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71화 (71/420)

<71화> 돌아온 탕아와 이별

“우현 30도, 항구가 보입니다!”

메인 마스트의 견시대에서 신이 난 우르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작 이틀의 항해였지만 그래도 육지가 반가운지 갑판 여기저기에서 일하던 선원들의 시선이 우현에 쏠렸다.

아니다, 그러고 보니 저 곳에는 아마 헤어졌던 선단이 정박해 있을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잃어버렸던 희망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새로 임명받은 이등 항해사로서 선교를 지휘하던 나도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래봐야 내 눈에는 저 멀리 어렴풋이 땅만 보일 뿐이지만...

애초에 선저부터 무려 35m 정도, 상갑판부터 계산해도 25m는 넘는 견시대에서 겨우 보이는 항구가 내게 보일 리가 없다.

게다가 우르타는 시력이 좋기로는 아마 배에서 최고가 아닐까 싶을 정도니까, 아마 다른 선원들도 거의 안보일거다.

“지금 방향을 돌릴까요?”

나는 옆에서 나를 보조하고 있던 알리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음, 딱히 문제는 없어 보이는군. 우현으로 30도 돌리도록 하게.”

알리샤의 대답이 떨어지자 나는 손에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면서 적당히 타륜을 돌렸다.

얼마나 돌아갔는지 표시해주는 디지털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보니, 초보자들은 이렇게 변침을 할 때 방향 잡기가 영 힘들다.

심지어 이놈의 배라는 것은 자동차 핸들처럼 돌린다고 바로 반응하는 것도 아니라서, 내가 타륜을 돌리고 나서 한참 후에나 천천히 방향이 바뀌는 것이다.

더 나쁜 것은 선박의 종류마다 타륜의 한 눈금(원형 륜에 튀어나온 손잡이용 돌기) 마다 돌아가는 키의 각도가 조금씩 다르다보니, 경험이 없으면 방향을 정확히 잡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잠시 후 배가 방향을 적당히 바꾼 후에야 조범수(돛의 방향을 조종하는 선원)들에게 돛의 방향을 약간씩 바꾸도록 지시했다.

다행히 바람이 좌현 후방에서 불고 있어서 돛의 방향은 지시하기가 쉬운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등 항해사, 많이 좋아졌지만 조범수에게 지시하는 타이밍을 조금 빠르게 가져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네. 이 정도면 변침 중에 속도 손실이 심해지거든.”

“아, 네, 감사합니다.”

배의 선회가 끝났는지 느끼기 위해서 감각을 집중하고 있는데 문득 알리샤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친구도 참 선원들이랑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지...”

“네?”

“아, 저기 볼라트 항해사 말이야. 자네만큼 선원들이랑 잘 지내는 것 같아.”

“네... 조금 그런 편이죠.”

알리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제법 낯익은 선원들과 뭐라고 떠들며 크게 웃고 있는 볼라트가 보였다.

그의 원래 소속인 선단 기함 힐레아테에 복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마 그게 전부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 듯 출항 전에 볼라트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 * * * *

- 2일 전 웨던 섬 항구, 이클로나 호 볼라트 개인실 -

어디서 구했는지 새콤달콤한 음료를 한 컵 내어 준 볼라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걱정했는데 다행히 움직이시는데 불편은 없어 보여서 다행입니다. 그래도 당분간은 좀 쉬시는 것이 좋겠어요.”

“네, 뭐, 생각보다는 괜찮습니다. 신체적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거나 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도요, 어휴! 징벌방이라니, 정말 끔찍해요! 전 세상에 그런 것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지 않겠습니까?”

아이고, 갑자기 음료가 쓰게 느껴진다.

굳이 그걸 상기시키는 이유가 뭐야?

“말도 마세요, 더 이상 떠올리기도 싫으니까.”

“아 참! 죄송합니다. 그, 병문안도 제대로 못가고 여러 가지로 미안합니다.”

“아니예요, 바쁘셨으니까 이해합니다.”

사실 조금 서운하기는 하다.

솔직히 볼라트 입장에서는 이 배에서 가장 친했던 사람이 바로 나 아닌가?

내가 더 친하게 생각해서 그런지 몰라도 뭐랄까, 바빴다는 것은 알지만 조금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저도 선장님이랑 일등 항해사님을 말려보고 싶었는데, 아시잖아요? 제 입장이 조금 그런 말을 꺼내기가...”

“그렇죠, 볼라트 항해사님이 그런 일에 대해 발언하시기가 쉽지는 않죠.”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도 이게 너무 마음에 걸려서 말이죠.”

쉽지 않다는 것이지, 일단 이등 항해사로 일도 하고 근무에 대해 수당도 받기로 한 이상 한 마디도 못할 것은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 그걸 내 잣대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거겠지.

어차피 볼라트가 뭐라고 했건 간에 결과가 딱히 달라지지도 않았을 테고 말이다.

“선장님도 참, 그렇게 안 봤는데 엄청 독하시네요. 고작 실수 한번 했다고 이렇게 심한 벌을 내리실 줄은 몰랐어요.”

“아, 네... 그런데 급히 찾으셨다고?”

“아니, 갑판장님이 그렇게 말하시던가요? 급히 찾은건 아니고 그냥 어디갔는지 물어본건데, 하하하! 그래도 꼭 만나서 사과도 하고, 이야기 좀 하고 싶기는 했습니다.”

결국 용건이 없다는 말인건가?

그런데 뭐가 자꾸 신경을 톡톡 건드리는 것이, 대화가 좀 겉도는 느낌인데?

“혹시 뭐, 선장님이 엄청 미워졌다거나, 배를 내린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것은 아니죠?”

“아, 뭐...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부분이고 항해사로 다시 임용한다고 하셨으니 배는 쭉 탈 생각입니다.”

“그래요?! 정말 다행이네요. 아휴, 저였다면 진짜 불 지르고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네?”

“아이고! 농담이죠, 농담! 그만큼 이번에 선장님이 좀 심하셨잖아요?”

아, 테일러에게 의심병이 전염이라도 된건가?

갑자기 볼라트가 의심스럽게 느껴진다.

혹시 이 사람에게 테일러가 내 속마음을 떠보라고 시킨 것 아니야?

비록 다른 배 소속이기는 하지만, 배에 타고 있는 이상 선장의 말을 거역하기는 어려울테니까.

아닌 척 하지만 뭔가 권력지향형 인간인 편이기도 한 것 같고...

아니다, 어쩌면 볼라트는 이클로나에서 나를 스카웃 할 기회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고작 이등 항해사가 간부급 인력을 임의로 채용할 자격이 되나?

나를 고작 선임 선원으로 쓰려고 스카웃 하려는 것은 아닐 테고...

설마 볼라트가 타던 힐레아테 호도 다른 나라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는 특수 목적 선박인가?

......

이건 좀 아니지! 쓸데없는 망상은 그만두자.

원래 조금 가벼운 사람이었으니, 그냥 단순하게 상급자인 테일러의 흉을 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 * * * *

“리안 항해사!”

잠시 상념에 빠져서 말을 제대로 못 들었던 모양이다.

약간 언성이 올라간 알리샤의 부름에 문득 정신이 든 내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 네! 일등 항해사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가? 변침 중에는 늘 상황을 주시해야 해. 특히 지금처럼 항구 근처는 출입항 하는 선박도 많아서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아직 컨디션이 좋지는 않겠지만 주의하게.”

“네, 죄송합니다.”

“흠, 좌현으로 5도 정도만 틀지. 저 쪽 선박과 너무 가깝게 지날 것 같아.”

내 컨디션을 망하게 하는데 일조하신 분이 그렇게 말하니 기분이 참 거지같고 그렇다.

보통 그 정도 사건이 있으면 좀 미안하고 그래서 당분간은 업무상 질책 같은 것을 하더라도 눈치를 봐가면서 살살 하는 것이 예의 아닌가?

해군이 일도 힘들고 위험하지만 다른 것보다 상급자들의 물리적, 정신적, 언어적 폭력이 해군을 기피하게 하는 주 이유라더니, 내가 그 이유를 이제야 잘 알겠다.

...절대 내가 조함 중 중요한 순간에 딴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이번에 입항하는 클레이들 섬은 이전에 기항했던 다른 섬들보다 더 교역이 활발한 곳인지, 항구 근처에 오자 다른 배들이 제법 보였다.

대부분은 연안 항해용 소형 상선들이었지만, 무려 12척이나 대열을 이룬 원양 상선대도 보였다.

클레이들 섬은 크기는 조금 작지만 향료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섬 중에 하나로, 유일한 교역항인 몬타로 항구는 해열제로 최고의 성능을 보여준다는 약초 멜레스와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견과류 클렛피넛의 집결지로 유명하다.

비슷한 기후와 환경을 갖춘 다른 향료 제도의 섬에서조차 이 두 작물만큼은 제대로 된 품질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까, 전 세계에서 이 두 작물을 원가에 대량으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라고 할 수 있겠다.

세심하게 배를 움직여서 얼마나 나아갔을까?

드디어 내 눈에도 저 멀리 항구의 형태가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보고보다 더 힘찬 우르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항구에 정박한 선박 중 메를리오네! 메를리오네 호, 확인했습니다!”

“힐레아테, 엘리아몬, 피오베르타... 확인했습니다.”

안타깝지만 한 척이 빈다.

우리 선단은 처음 6척으로 출발했으니까 말이다.

사방에서 환호하던 선원들이 우르타의 견시 보고가 의미하는 것을 눈치 챈 것인지, 하나씩 침묵했다.

함께한 시간이 짧았다고는 해도, 동료 선박이 심해의 침몰선이 되어버렸는데 좋아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녀석은 없었다.

* * * * *

우리가 입항하자마자 난리가 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리가 항구에 진입할 때 이미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린 다른 배의 사람들은, 우리가 현문을 설치하기도 전에 부두에 몰려와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계류가 끝나고 현문이 설치되기 무섭게 세 사람이 거의 뛰다시피 배에 올라탔다.

세 사람 중에 가장 빠르게 올라 탄, 특히나 얼굴이 익숙한 사람이 선교에서 내려와 갑판 위에서 기다리던 테일러 앞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선장님... 크흑,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음, 오엔인가? 무사해 보이니 다행이군. 그런데 왜 자네가...”

질문을 차마 마치지 못한 테일러도, 그 질문을 이해한 오엔 부선장도 얼굴이 흐려졌다.

오엔과 함께 올라온 힐레아테와 피오베르타의 선장들도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걸음을 멈추고 침묵했다.

잠시 후, 모두가 예상한 대답이 오엔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펠리엔 선장님은 폭풍에 휩쓸려 사망... 하셨습니다.”

“그래... 아까운 사람이 너무 쉽게 가버렸군.”

“선장님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 그래도 배를 지켜줘서 고맙네. 자세한 보고는 나중에 듣도록 하지.”

생각해보면 메를리오네의 선장이었던 펠리엔은 부상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테일러도 오엔에게 선장대행을 맡겼었지.

그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안고서 배를 타는 것만으로도 무리였을 텐데, 거기에 폭풍까지 겪었으니 살아남았다면 오히려 운이 억세게 좋았다고 해야겠지.

나에게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이라 이렇게 말하기는 좀 그렇긴 한데, 간부급인 사람들이 줄면 줄수록 내가 꼼수를 부리기 편해지니까 나한테는 꽤 기꺼운 일이기는 하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일어날 생각을 못하는 오엔을 알리샤가 부축해서 사라지자, 묵묵히 차례를 기다리던 두 선장이 앞으로 나섰다.

“이클로나가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소. 괜찮은거요?”

“물론, 보시다시피. 이렇게 다시 합류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오.”

“당연히 합류를 환영이야 하지만... 정말 놀랍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자세한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서 합시다.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아, 아, 그럽시다. 우리가 너무 성급했군. 괜찮은 식당을 알아놨소. 그리 갑시다.”

선장들과의 대화를 적당히 마무리 지은 테일러는 나를 잠시 보더니 이내 갑판장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갑판장은 당직자를 제외한 나머지 선원들을 상륙시키게. 배에 상품이 있으니 당직자를 잘 배치해야 할거야.”

“네, 선장님. 걱정마십시오.”

“그리고 볼라트 항해사는 적당한 교역품을... 흠, 그러고 보니 볼라트 항해사도 복귀를 해야겠군. 우리와 함께 가지.”

난간에 붙어서 부두에 모여 있는 다른 배의 선원들과 해후를 만끽하던 볼라트가 갑작스러운 테일러의 동행 명령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편안하게 웃는 표정을 지으며 힘차게 대답했다.

“네! 선장님. 감사합니다.”

테일러와 선장들, 그리고 볼라트가 배에서 내리자 이어서 당직이 아닌 선원들도 하나씩 웃고 떠들며 배를 내리기 시작했다.

개중 몇 명은 다른 배의 선원들과 꽤 친분이 있었는지 그들과 어깨를 감싸며 기뻐하는 것도 보였다.

“그런데 볼라트 항해사 말이야.”

“어우, 깜짝이야! 언제 왔어?!”

내가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네이선의 말에 깜짝 놀라자 네이선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까부터 여기에 있었거든? 요즘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니는 거야?”

“그, 그랬냐? 그런데 볼라트 항해사가 왜?”

“아니, 그 사람 엘리아몬 호 항해사였어?”

“응.”

“어?”

“뭐? 아, 미안, 미안. 엘리아몬? 아니야, 힐레아테일걸?”

나도 갑자기 질문을 받아서 잠시 헷갈렸다.

진짜 요즘 뭔가 좀 머리가 둔해진 느낌이기는 하다.

“아니, 그런데 왜 엘리아몬 선원들과 더 친한 것 같지?”

“에이, 설마 그렇겠냐? 아! 아니다. 그거 전에 이야기 들었는데 엘리아몬에 예전에 같은 배에서 친하게 지내던 선원들이 좀 있다더라고. 그래서 그럴 거야.”

“하긴 그 사람, 선원들이랑도 되게 잘 지내지. 항해사 치고는 좀 별나더라.”

“그러게. 좀 별나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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