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복수는 작은 것부터
선장실에서 나와 선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일등 항해사실의 문이 열리며 알리샤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적으로 장내의 소란이 가라앉으며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알리샤는 개의치 않고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 몸 여기저기에 감겨있는 붕대에 잠시 눈길을 주더니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다.
“리안... 몸은 좀 괜찮나?”
이 인간들이 아주 돌아가면서 속을 뒤집는구만.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걱정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이해할 말인데, 막상 이 꼴을 만든 원흉(?)들이 물으니까 괜히 배알이 꼴린다.
일등 항해사야 선장의 말을 거역하기 힘드니까 어쩔 수 없이 따른 것 일수도 있지만, 제정신이 아닌 나를 심문하러 테일러와 함께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으니 좋게 생각하기 힘들었다.
“보시다시피, 좋지는 않습니다.”
냉랭한 내 대답에 알리샤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고개를 살짝 젓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잠깐 이야기는 할 수 있겠지? 내 방으로 가지.”
마음 같아서야 당신과 할 말은 없다고 호기롭게 외치고 싶었지만, 당분간 굽히기로 했으니 일단 한 번 굽히기로 했다.
괜히 반항적인 모습을 보여서 테일러가 먼저 나를 쳐내게 하면 곤란하니 말이다.
“잠깐이라면... 그렇게 하시죠.”
“음, 따라오게.”
나는 앞장서서 걸어가는 알리샤를 따라 두어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며 우르타와 네이선에게 말했다.
“너희는 내 방에 가 있어. 금방 갈테니까.”
“어? 어, 어, 그래. 가자, 네이선.”
“그, 그래.”
* * * * *
알리샤의 방에 들어와 테이블에 마주 앉자, 알리샤가 옆에 있던 술병을 들고는 물었다.
“한 잔 할텐가?”
“괜찮습니다.”
혹시 이것들은 사관학교에서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는건가?
무슨 데자뷰도 아니고 테일러와 마주앉았을 때랑 상황이 똑같다.
설마 대화 내용도 똑같지는 않겠지?
“그래, 회복에 술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지.”
내가 거절할 줄은 몰랐다는 듯 약간 당황하던 알리샤는 혼잣말을 하더니 자기 잔에만 술을 따랐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십니까? 최근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선장님과 충분히 나누었습니다만...”
“아, 그건... 자네가 선장님을 좀 이해해 주게. 벌이 좀 과해서 억울하고 화가 나겠지만...”
“일등 항해사님! 선장님께서 이미 다 말씀하셨습니다. 벌이라구요? 네, 어느 정도는 벌의 의도도 있겠지만 주 목적이 그게 아니었을 텐데요?!”
알리샤는 테일러가 나에게 ‘벌을 과하게 줘서 미안하다’ 뭐, 이정도로 마무리를 한줄 아는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그의 말을 끊고 테일러가 다 이야기 했다는 것을 알리자, 눈에 띄게 당황하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생각을 정리한 듯 알리샤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랬나. 들었다니 말하기가 편하겠군. 서운하겠지만 상황이 조금 그랬네. 의혹이라는 것은 그냥 두면 점점 커지게 마련이지. 그러니 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신뢰를 얻었다고 생각해주게.”
비싼 대가라, 비싸기는 하지. 막말로 미치기 직전까지 가는 경험이 흔한 것은 아니지.
그런데 그렇게 얻은 것은 억울하게도 신뢰가 아니고 불신이다.
“그보다, 다른 녀석들 말로는 제가 헛소리만 했다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심문을 하신 겁니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었으니 의혹이 풀렸다고 하신 걸 텐데요?”
테일러와 이야기 하면서도 의문이 들었지만, 냉정하게 머리를 굴리다보니 막히는 부분이 여기였다.
물론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확실한 것은 내 상태가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재주로 두 사람은 날 심문했던 걸까?
아니, 애초에 그런 반 실신 상태에서 하는 말이 의미가 있기는 할까?
“그것은... 휴...”
말하기가 곤란한 듯 잠시 컵을 노려보던 알리샤가 내 뒤에 문을 한번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각 국의 첩보기관에서 쉬쉬하며 사용하는 심문용 마도구가 있네.”
“......”
“소위 ‘진실의 제관’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뭐, 마법으로 은행 시스템까지 구축한 곳이니 사람의 정신에 작용하는 물건이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테일러는 개발 중인 신무기(마력포탄)를 고작 상선(?)을 끌면서 테스트 할 정도로 제국의 군부와 깊게 관련된 사람이다.
그런 마도구가 있다면 하나쯤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런 도구가 있는데 왜...”
“그건... 인간의 정신력이 마도구보다 강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이 심문용 마도구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대상의 정신적 방어기제가 완전히 무너져야 해.”
그렇겠구나. 하긴, 아무런 제한이 없다면 진작 이 세상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세상이 되었을거다.
그렇다고 그런 흉악한 물건을 나한테 쓴 것이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지.
“그 마도구, 부작용은 없습니까? 보통 사람의 정신에 손을 대면 문제가 생긴다던데...”
뭘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고, 그냥 전생에서 자주 보던 판타지 소설을 보면 나오지 않나?
정신계 마법을 쓰면 인간이 폐인이 되고 뭐 그런 설정 말이다.
“아직까지 보고된 부작용은 없네. 애초에 이 걸 쓸 정도면... 알잖나?”
하긴, 사용 조건 자체가 정신의 방어막을 강제로 망가뜨리는 것이니까 부작용이 생겨도 값비싼 마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사용 조건을 맞추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로 치부하겠지.
내가 치솟아 오르는 짜증과 분노, 혹시나 하는 불안감과 걱정 때문에 고뇌하고 있는데, 서둘러 상황을 수습하려는 알리샤의 말이 들렸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네. 혹시라도 부작용이 생겼다면 진작 나타나야 했으니까.”
응, 전혀 위로가 안된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어쩌겠어?
이미 머리 어딘가가 망가졌다면 화를 내고 복수한다고 그게 나아지는 것도 아닐테니.
심호흡을 하며 겨우 감정을 가라앉힌 내가 알리샤에게 물었다.
“좋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려고 부르신 것은 아닐 것 같고, 무슨일이십니까? 보시다시피 제 몸이 정상이 아니라서 피곤하군요.”
“아, 쓸데없는 말이 길었군. 혹시... 배를 내릴 생각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선장님께서 항해사 자리를 제안하시더군요.”
내가 테일러의 제안을 전하자 알리샤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눈에 띄게 기뻐했다.
“정말인가?! 다행이군. 혹시 이번 일에 실망해서 자네가 떠나지 않을까 걱정했어.”
원래는 떠날 생각이었지. 테일러와 이야기하다가 복수하고 떠나는 것으로 급선회했지만 말이야.
“잘 생각했네. 힘들고 서운한 일이지만 이미 지난 일이고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았나? 먼 훗날을 생각한다면 배에 남는 것이 좋은 선택이지. 역시 자네는 생각이 깊군.”
그래, 그렇게 좋게 생각해라.
당신들이 쉽게 믿어준다면 나도 나쁠 것은 없지.
“그런데 며칠 전에 직책을 다 박탈당한 저를 다시 저를 항해사로 채용해도 되겠습니까?”
“원래라면 조금 힘들었겠지. 아무래도 최근 들어 선원들의 선장님에 대한 신뢰나 사기가 말이 아니었으니까.”
“네? 지금은 아니라는 말로 들리는군요.”
생각해보니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도 뭔가 묘하게 전보다 활기가 있다는 느낌이 있기는 했다.
그냥 이번 항해는 나를 포함한 당사자 몇 명을 제외한다면 별 사건이 없었으니 긴장이 조금 풀렸나 싶었는데...
“잃어버린 선단의 소식을 확인했네. 우리가 입항하기 하루 전에 이 섬을 떠나 남쪽에 있는 클레이들 섬을 향했다고 하더군. 부지런히 쫓아가면 곧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아.”
“아...”
선원들의 사기가 낮은 주된 이유는 본토로 다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불확신 때문이었다.
올 때는 선단을 구성하고 왔는데도 해적을 만나고 폭풍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선단조차 잃은 지금의 상황이 불안하지 않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새로 모집한 선원의 비중까지 높아지는 바람에 부정적인 이야기가 자꾸 돌면서 사기를 깎아먹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선단에 무사히 합류하게 된다면 이런 부분들이 대부분 해결된다.
내 문제까지 겹치면서 위태롭던 테일러의 선내 장악력도 다시 올라가겠지.
“다행이군요.”
일단 나도 무사히 돌아가기는 해야하니까 잘된 일이기는 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른 마음을 먹자마자 테일러의 위상이 공고해진다고 생각하니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래, 다행이지. 덕분에 선장님도 여유가 생기셨어. 자네가 일을 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단지 실수였을 뿐이지 않나? 다시 갑판장을 시키겠다는 것도 아니니 큰 잡음은 없을거야.”
그럼 그렇지. 테일러가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는 것을 감수하면서 까지 나를 복귀시킬 리가 없었다.
만약 항구에 입항해서 받은 소식이 희망적인 소식이 아니었다면?
예를 들어 상선단이 전멸했다거나 이미 본토로 향해서 합류가 불가능하다는 소식을 접했다면 선원들의 사기는 나락으로 처박혔을 것이고, 조만간 대규모 이탈자가 나오거나 집단적인 항명사태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뭐, 군인 출신들은 아니라고 부인하겠지만 사실 그건 상황이 되어봐야 아는 거지.
그리고 그런 상황이었다면 아마 테일러는 내게 항해사라는 커다란 당근을 제시하기보다는 제거하는 쪽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뭔가 중요한 것을 지금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뭔가 찝찝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졌나보다.
술잔을 홀짝이던 알리샤가 물었다.
“응? 표정이 왜 그러나?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 뭐... 보급이나 거래는 어떻게?”
“그건 볼라트 항해사가 임시 회계사를 맡아 진행하기로 했네. 어깨너머로 배워서 제대로는 못하지만 보급품 거래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하더군.”
“그렇군요. 볼라트 항해사가...”
그래서 계속 눈에 안보였던 모양이다.
그럼 그렇지, 그동안 쌓은 정이 얼마인데 그렇게 쉽게 사람이 변하겠어?
그런데 여전히 찝찝함이 가시지 않는다.
도대체 뭘 잊고 있는거지?
“그러면 언제 출항합니까?”
“글쎄? 보급품 선적이 끝나면 바로 출항하지 않겠나? 이제 막 점심때가 지났으니 빠르면 오늘 오후쯤에 출항하리라고 생각하네. 선원들에게도 점심 먹고 모두 복귀하라고 지시해 두었으니.”
“아, 알겠습니다. 곧 출항을 한다면 저도 이제 준비를 조금 해야겠네요.”
“그래, 어서 가서 조금이라도 쉬게.”
“그럼 전 이만.”
일등 항해사실을 나와 내 방을 향해 걷고 있는데, 내 옆으로 붕대가 둘둘 말린 머리통 하나가 따라 붙었다.
“저기, 리안 선원님.”
“어, 그래, 오펜. 선원님이라니 무슨 말이 그래? 그냥 리안이라고 불러.”
“그래도 어떻게... 그럼 리안님이라고 부를께요.”
열 살도 차이 안 나는데 굳이 리안님이라니... 의외로 고지식한 녀석이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그래, 뭐 대충 부르고. 왜? 몸은 좀 괜찮아?”
“네! 리안님이랑 의사 선생님, 아니 선의님 덕분에 괜찮아요! 눈도 괜찮을 거라고 의사, 아니 선의님이 말씀하셨구요.”
“다행이네, 할 말이라도 있어?”
“아니, 그...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글쎄다, 감사할 일일지는 모르겠다.
이정도 사건의 주인공이 되셨으니 너 앞으로도 수습 선원 생활이 꽤 힘들 것 같은데?
그래도 희망에 가득 찬 소년에게는 암울한 미래를 숨겨주는 것은 어른의 도리인 법이다.
“감사는 무슨, 그런 건 닥터한테나 해. 오늘 출항할지도 모른다니까 어서 가서 준비해.”
“네! 감사합니다!”
길바닥 출신인데도 아직 순수함이 남은 녀석이다.
그러니 같잖은 양아치에게 얕보여서... 어?!
그러고 보니 오늘 출항하면 그 호르세인지 조르세인지 하는 놈을 조질 수가 없잖아?!
뭐가 이렇게 찜찜하나 했더니 이 양아치 놈을 깜빡 잊고 있었다!
쪼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원래 이런 일은 후환을 남기지 않는 것이 중요한 법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