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열길 물속은 알아도...(3)
아무래도 순순히 끌려온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들어온지 아직 1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나가고 싶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자, 시간이 많으니까 생각을... 잠깐만, 등이 너무 아파.
......
좋아, 이제 좀 괜찮으니까 다시 생각... 어엌, 허리, 허리! 허리에 쥐가 난거 같아!
된건가? 이 자세가 최선인가? 그렇다면 이제 생... 아악! 종아리! 아니 허벅지! 아닌가?! 어깨인가?!
망할, 이제 어디가 아픈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다 아파. 제일 아픈 곳이 어딘지 알아? 머리, 머리가 제일 아파! 지금 당장 미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
도대체 몇 시간이나 지난 걸까? 한 열 시간쯤 지났나?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고, 세 시간쯤... 한 시간인가? 그래도 한 시간 미만은 아니겠지?
아프고, 피곤하고, 배고프고, 진짜 기절할 것 같은데 기절을 안한다.
이런데 가두면 인간적으로 물이건 밥이건 뭐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니야?
하긴 애초에 이런데 사람을 가두는 것 자체가 인간적이지는 않지.
여기서 나가면 반드시 그 호모새끼(?)를 이 방에 넣어버릴거다.
그 새끼도 나랑 똑같이 살인미수니까 분명히 가능할거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일주일만 처박아 놓는거다.
혀를 깨물건, 스스로 목을 조르건 어떻게 해서든 분명히 자살할걸?
왜냐하면 나도 지금 자살하고 싶거든.
그 놈에게는 채찍 형과 마스트에 매달리는 것, 해고당하는 것 모두 너무 관대한 처분이다.
반드시 시체로 이 배를 떠나게 해주겠어.
그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거지? 미칠 것 같아...
테일러 개새끼!
내가 그동안 해준게 얼만데!
나를 이런데 처박아?!
우르타, 네이선 이 새끼들도 마찬가지야!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와서 날 탈출시켜야 할 것 아니야?!
탈출,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
그냥 허리만 좀 펴게 해줘, 아니 앉게라도 해줘...
아니다, 제발, 제발 잠만 좀 자게 해줘...
기절해도 좋으니까, 누가 내 머리 좀 세게 쳐주면 좋겠다.
그래, 꿈에서처럼 팔, 다리를 잘라보자.
그럼 뭔가 공간을 넓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칼, 칼 없나?
피도 마시고, 고기도 먹고 얼마나 좋아? 일단 뭘 좀 잘라보자.
얼마나 지난거야?
나 아직 살아있기는 한건가?
다행히 이제 아프지 않네.
근데 내 팔이랑 다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
나 진짜 잘라 버렸나?
그럼 지금쯤 과다출혈로 죽어야지.
아! 나 죽은 건가?
왜 이렇게 된걸까?
난 왜 그렇게 화를 냈던 거지?
고작 본지 며칠 되지도 않은 꼬마가 다쳐서?
아니다, 조금 더 원론적인 문제였어.
폭력, 피, 강압, 살인...
이런 거지같은 이세계 같으니라고!
그동안 스트레스가 너무 많이 쌓인 거야.
전생의 기억, 그래, 그래도 인간이 인간다웠던 그 기억.
인간다움이 뭐냐고 물으면 애매하긴 한데...
최소한 폭력이 최상위에 위치하는 것은 잘못된 거잖아.
우리는 짐승이 아니니까, 인간이니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세상.
분노와 욕망에 잠식되기 전에 법을 생각하는 세상.
부족한 사람도 최소한의 인권을 존중받는 세상.
본능이 이성의 통제를 받는 세상.
그래, 난 그걸 아니까.
그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아니까.
그래서 나와 다른 이 세상이 싫었나 보다.
거리낌 없이 본능대로 행동하고, 그걸 봐도 그러려니 하는 이 세상이 싫었던 모양이다.
죽을 때가 되니까 별 깨달음이 다 찾아오네.
주마등이라고 했나?
동생이 보인다.
그런데 얼굴이 잘 안보여.
미안해.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책임져야 했던 너인데.
이제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우르타랑 네이선도 보이는 것 같다.
그래도 이번 생에서 날 가장 많이 웃게 한 녀석들이다.
너희는 절대 사도세자가 되지 말아라.
아버지 말씀 잘 들어야지...
진짜 여기는 지옥이야...
“아직 지옥 아니야, 리안! 정신 차려!”
“와, 진짜 하루만 늦었으면 지옥 갔겠는데?”
꿈뻑
우르타랑 네이선이 보인다.
아, 아까도 봤지.
근데 얘들은 왜 안 없어져?
나 엄마랑 아빠도 봐야하고 형들도 봐야하는데?
그리고 이왕이면 이번 생에서 가장 예뻤던 왕녀님도 한 번 보고 싶은데...
고드실카 호 갑판장님도 보고 싶다.
생각해보니까 난 그 사람 이름도 모르는 거 있지.
다들 갑판장, 갑판장님이라고 부르니까 이름을 알 수가 있나?
그 사람도 이름이 갑판장은 아닐 텐데.
아, 졸리다. 그냥 가야하나 봐.
제발 이번에는 좋은 세상에서 환생하자, 제발...
* * * * *
엄청 잔 것 같은데 아직도 정신이 몽롱하다.
그래도 사람이 극한에 이르면 결국 기절을 하는구나.
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지난거지?
이틀이 이렇게 길어?
진짜 나 30시간이나 감금당한거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건, 체감 상으로는 한 200일쯤 지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몸이...
“어라?! 으아아으어어어...!”
꼭 녹슨 쇠판을 긁는 것 같은 비명소리가 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온다.
그런데 목이 아픈 것보다 몸이 편안하다는 것이 더 크게 느껴진다.
결국 지옥 같은 감금이 지난 것이다.
아직도 내가 미치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
진짜 이정도 고문(?)을 버텨냈으면 게임으로 치면 정신력 999인거야.
어떤 정신 공격에도 버틸 수 있는 강철, 아니 다이아몬드같은 정신력을 가진 거지.
스스로 대견해하며 특급칭찬을 날리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닥터 롱베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이제 정신이 드나 갑판, 아니 리안?”
“으으으, 닥터... 저 물 좀...”
“그래 여기 있네.”
물을 달라고 했더니 롱베르씨가 웬 과육 조각을 내민다.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일단 입에 넣고 씹었다.
“우웨에엑! 퉤! 퉤퉤! 이게 뭡니까?!”
쓰고, 비리고, 심지어 음식물 쓰레기 냄새 같은 것도 섞인 저것은 도대체 뭐지?
날 독살하려는 건가?!
롱베르씨가 왜?!
“어, 음, 자극이 너무 강했나?”
“도대체 뭘 주신겁니까? 썩은 소똥 정도 되는겁니까?”
“아니 무슨! 자네도 알잖나, 그 오타베아. 마침 구석에 하나 남아 있기에 의료용으로 써봤네.”
의료용은 무슨?
그냥 불법 임상실험 같은데?!
“아오, 물이나 좀 주세요.”
“확실히 각성 효과는 있군. 갈증 해결은 조금 애매하지만.”
롱베르씨가 물 컵을 건네주었지만 나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먼저 냄새를 맡았다.
다행히 그냥 물인 모양이다.
심지어 원치 않게 익숙해진 물비린내도 안 난다.
물을 마시고나자 목과 위장에 격통이 밀려왔다.
무슨 순도 99% 알코올을 마시는 느낌이다.(물론 마셔본 적은 없다)
그리고 잠시 후, 몸 안의 통증이 가라앉자 몸 여기저기에서 고통을 호소해왔다.
온 몸의 관절이 삐걱 거리고 허벅지, 무릎, 팔목, 어깨 할 것 없이 다 손톱으로 긁은 자국 투성이다.
얼마나 긁었는지 피딱지가 내려않지 않는 피부를 보기가 힘들다.
팔목은 또 왜이래?
왜 물어뜯은 거야?
치아자국이 선명한 것을 보니, 다행히 내 앞니는 무사한 모양이다.
아, 그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행히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군. 상처들은 걱정 말게. 심한 건 없어. 뭐, 흉터는 조금 남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흉터 좀 안 남게 해주실 수 없나요? 온 몸에 손톱자국을 문신처럼 두르고 살고 싶지는 않은데요...”
온몸에 손톱자국 흉터라니... 그게 뭐야! 꼭 매 맞는 남편 같잖아?!
잠시 몸 상태를 점검하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온 몸의 관절이 마치 200년쯤 기름칠을 안 한 기계처럼 삐걱 거렸지만, 그럭저럭 몸을 움직일 수는 있었다.
“최대한 간단하게, 상황 설명 좀 해주세요.”
“여기는 웨던 섬 항구네. 입항한지는 하루가 지났고, 자네는 징벌방에서 초죽음 상태로 풀려나서 그동안 내게 치료를 받았지. 계속 헛소리를 중얼거려서 정신이 망가진 것은 아닌지 걱정했는데, 괜찮아 보이는군?”
어딜 봐서 괜찮다는 거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를 봐도 정상인 곳이 없어 보이겠구만.
아 참, 그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지.
“오펜은 어떤가요?”
“아, 그 아이는 다행히 실명은 면했네. 아직까지 특별한 후유증은 안보여. 운이 좋았지.”
그래, 다행히 실명까지는 안간 모양이다.
괜히 앞길 창창한, 음... 창창했을지도 모를 소년의 인생을 망친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정말 다행이다.
“그럼 그 개자식은요?”
“그 놈도 운이 좋았다고 해야하나? 부러진 이빨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다행히 전신불수는 면했어. 한동안, 아니, 어쩌면 평생 목과 팔이 불편할지 몰라도 일상생활은 가능할 걸세.”
“흐흐흐, 그럼 이제 그놈을 징벌방에 쳐 넣을 차례군요.”
정말 다행이다. 진짜!
만약 심각한 후유증이라도 있었다면 징벌방에 못 넣었을 것 아니야?
이런 좋은(?) 경험을 나 혼자 할 수는 없지!
“어험, 그건 조금 힘들 것 같네.”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하며 내 눈을 피하는 롱베르씨에게 나는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왜요?! 오펜이 회복이 잘 되서 망정이지, 그 놈의 그 행동 자체는 충분히 살인미수란 말입니다! 징벌방에 쳐 넣어야 한다구요!”
“그걸 왜 나한테 따지나?”
“따지는 게 아니고 왜 안되냐구요!”
내가 흥분해서 침을 튀어가며 소리를 지르자 질색하며 한 발 물러 선 롱베르씨가 대답했다.
“그놈, 어제 해고당했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선장새, 아니 선장님은 어디 있죠?”
“아이고,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나? 자네 지금 근신, 아니, 요양을 해야 해!”
근신이고 지랄이고, 난 이 새끼를 반드시 징벌방에 쳐 넣던가, 지옥에 떨어뜨릴거다.
법 없이 사는 놈에게는 초법적인 징벌이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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