마무리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신체의 영구적 손상이 우려되는 싸움이라면 사안이 꽤 심각하다.

아마 일반 선원들 간의 다툼만 되었더라도 아직 ‘임시’ 갑판장에 불과한 나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사태 수습보다는 선장님께 보고를 먼저 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한 사람의 선원으로 인정도 못 받는 1일차 수습 선원들 간의 일이라면 일단 내가 수습을 먼저 할 여지가 있다.

“이런 씨...! 혹시 다친 놈이 오펜이고 때린 놈이 그 새끼 뭐야, 이름이 호르제? 그놈인건 아니죠?”

“애석하지만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때린 놈 이름은 호르제가 아니고 호르세구요.”

역시 불길한 예감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

어쩐지 그 새끼 눈빛이 맘에 안들더라니...

“아니! 다른 선원들은 뭐 했대요?! 애들이 그렇게 싸우는데 구경만 한겁니까?!”

“저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처음에는 그저 그런 알력싸움 같은 것이었답니다. 갑자기 그 호르세라는 미친놈이 옆에 있던 상자로 오펜의 얼굴을 찍어버리기 전까지요.”

와, 이건 빼도 박도 못하고 선장님한테 혼나게 생겼다.

시비 좀 붙었다고 사람 얼굴을 나무 상자로 찍어버리다니, 그냥 미친놈이잖아 이거?

배에 있는 상자들은 충격에 강해야 해서 대부분 단단하고 무겁다.

말이 좋아 나무 상자지, 각진 돌로 사람 얼굴을 찍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오, 미치겠네... 일단 의무실로 갑시다. 오펜은 거기 있죠?”

“네, 다행히 바로 선의 양반 호출하고 선원들이 뜯어말려서 상황이 악화되는 것은 막았습니다.”

“아니, 나는 의무실로 갈테니까 베이커씨는 지금 선실로 가서 그 개자식 사지를 묶어서 갑판으로 끌고 나오세요. 죽일지 살릴지 지금 고민중이니까.”

베이커를 보내고 급하기 의무실로 달려가니 문을 닫고 나오는 롱베르씨가 보였다.

“닥터 롱베르, 어떻습니까?”

내가 급하게 물어보자 조용하라는 제스쳐를 취한 롱베르씨가 나를 한쪽으로 이끌었다.

“통증이 심할 것 같아서 수면제를 먹이고 치료를 했네. 다행히 육안으로 보이는 심각한 안구 손상은 없어. 안와(두개골의 눈구멍 주변) 근처 손상이 심하고 금이 간 것 같아서 확신할 수는 없네만... 코뼈도 조금 틀어졌는데 심하지 않아서 그건 내가 대충 손을 봤네.”

“실명할 수도 있다구요?”

“아직까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어. 저 정도 손상이면 안쪽에서 출혈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내출혈의 위험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세계의 의학 수준으로는 내출혈을 진단하거나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수면제라니?

예전에 롱베르씨와 이야기를 하면서 이 시대에 마법도 아닌 그저 화학적으로 작용하는 수면제가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문제라면 용량을 틀리게 써서 영구적 장애를 얻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것. 애초에 약이라기보다는 독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희석해서 쓴다고 해도 일단 독이라서 자주 사용하면 후유증이 생길 수도 있다고 한다.

아직 회복도 빠르고 해독할 간이 건강한 어린 나이라서 괜찮기는 하겠지만...

각설하고, 만약 한쪽 눈을 잃는다면 아무리 나라도 오펜의 편을 들어줄 방법이 없다.

숙련된 선원들도 몸이 불편하면 배에 안태우려고 하는데 아무리 장래가 촉망되더라도 고작 수습선원을, 장애가 있음에도 고용하자고 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니까.

인권이니 복지니 하는 개념조차 없는 곳이다 보니 그저 위로금 조로 몇 푼 쥐어주고 배에서 내보낼 것이고, 내가 사재를 털어서 돈을 조금 더 주는게 고작이겠지.

괜히 잘 살던 아이를 망친 것 같아서 죄책감이 가시지 않는다.

그 호르세인지 호모새끼인지 하는 놈에 대한 분노보다는 나에 대한 자책 때문에 부들부들 떨고있자, 롱베르씨가 내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했다.

“갑판장이 분노하는 이유는 알겠네. 하지만 자네는 갑판장 아닌가? 할 일을 해야지.”

“...그렇죠. 제가 할 일을 해야겠네요.”

“저 소년은 내가 잘 돌보겠네. 걱정말고 가보게나.”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닥터 롱베르.”

롱베르씨의 침착한 말에 겨우 정신을 수습한 나는 불타는 분노를 가슴에 갈무리하며 갑판위로 올라갔다.

상갑판에는 횃불 몇 개가 조명을 대신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선원들이 나와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운데에는 사지가 결박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미친놈이 있었다.

“이 개만도 못한 새끼가 감히 대가리를 쳐들고 있어?!”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린 미친놈을 보자 갑자기 분노가 폭발했다.

저 놈이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나랑 고작 두 살 차이인 22살이다.

전생이었어도 어느 나라에서나 성인으로 인정받을 나이고, 더 빨리 성인으로 인정받는 이 세계 기준에서도 충분히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런 녀석이 단지 별것 아닌 질투, 그 얄팍한 감정 때문에 살인미수를 저질렀다.

그런데 저 당당한 표정은 뭐고, 이런 강력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귀찮음? 짜증? 겨우 이 정도를 표출하고 있는 다른 선원들은 뭔가?

살인자, 한 명도 아니고 열 명에 가까운 사람을 죽이고도 하하호호 잘 살아가는 나도 그렇고, 이게 정상적인 세상은 아니잖아?

갑자기 이 세계에서 느꼈던 부조리, 불합리, 죽은 여동생, 손 놓고 봐야만 했던 어머니의 병, 내 손에 죽어가던 사람들의 눈빛까지, 온갖 부정적인 기억과 감정들이 범람하는 강물처럼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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