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열길 물속은 알아도...(2)
표면장력을 유지하던 물 컵의 물에 한 방울의 물이 추가된 것처럼, 임계점을 넘어 흐르기 시작한 미칠듯한 감정의 홍수 때문이었을까?
이성 한 편에는 이러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폭행이 좀 과했던 모양이다.
“야! 잡아, 잡아!”
“으아악, 갑판장! 왜 이러셔!”
“이런 젠장! 오늘 진짜 초상 치르겠군! 닥터 불러!”
“난 갑판장 이 ㅅ... 도 정상이 아닌 줄 진작 알고 있었어.”
“무슨 힘이! 아이고, 갑판장님! 정신 좀 차려요!”
웅성거리던 소음이 빠르게 언어로 재구성되면서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선원들이 억센 손길로 내 몸을 구속하고 있었고, 나는 바닥에 엎어진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 아니,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짓눌려 있는 상태였다.
넘어지면서 안좋은 데를 찍었는지 앞니도 흔들리는 기분이고 입안이랑 코밑이 찝찌르한게, 입술도 터지고 코피도 나는 것 같다.
“개차느니까 이제 나바...”
이런 젠장, 입술이 짓눌려있어서 발음이 샌다.
“아, 점 너으라거!”
다시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자 웅성거림이 조금 가라앉으면서 뒤통수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린 것 같은데?”
“어떻게, 놔? 놔? 놔도 돼?”
“야 이 새끼야, 너도 사람 잡을래? 갑판장님 숨도 못 쉬겠다. 좀 놔봐.”
그러자 머리를 짓누르던 압력이 없어진다.
겨우 머리를 들어 올린 내가 다시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어떤 놈이 내 얼굴 바닥에 찍었어? 앞니 흔들리잖아!”
그러자 뒤에서 베이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판장, 이제 좀 괜찮으쇼? 거, 무슨 전설에 나오는 광전사인 줄 알았네. 놓을 테니 괜히 난동부리지 마쇼, 또 난동 부리면 진짜 어디 하나 부러질지도 모르니까.”
“아, 괜찮으니까 좀 놔 봐요. 간만에 눈깔 돌아갔네. 그 새끼 안죽었죠?”
갑판장씩이나 돼서 감정에 휩쓸린 것이 민망하고 창피해서 간만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렇게 이성을 놓고 사람을 때린 것은 첫 살인 이후로 처음이다.
그래도 내가 차분하게 대답하자 팔다리를 구속하던 힘이 슬슬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오, 뭐 얼마나 세게 잡고 있었던 거야? 온 몸에 멍들겠네.
“다행히 안죽었는데, 재수 없으면 진짜 죽을 뻔했소.”
“그러게.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사람 대가리를 그렇게 차버리면 되겠어요?”
“야, 저 새끼는 맞을 짓이라도 했지, 난 말리다가 한 대 맞았다.”
“그래서 너도 때렸잖아, 이 자식아.”
“이런 의리 없는 놈! 그걸 그새 일러바쳐?”
어쩐지 온 몸이 아프더라니. 내가 먼저 쳤다니까 할 말이 없기는 하다만.
자기들끼리 투닥거리는 고참 선원 둘을 일별하고는 뻐근한 팔목을 주무르며 내 앞에 있는 호르세 자식을 보았다.
...아, 아무래도 뭔가 심하게 꼬이는 느낌인데?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바닥에는 부러진 이가 두 개나 굴러다니고(횃불에 반사되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얼굴은 피투성이에 피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는 호르세.
숨은 쉬고 있는 거겠지?
워낙 무식하고 제멋대로인 선원들을 통제하려다보니 갑판장은 물론이요, 항해사나 선장등이 적법한 절차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일도 많았고, 대부분의 경우 모르는 척 넘어가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저렇게 숨넘어가기 직전인 몰골이라면, 아무래도 좋게 넘어가기는 힘들다.
이러고 멍 때릴 것이 아니라 빨리 롱베르씨한테 데리고 가서 적당히 무마해야겠다.
만약에 이 사실이 테일러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동안 쌓은 신뢰가 상당히 흔들릴거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도, 감정에 휘둘려 선원을 빈사상태까지 폭행하는 갑판장이라니... 나도 되게 별로일 것 같다.
뭐, 영원한 비밀은 없다지만 상황 수습 후 사후보고라면 적당히 내 잘못을 줄여서 보고 할 수 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일단 이 상황을 수습할 적당한 방법을 구상하고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내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서늘한 분노를 품은 한 마디가 귀에 파고들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모여 있던 선원들이 모세에게 커팅당한 홍해처럼 갈라지며 선장 테일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닥터 롱베르가 놀란 눈빛으로 뛰어오며 소리쳤다.
“아니! 사람이 이지경이 되도록 뭐한거야?! 빨리 의무실로 옮겨야 할 것 아냐? 잠깐! 그대로 들지 마! 목에 부목이라도 대고 움직여야지!”
롱베르씨가 호르세에게 달라붙어 응급처치를 하는 동안 테일러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그 차가운 눈빛이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가 완전히 박살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닥터 롱베르, 환자를 부탁하오. 전원 해산한다. 갑판장, 아니 리안 보좌관은 날 따라오도록.”
“네.... 선장님.”
“일등 항해사, 뒷정리를 부탁하지.”
“네, 선장님.”
거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으로 선장실로 들어가니, 자리에 앉은 테일러가 평소와 다르게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보좌관, 여러모로 실망스럽군. 어린 나이에 갑판장이라고 인정을 해주니 쥐꼬리만한 권력에 취하기라도 한건가? 아니면 선원이 잘못을 했다면 정식으로 벌을 주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을 내가 알려줘야 했나?”
“죄송합니다, 선장님.”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런 입에 발린 사과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텐데?”
나도 내가 왜, 무슨 생각으로 상황을 이렇게까지 악화시켰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 제일 미칠 것 같은 사람은 바로 나다.
원래는 호르세라는 놈, 몇 대 쥐어박은 후에 채찍으로 50대쯤 때리고, 한 이틀쯤 마스트에 매달아 놨다가 항구에 입항을 하는 대로 해고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했어도 수습선원을 고용하자고 주장하고 실제 고용한 사람이 나라서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을거다.
그런데 살인미수를 저지른 놈을 구타해서 내가 살인미수에 준하는 범죄를 저질러 버렸으니, 꼬여도 단단히 꼬인 셈이다.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혀 갑판장으로서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군. 항상 냉철하던 자네가 분노에 사로잡혀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면목 없습니다, 선장님.”
“후, 지금 이 시간 부로 임시 갑판장 직은 해임... 아니 임시 회계사도 일단 해임하지. 배의 수장은 나지만, 선원들의 대표는 갑판장이야. 그런데 그런 갑판장이 고작 이런 일로 이성을 잃다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은 아닌가 싶군.”
“......”
진짜 세상이 빙빙 도는 느낌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세상이 전생에 비해 거지같은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갑자기 그 상황에서 이성을 잃다니 진짜 무슨 분노의 정령 그런 게 잠깐 들어갔다 나간 거 아니야?
심지어 재수가 없으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평소에 내 성격을 알던 선원들은 나를 말리는 것이 한 박자 늦었고, 아직 잠이 들지 않았던 쓸데없이 근면한 테일러가 소란을 듣고 방에서 나왔다.
진짜 딱 한 가지만 타이밍이나 상황이 안 맞았어도 이렇게까지는 될 일이 아닌데, 어쩌다보니 최악의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깊은 한 숨을 내쉰 테일러가 축객령을 내렸다.
“리안, 더 할 말이 없다면 나가서 치료받게. 자네에 대한 처벌은 내일 간부회의에서 결정하도록 하지.”
“죄송합니다.”
나는 목에 걸고 있던 금고 열쇠와 무기고 열쇠를 꺼내 테이블에 조용히 올려놓고는, 꾸벅 고개를 숙인 뒤 터덜터덜 선장실을 걸어 나왔다.
선장실 밖에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네이선과 우르타를 위시한 친분 있는 선원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의외로 가장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알리샤 일등 항해사였다.
“갑판장,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일등 항해사님, 갑판장이 아닙니다.”
“으음, 그럼 당분간 보좌관으로 불러...”
“보좌관도 언제까지 유지될지 모르겠네요.”
“허....”
알리샤가 당혹스러운 신음성을 내쉬며 한 발 물러섰고,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타와 네이선이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막고 빠르게 말했다.
“내가 지금 너희에게 뭘 설명할 정신이 아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중에.”
“리안...”
“그, 그래.”
* * * * *
꿈을 꾸었다.
뭔가가 몸을 계속 휘감는 꿈이었는데, 잡아 뜯고, 끊고, 심지어 칼로 쳐내도 그것은 쉴새없이 내 몸을 휘감아왔다.
결국 미칠 듯한 기분이 되어 스스로 왼쪽 팔을 자르고, 양 다리를 잘라냈지만 여전히 그것은 내 몸을 휘감는 것도 모자라 귓속으로, 입속으로, 눈으로 파고들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미칠 것 같은 답답함에 가슴이 옥죄어왔다.
그리고 끝내 나는 거의 굳어버린 오른손을 겨우 움직여서 칼로 내 목을 찌르고 말았다.
“갑판, 아니 리안 보좌관, 일어나게.”
내가 죽었던가?
아니, 기절했던 것인가보다.
보통 사람이 죽는 꿈을 꾸면 죽기 직전에 깨는 것 아닌가?
나를 깨우는 베이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리안! 일어나게! 선장님 호출이야!”
몸을 흔드는 손길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으, 베이커씨. 지금이 몇 시...”
목이 얼마나 갈라진 건지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밤새 굳은 피딱지가 코와 입 주변에서 부스러지는 느낌이 생생하다.
제기랄, 이는 괜찮으려나?
치과도 없는 세상에서 앞니가 망가지면 인생이 피곤해지는데.
“쯧, 도대체가...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군. 어서 일어나게. 선장님이 전원을 소집하셨네.”
무심한 듯 베이커씨가 내미는 컵을 들고 쭉 들이켰다.
순간적으로 혹시나 술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물이었다.
차가운 물이 속에 들어가자 그나마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흐으, 가시죠.”
갑판위로 올라가니 선교 근처에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는 선원들이 보였다.
그리고 메인 마스트에 매달린 두 사람이 보였다.
우르타랑 네이선이다.
머리가 축 쳐진 것을 보니 기절한 것 같은데... 설마 죽었나?
아니, 쟤들은 도대체 왜 저기 매달린거야?
내 시선을 눈치 챈 베이커가 말했다.
“저 멍청한 놈들. 회의 끝나자마자 볼라트 이등 항해사에게 달려가서 쑥덕거리더니, 자네의 처벌을 두고 선장님께 따지다가 항명죄로 몇 대 맞고 매달렸네. 크게 상한 건 아니니까 걱정 마.”
감동적이기는 한데, 베이커씨의 말에 완전 공감한다.
멍청한 녀석들, 그래봐야 결과가 바뀌기는커녕 나에 대한 이미지만 안좋아지는건데.
가볍게 한숨을 내 쉰 나는 빠른 걸음으로 선교를 향했다.
“선장님.”
선교 앞까지 다가간 내가 테일러와 눈을 마주치고 가볍게 목례하자 테일러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
솔직히 너무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어제 밤에는 질책을 하면서도 약간의 온기가 느껴졌는데,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사람 분위기가 바뀔 수도 있나?
“리안. 선원관리 실패의 책임을 물어 임시 갑판장, 임시 회계사, 보좌관의 직책에서 해임한다. 또한! 직권 남용과 폭행 및 살인미수의 죄에 대하여 웨던 항구에 입항시까지 징벌방에 구류하고, 항해 수당을 몰수하겠다.”
테일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좌관까지 해임이야 살짝 예상은 했지만 징벌방이라니... 나 지금 잘못 들은 것 아니지?
쾅쾅쾅!
“모두 조용!”
난간을 치며 이목을 집중시킨 일등 항해사 알리샤가 선장실로 돌아가는 테일러를 대신해서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웨던 항구 입항시까지 전투 경계 태세를 유지한다! 임시 갑판장은 베이커가 맡도록, 이상!”
선원들이 각종 욕설을 내뱉으며 웅성거리자, 알리샤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뭣들하나! 총원 전투 배치!”
움찔한 선원들이 전투 배치를 복창하며 빠르게 흩어지는데, 베이커를 향해 알리샤가 이어서 말했다.
“갑판장은 리안을 징벌방에 가두고 보고하시오.”
“네, 일등 항해사님. 리안, 가지.”
징벌방.
일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 이클로나에 단 한 칸만 존재하는 최악의 시설이다.
빛 한줄기 안 들어오는 가로세로 고작 60cm정도의 정방형 칸으로, 높이도 120cm 정도밖에 안된다.
이런 공간에 사람을 가두는 것만 해도 전생이라면 인권 유린 논란에 휩싸일 상황인데, 내부는 더 심하다.
바닥은 거친 목재가 불규칙하게 튀어나와있어서 앉을 수도 없고, 벽에도 요철처럼 나무토막이 박혀 있어서 몸을 기댈 수도 없다.
높이가 120cm 정도밖에 안되서 당연히 제대로 설수도 없으니, 거짓말 조금 보태서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가 부러울 지경이다.
내가 이클로나를 탄 이후로 이 방에 들어갔던 사람은 고작 세 명, 최장 시간이 12시간이다.
그리고 오늘 네 번째로 들어가는 사람은 내가 되었고, 아마 최고기록을 갈아치울 것 같다.
적어도 30시간은 여기서 버텨야 할 것 같으니까.
에이, 그래도 설마 30시간은 아닐거야.
상식적으로 아직 ‘살인’도 아니고 ‘살인미수’다.
전에 싸움 중에 동료 선원을 사망하게 만든(때려서 넘어졌는데 안 좋은 곳을 모서리에 찍혔다) 선원이 ‘과실치사’로 채찍 50대와 징벌방 12시간 형을 받았다.
나는 사실 ‘과실’로 치부하기에도 좀 그렇고, 높은 직책을 이용(?)해서 반항도 못하고 묶여있는 놈을 상대로 한 범죄이기는 하지만 아직 사람이 안죽었으니까 30시간은 좀 과하다.
......
혹시 밤 사이에 그놈이 죽은 것은 아니겠지?
아니야, 그렇다면 아마 날 부르러 온 베이커씨가 귀뜸이라도 해줬을 거다.
그리고 정말 마음에 안들기는 해도 이 세상은 같은 죄를 지어도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대놓고 형량이 달라지는 곳이다.
명문화된 법이나 제도도 없이 선장이 왕처럼 군림하는 선상이라면 더 심하다.
그러니까 적당히 이 악물고 참다보면 금방 풀려날거다.
한..... 10시간 쯤? 그래도 밤 정도면 풀려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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