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잔혹한 현실
오펜을 보내고 나서 급하게 방으로 뛰어가 안에서 시시덕 거리던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야! 지금 외출 문제없지? 너희 그 양아치, 호르세? 그놈 어디 있는지 알아?”
“아, 리안 왔... 어?”
“갑자기 무슨, 호르세? 그게 누구야?”
“음...”
우르타가 멍청한 얼굴로 네이선에게 물었지만 네이선 녀석은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아, 그놈 있잖아!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인 놈! 해고당했다며? 몸이 정상은 아닐테니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것 아냐?”
“아하! 그거라면 네이선이 알텐데? 네가 치료사에게 데리고 갔잖아?”
“뭐?”
이건 조금 이상하다.
포병대장이 친하게 굴기는 하지만 아직 포병대 소속이 아닌 우르타와 달리, 네이선은 공식적으로도 해병대 소속이다.
갑판장이 네이선에게 뭔가를 시킬 수 없다는 뜻이고, 호르세가 거동을 못하는 상황이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해도 네이선이 그 도움을 제공할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아까부터 표정이 영 시원치 않다.
“야, 네이선. 뭐야? 너 지금 뭘 숨기는거야?”
“그래, 너 표정 진짜 이상해!”
관찰력 좋은 우르타가 네이선을 요상한 눈으로 샅샅이 살피기 시작하자, 바로 네이선이 항복을 선언했다.
“아, 알았어, 알았어. 너 그런 눈으로 자꾸 보지 마! 소름 돋아!”
결국 우르타를 한 대 쥐어박은 네이선이 한숨을 내쉬더니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아니, 리안 네가 그렇게 돼서 기분도 거지같은데, 그 자식이 부축을 받으면서 내리잖아. 리안은 그런 고생을 했는데, 아무런 벌도 안받고 그렇게 두 발로 멀쩡하게 걸어가는 걸 보니까 너무 꼴 보기 싫었거든.”
부축을 받는데 멀쩡하다는 표현은 좀 그렇지 않냐...?
“그래서?”
“그냥 뭐, 부축하는 애 따라가서 슬쩍 바꿔준다고 했지. 좋아하면서 바로 바꿔주던데?”
“그게 지금 중요한 말이냐? 내가 지금 그게 궁금하겠어?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어... 그게....”
“아! 뭔데?!”
흥미진진한 전개에 한 대 맞은 것도 잊어버렸는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우르타가 재촉하자, 네이선이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 놈에게 몸 괜찮아 보이니까 굳이 치료사에게 갈 것 있겠냐고, 그냥 돈으로 준다고 했지.”
“그래서 그냥 돈을 줬어? 나는 굳이 네이선이 그 사람 부축하길래 어디 으슥한데 가서 죽여버리고 온 줄 알았는데?”
어... 나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하기는 했는데, 대놓고 그렇게 했다가는 재수 없으면 이번 사건처럼 꼬이는 수가 있다.
그나저나 우르타 이놈도 순진한 얼굴을 한 주제에 진짜 뼛속까지 선원이구나.
사람 죽이는 걸 저렇게 쉽게 말하다니...
각설하고, 사건이 일어나는 빈도수와 별개로 이 세상도 살인은 심각한 범죄다.
배가 바다위에 있을 때야 서로 좋은게 좋은거라고, 사건이 있어도 자체 처벌로 처리하고 쉬쉬하지만, 입항중에는 그 항구가 소속된 나라의 법에 따라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특히나 배 위에서도 아니고 상륙 중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빼도 박도 못한다.
물론 범죄 사실이 명백해도 배타고 튀면 거의 못 잡기는 하지만... 하여간 매우 귀찮은 상황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어, 그 새끼 돈을 준다니까 앞뒤 안 가리고 좋아하면서 바로 술집으로 가던데?”
뭐, 네이선이 사고를 친 것은 아니라니까 다행이기는 한데... 영 떨떠름하다.
그러니까 치료사에게 안 데리고 갔다는 건가?
데리고 가는 것이 귀찮아서? 치료사에게 치료 받는 것이 못마땅했나?
그런데 어차피 응급치료는 롱베르씨가 다 했을거고... 이 세상의 치료사라는 것이 개인적인 편차가 좀 심하기는 한데 대부분 꽝이다.
그러니까 치료사에게 맡기고 돈을 안주는 쪽 보다는 돈을 주는 쪽이 그놈에게는 더 좋은 것 아닌가?
그것도 모를 정도로 네이선이 멍청이는 아닌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그러니까 그놈이 제대로 치료를 못 받게 했다, 뭐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어? 치료? 그건 이미 선의님이 다 한 거 아니야?”
얼빠진 얼굴로 오히려 되묻는 네이선을 보자 뭔가 가슴속이 답답해졌다.
그러니까 도대체 네가 한 짓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고?!
“그래, 그걸 아는 녀석이 그놈에게 돈을 쥐어줬어? 뭐, 술에 취해서 혼자 넘어지기라도 바란거냐?”
“무슨 소리야, 리안? 그렇게 술 못 마셔, 그놈은.”
아니, 언제부터 그놈 주량까지 알았던 거냐.
그보다 같이 술을 마셔 볼 시간이나 있었어?
“아하, 그렇구나! 그 전에.... 우와, 네이선도 되게 똑똑한데?! 방금 리안같았어!”
갑자기 우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짓더니 박수를 치면서 좋아한다.
오늘따라 내가 엄청 멍청해진 느낌인데, 이거 후유증 아니냐?
내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던 것 같다.
우르타가 웃는 것을 멈추고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내게 얼굴을 쑥 내밀며 물었다.
“어? 괜찮아, 리안? 표정이 안좋은데...?”
그러자 멋쩍게 웃고 있던 네이선도 덩달아 심각해져서 묻는다.
“혹시 내가 뭐 실수했어? 네가 맨날 뒷일 생각하고 행동해라고 해서 나름대로 생각하고 행동한 건데...?”
그러니까 말이다.
맨날 그런 잔소리를 하다가 사고는 내가 다 치고, 이제는 네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이해도 안되는구나.
“아, 그만하고, 지금 둘 다 따라 나와. 네이선 너 그 새끼 갔던 술집 알지? 그 정도 다친 놈이 흔하지는 않을 테니 수소문하면 찾을 수 있겠지.”
솔직히 지적 능력만큼은 조금 무시하던 두 사람이 아는 것을 나만 모른다고 생각하니 좀 자존심이 상한다.
심지어 나는 다 알고 이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저기에 대고 어떻게 난 잘 이해가 안 되니까 상황을 설명하라고 말하겠어?
“리안, 지금 배를 내려가는 것은 좀... 갑판장님(이제 베이커씨다)이 오후까지 다들 복귀하라고 했는데?”
“그래, 몸도 정상이 아닌데 굳이 내려가서 뭐하려고? 시체라도 확인하게?”
뭐? 시체? 무슨 시체?
갑자기 여기에서 시체가 왜 나와?
“시체라니 무슨 말이야?”
내가 어이가 없어 부지불식간에 질문을 내뱉자, 두 사람이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어이 씨, 딱 걸렸네.
“리안, 지금 그 호르세인가 확인하러 나가려는 거 아냐?”
“지금쯤 시체되서 뒷골목에 굴러다닐텐데...”
“아니! 그러니까 그놈이 왜 시체로 굴러다니냐고!”
“어? 당연하잖아?”
“그러게, 그걸 왜 모르지?”
한참을 낄낄 거리던 두 녀석은 내가 뒷목잡고 쓰러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네이선이 웃음을 참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리안, 잘 생각해봐. 그 놈은 온 몸이 엉망이야. 팔도 불편하고 목이 아파서 제대로 뛰지도 못하지. 그런데 돈이 많은 거야. 일부러 돈주머니인거 티나게 했으니까 주변에 눈치 빠른 놈들은 다 알았을걸?”
어, 그래, 설명 정말 고마운데 왠지 네 말투가 굉장히 익숙하게 느껴지는구나.
내가 너희들한테 그렇게 재수 없는 말투로 말했던 거니?
“그런데 그 녀석은 멍청하게도 바로 술집으로 갔지. 아마 술도 마셨겠지? 그럼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야 이해가 된다.
우리는 그나마 선박에 소속된 선원이니까 좀 나은 편이다.
돈을 훔치려는 녀석이나 몇 푼 뜯어내려는 녀석들이 들러붙을지는 몰라도, 대놓고 강탈하려는 녀석은 별로 없다.
괜히 들쑤시면 후속 처리가 어려우니까 뒷골목 불량배들도 알아서 적당히 자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배에서 쫓겨난 부상자라면?
심지어 그 놈은 멍청하게 거금을 들고 술집에서 혼자서 술을 쳐 마시고 있는 거다.
배를 좀 타본 선원들도 웬만하면 하지 않을 행동이다.
그 정도면 뒷골목의 질 나쁜 놈들이 보기에는 굴러다니는 금덩어리로 보일게 뻔하고, 금은 가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법이니까.
‘설마 죽이기까지 하겠어?’ 라는 순진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보다 사소한 일로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세상이다.
당장 이번 일만 해도 그렇잖아?
호르세 그 놈은 단지 어린 오펜이 자기보다 대우가 약간 좋다는 질투 때문에 거의 죽일 뻔했다.
이쯤 되면 호르세가 갑자기 자비로운 마음으로 ‘내 돈 다 가지고 가게’라고 하지 않는 이상 살아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
그래도 확인은 해보자.
보통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이렇게 뒤처리 대충 했다가 뒤통수 맞잖아?
안그래도 내가 남의 뒤통수를 치려고 준비중인데, 남한테 먼저 맞는 것은 사양이다.
그래서 안된다는 녀석들을 재촉해서 네이선이 말하는 술집으로 가는 중이었는데, 우르타가 먼저 뭔가를 발견했다.
“리안... 저쪽에...”
“어? 뭔데?”
“한 번 확인해 봐야할 것 같은데?”
우르타가 말한 방향을 보니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대낮인데도 약간 어두침침한,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법한 좁은 골목.
그곳에 한 사람이 벽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잠들어 있다기에는 몰골이 안 좋기는 했다.
겉옷이 없어져서 드러난 피부에는 멍과 핏자국이 가득했고, 얼핏 드러나는 얼굴도 엉망인 것처럼 보인다.
내가 설마하는 생각에 주저하고 있자 성큼성큼 다가간 네이선이 얼굴을 들어 살피더니 신음성을 내 뱉었다.
“윽...! 어우야, 심하게 당했네.”
“그놈 맞지? 맞아? 응?”
우르타가 팔랑거리며 잰걸음으로 다가가서 함께 확인하더니 얼굴을 확 찌푸린다.
“리안, 그 놈 맞아. 제대로 당했네.”
천천히 다가가서 살펴보자, 한 쪽 눈이 완전히 짓뭉개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돌리자 엉겨 붙은 핏물 사이로 복부에 난 자상이 몇 개 보였다.
대충 봐도 칼에 찔린 상처다.
이미 죽었...
“으으...사, 사려...”
“으악! 뭐야?! 아직 안 죽었어?!”
시체라고 생각했던 호르세에게 신음성이 흘러나오자, 우르타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반면 이미 알고 있었는지 네이선은 매우 침착했다.
“리안,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긴... 저 정도 상처면 어차피 이 세상의 의학으로는 못 살아난다.
신관들이 신성력이라는 것으로 상처를 치료한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실제로 본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신관들도 아마 혀를 내두를거다.
내 손으로 하지는 않았더라도 후환(?)을 없애기는 했지만, 영 입맛이 썼다.
“돌아가자, 괜히 온 것 같다.”
* * * * *
이클로나로 돌아가자 그 새 보급품이 도착했는지 다들 물건을 실어 옮기느라 바빴다.
그리고 적재를 지휘하던 베이커씨, 아니 이제 갑판장님이지? 갑판장님이 손을 흔들었다.
“어이, 리안! 이제 좀 괜찮은 모양이군?”
어... 이제 직위 역전이니까(난 아직 항해사가 아니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직위로 보나 베이커씨가 반말을 하는 것이 맞는데, 되게 어색하다.
그래서 나는 어색한 미소를 숨기지 못한 채 겨우 입을 열었다.
“예에, 덕분에요.”
덕분은 무슨, 갑판장 꿰차고 얼굴도 안보이던 사람이... 쳇.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뭘 그렇게 돌아다녀? 가서 좀 쉬게. 우르타 너는 가서 짐 좀 옮기고!”
“아, 왜요! 나도 마스트에 매달렸었는데!”
“뭐?! 이자식이?!”
베이커가 짐짓 눈을 부라리자 우르타가 재빨리 내빼며 소리쳤다.
“가요! 간다구요! 다들 갑판장만 되면 왜 저렇게 변하는 거야?!”
우르타가 빠지자 네이선도 어색했는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내게 급히 인사를 남기고 부지런히 사라졌다.
음, 해병대랑 갑판장의 사이가 저러는 것이 정상이기는 하지.
“어, 그, 미안하네. 갑자기 볼라트 항해사가 도와달라고 해서 말이지. 자네 자리를 뺏은 것 같아서 영 마음이 불편해.”
“아닙니다, 원래 갑판장님이 더 어울리던 자리잖아요.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제가 잘못한건데요 뭘.”
내가 예의상 겸양을 떨자 대번에 표정이 풀린 베이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참! 볼라트 항해사가 찾던데? 방금 자기 방에 들어갔네.”
“아, 네... 그럼...”
“저기, 잠깐.”
“네?”
말하기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베이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아픈 사람에게 이런 말 하기는 좀 미안하지만... 그, 방을 좀 비워주지 않겠나? 아무래도 자네 물건들이니 직접 정리하는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러고보니 아직 내 방은 갑판장실이다.
이제 갑판장이 아니니까 당연히 방을 내줘야겠지.
원래대로라면 선원들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선실로 내려가야겠지만, 항해사 자리를 받기로 했으니 정식으로 임명이 되고 나서 항해사실로 옮기면 될 것 같았다.
“아... 제가 깜빡했네요. 며칠만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제가 몸이 좀 이래서...”
“그럼, 그럼! 며칠정도야 당연히 기다려주지.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부탁하네.”
사생활 존중이라는 것이 없는 일반 선실과 갑판장실은 삶의 질이라는 면에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보니 베이커의 재촉이 살짝 서운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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