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68화 (68/420)

<68화> 12시의 신데렐라

“으아앗! 리안이다!”

갑판으로 나오자마자 머리 위에서 우르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놈은 정박해 있는데 저기를 왜 올라가는거야?

내가 마스트의 까마귀 둥지(견시대)를 보고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어디선가 튀어나온 네이선이 내 어깨를 잡고 몸을 흔들어 댔다.

“리안! 리안, 몸은 괜찮아?”

응, 네가 흔들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아.

“그만, 그만 흔들어! 온 몸이 삐걱거린단 말이다...”

“어, 어? 미, 미안.”

내 말에 재빨리 내 몸에서 손을 뗀 네이선이 당황하며 사과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내 주변으로 몰려든 선원들에게 일일이 괜찮다고 말해준 뒤, 어느새 마스트에서 내려온 우르타와 눈이 마주쳤다.

큰 눈이 그렁그렁한 꼴이, 툭 치면 울게 생겼다.

“괜찮아, 임마... 그보다 너희는 괜찮아? 맞았다며?”

“으응, 우리는 뭐... 정말 괜찮은 거 맞지?”

“괜찮다니까. 며칠 쉬면 쌩쌩해 질거야.”

“하지만, 하지만... 리안이 막 헛소리를 하는데 일등 항해사님이랑 선장님이...”

호오? 이거 냄새가 나는데?

“뭐, 무슨 일 있었어?”

내가 채근하자 네이선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대신 대답했다.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선의님이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막는데도 막무가내로 리안 병실에 찾아갔었거든. 선의님까지 접근을 못하게 했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우리도 모르지.”

“나는 혹시라도 리안을 어떻게 할까봐...”

잠시 상황을 파악한 나는 곧 깊은 분노를 느꼈다.

하, 이런 개 같은... 그래, 난 이런 것들이 너무 싫었던 거다.

나름대로 인격자라고 생각했던 테일러조차도, 나를 자신과 동격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거지.

왜 이런 짓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이 반쯤, 아니 완전히 나간 나를 상대로 무슨 짓을 했던 거다.

사람을 일부러 미치기 직전까지 만들다니, 전생이었다면 제 정신인 사람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생각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전생의 기억을 온전하게 가진 내가 미치지 않고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외눈박이 세상에서는 눈이 두 개인 사람이 괴물인 것처럼, 폭력과 살인이 일상이고 신분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달라지는 이 세상에서 나는 일종의 괴물인 것이다.

별것도 아닌 이유로 살인미수라는 중죄를 저지르고도 억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호르세라는 미친놈이, 그동안 기억과 현실의 괴리감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터뜨리는 기폭제가 된 것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 정도 일로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화가 났다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

사실 더 열 받는 상황은 바로 지금인 것 같은데 다행히 내 이성은 아직 냉철하거든.

“나 얼마나 갇혀 있었어?”

“어? 그, 글쎄?”

네이선과 우르타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손을 꼽고 있는데, 옆에 있던 선원이 대신 대답했다.

“대충 20시간 정도일걸? 새벽에 풀려났으니까.”

“아니야, 내가 당직이어서 아는데 그때 선의 양반이 엄청 화를 내면서 ‘이곳에 사람을 18시간이나 가두다니 당신 미쳤소?!’라고 소리치는 걸 들었거든.”

“선장님한테? 선의 양반 배짱이 대단하시네.”

“설마 선장님한테 대놓고 그랬겠냐? 그 옆에 있던 일등 항해사를 보고 말했지. 어차피 선장님한테 한 말인게 뻔하기는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진짜 아예 엿 먹일 생각으로 이틀을 감금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고작 18시간이라니, 난 적어도 30시간은 갇힌 줄 알았다.

아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선장님은 어디 계셔?”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도 내 목소리가 착 가라앉은 것이 느껴진다.

“어? 아마 선장실에... 그건 왜?”

나는 대답을 듣기 무섭게 선원들을 밀치고 선장실로 향했다.

뒤에서 선원들이 말리는 소리가 들리고 우르타와 네이선이 나를 붙잡았지만, 살짝 뿌리치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아, 회복했으니까 보고하러 가는 것 뿐이니까.”

“정말이지?”

“괜히 가서 난동 피우면...”

이것들이 한번 사고 쳤다고 나를 사고뭉치로 아나?

그리고 솔직히 이 몸으로 테일러랑 1:1로 붙어서 이길 자신도 없다.

......

이겨도 문제, 아니 싸우는 것 자체가 문제지만.

* * * * *

“선장님, 리안입니다.”

정중히 노크를 하고 대답을 기다렸지만 선장실 안에서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노크를 하려고 손을 드는 순간, 기다리던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테이블에 앉아있는 테일러가 보였다.

술을 마셨는지 테이블 한 켠에 술병과 주석 잔이 있었고, 안색도 그리 좋지 않았다.

아니, 고생은 내가 했는데 저 인간 얼굴이 왜 저래?

“앉지.”

“...감사합니다.”

내가 맞은 편 의자에 앉자, 잔에 술을 반쯤 따르고는 물었다.

“한 잔 하겠나?”

“보시다시피 술을 마실 몸 상태가 아니군요. 사양하겠습니다.”

“그렇군.”

자신이 마실 듯 술잔을 입 근처로 가져가던 테일러가 멈칫 하더니 다시 잔을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몸은... 괜찮나?”

그걸 말이라고... 쌍욕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초인적인 인내로 그걸 내리 누른 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대답했다.

“딱히 좋지는 않습니다만, 겪은 일에 비하면 양호합니다.”

어색하고 긴장되는 침묵이 사방을 내리 눌렀다.

할 말이 많기는 한데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

“미안하군. 하지만 내게도 사정이 있었네. 이해해 주게.”

...일단 참고 앞뒤 파악 좀 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되겠다.

“사정! 도대체 무슨 사정입니까?! 그게 저를 죽이거나 정신병자로 만들 정도의 사정입니까?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까지 만들어서 뭘 하려고 한겁니까?!”

내가 테일러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소리쳤지만, 테일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같이 언성을 높였다.

“나는! 제국의 안정된 번영을 위해 이 일에 자원했네! 일의 성패가 내 어깨에 달린 이상! 작은 실수도, 의혹도 허용할 수 없어! 자네를 죽이는 일? 필요하다면 할 것이야! 자네뿐만 아니라 내가 죽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기꺼이 죽을 걸세!”

하하, 이것도 미친놈 맞네.

평소에도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정도면 거의 광신이다.

내가 전생에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충성심이 과한 사람의 말로는 거의 안 좋다는 것이다.

질긴 동앗줄이라고 생각했는데 중간에 칼집이 나 있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의혹, 그게 뭡니까?”

내가 이를 악 물고 묻자, 잔에 담긴 술을 들이키고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던 테일러가 짙은 술냄새를 뱉으며 대답했다.

“좋아, 어차피 의혹은 풀렸으니 말해주지. 자네를 의심했다. 상식을 벗어난 재능과 능력, 게다가 자네가 합류한 이후로 우리는 위기의 연속이었지. 심지어 이번 사건도! 자네가 아니었으면 수습 선원 따위 태울 일도 없었고, 자네가 갑자기 미친놈처럼 폭주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커질 일은 아니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의심을 안 할 수 있겠나?!”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저게 저렇게 연결된다고?

그러니까 지금까지 있었던 사건들이 내가 관련된거라고 의심했다는 거지?

그래서 나를 심문하려고 그 징벌방이라는 데에 일부러 가두셨다?

그러니까 내가 첩자라는 근거 없는 의심만 아니었다면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정신착란 증세를 겪을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솔직히 최근에 무슨 마(魔)가 씐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건, 사고가 많기는 했다.

나도 그동안 목숨에 위협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런데 진짜 나 때문에 생긴 사건은 이번 사건, 딱 하나 뿐이잖아.

의심생암귀(疑心生暗鬼)라더니, 의심이 결국 귀신을 낳았구나...

하지만 귀신이건 뭐건, 깨진 그릇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는 것처럼 박살난 신뢰도 되살릴 수 없는 법이다.

그렇게 엮으니까 의심이 들었다는 것은 이해를 한다.

그런데 굳이,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했나?

그리고 그걸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아, 그렇습니까?’라고 이해할 줄 알았던 거야?

힘겹게 마음을 정리한 내가 심호흡을 하고 물었다.

“좋습니다. 의혹이 풀리셨다니 심문은 충분히 하신 것 같군요.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정도로 의심을 하셨다면 죽이거나 해고하는 간단한 방법도 있었을 텐데, 저는 이 자리에 앉아 있군요.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사실 이 부분이 진짜 이상한 부분이다.

조금 온건한 방법으로 의심을 풀었다면 내가 좀 서운해도 그럭저럭 우리 관계는 괜찮았을 지도 모른다.

테일러의 상황, 그리고 제국의 해군 창설 계획이 얼마나 위태롭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는 나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면, 어차피 의심이 풀려도 우리 관계는 결국 파탄이다.

그리고 어차피 그렇게 끝날 거라면 테일러 입장에서는 차라리 나를 죽이거나 해고하는 쪽이 더 간편한 해결법이다.

내 질문이 끝나자 잠시 나를 보던 테일러가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제안은 아직 유효하네, 삼등 항해사 자리를 주지. 비록 안 좋은 일이 있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고 모든 의혹은 풀렸어. 돌아가는 길에 항해사로서 경험을 쌓게. 정식으로 함대가 창설되면 일등 항해사가 될 수 있을 거야.”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혀를 씹어가며 억지로 참았다.

지나간 일이라니... 자기 일이 아니라고 막 던지는구만?

더 웃기는 것은 저 말을 하는 테일러의 표정이다.

마치 당연히 내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는 표정이라니...

저 남자, 아마도 태생부터 귀족, 권력자였던 사람일 거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지금 상황이 아랫사람에게 약간 심하게 대한 정도일 뿐, 우리 관계가 파탄 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선민의식을 제외하더라도 문제는 많다.

먼저 그가 말한 의혹, 그놈의 의혹!

그래, 어떻게 심문을 했다는 것인지 이해는 안되지만, 지금까지 품었던 황당한 의혹은 풀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당장은 아닐지 몰라도 먼 훗날 비슷한 일이 또 있으면 그때는 이렇게 생각할게 뻔하지  않아?

‘설마 저 놈이 그 때 일에 원한을 품고 복수하려고?’

그때는 아마 이런 번거로운 일을 벌일 것 없이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지 않을까 싶다.

...휴, 마음의 정리는 끝났고...

좋아,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선장실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테일러에게 한마디 하고 쿨하게 사표 던지려고 했는데, 계획을 바꿨다.

지금 배에서 내리면 다음 배에서 나는 그냥 선원이다.

다른 배를 타더라도 다시 본토로 갈 수 있는 원양 상선을 타야할 것 아닌가?

본토에서 여기까지 온 배에 갑판장이 공석일리도 없고, 고작 며칠 임시 갑판장을 맡은 것으로는 경력도 안쳐줄거다.

하지만 항해사는 다르지.

항해술은 항해학교에 가지 않는 이상, 애초에 쉽게 익힐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억울하고 화가 나지만, 아직 이론밖에 못 배웠으니 당분간은 항해사로 경력을 쌓자.

그리고 다음에 기회를 봐서 뒤통수 거하게 치고 튀는 거야.

나중이라면 몰라도 당분간은 테일러도 나를 내치지 못할거다.

아마 해군 창설이 끝나고 안정권에 접어들면 그 때쯤 버리는 돌로 쓰겠지.

다른 것은 몰라도 능력만큼은 입증 한 꼴이잖아?

내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나는 제물로 쓰고 생색내기에 아주 좋은 대상이 된 것이다.

일레드건, 벨로키나건, 테일러의 정적(정치적으로 대립중인 사람 또는 세력)이건, 내가 뒤통수를 치기로 마음먹으면 선을 댈 수 있는 후보는 많다.

지금 모은 돈도 꽤 되니까 그렇게 한탕 하면 중형 상선 정도는 살 돈이 되겠지.

항해술을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몸값 비싼 일등 항해사를 고용할 필요도 없고, 내해는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까 회계사도 필요 없다.

그렇게 이익을 극대화해서 몇 년 고생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저택을 사서 부유하고 여유 있는 이세계 라이프를...

한참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데 테일러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불러왔다.

“생각이 길군. 어떻게 하겠나?”

나는 단단한 가면을 썼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은 후에, 목소리를 풀고 대답했다.

“휴... 그나마 의혹이 풀렸다니 다행이군요. 그리고 어차피 항해사를 시키길 것 아니었습니까? 이왕이면 이등 항해사로 주시죠.”

삼등 항해사는 항해학교를 막 졸업한 초보 항해사들이 임명되는 자리다.

그래서 견습 선원과 마찬가지로 견습 항해사 취급을 받는다.

물론 견습 선원과 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지만, 인식이 그렇다는 것이다.

“흠, 하지만 삼등 항해사부터 시작하는 것이 정석일세.”

“선원들에게 선장님과 저의 화해무드를 알릴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으음, 생각해보지.”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여전히 몸이 안좋아서요.”

“그러게.”

선장실을 나오자 멀리서 나를 보고 슬금슬금 다가오는 녀석들이 보인다.

혹시 저들 중에 나를 떠보려는 테일러의 심복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일등 항해사야 테일러와 행보를 같이했으니까 안 보인다고 쳐도, 볼라트 이 사람도 안보이네?

졸지에 임시 갑판장이 되신 베이커 갑판장님도 안보이고 말이야.

사람들 인심하고는...

그래도 나 때문에 마스트에 매달린 멍청이 두 놈이 보이고, 그 뒤로 눈에 붕대를 둘둘 감은 오펜도 보인다.

내 편, 내 사람이다.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클로나의 갑판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답답해지는 내 심정과 상관없이 신비로운 마법은 풀렸고, 이제 적과의 동침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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