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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72화 (72/420)

<72화> 그가 돌아온 이유

배를 타는 선원이라 함은 직장이 배라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그 직장이 사내 폭력 난무에 월급은 적고, 강제 숙식제공과 수직적 상하관계, 밤낮을 가리지 않는 작업과 당직... 뭐야, 군대야?

하여간 선원들이라고 무조건 배와 바다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대부분은 육지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선원들에게 입항과 상륙은 퇴근 또는 휴가와 같다.

그러니 추가 수당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정박 중에 당직이라는 것은 굉장히 기피되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당직이 돌아오는 것이 싫어서 그대로 복귀하지 않는 녀석까지 나오겠는가?

당연히 당직표를 쥐고 흔드는 갑판장의 위상은 배가 항구에 얌전히 붙어있더라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간부들은 예외라는 말이지.

당연한 말이지만, 갑판장이 지휘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해병대와 포병대도 역시 예외다.

애초에 상선에 해병대와 포병대가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오늘의 술집에는 우르타가 빠져있는 상태였다.

재수 없게도 오늘 당직에 걸렸거든.

분명히 출항 전에 베이커를 화나게 했던 것에 대한 보복성 인사인 것 같지만 어쩔 수 있나?

나는 이제 일개(?) 이등 항해사에 불과한데 말이다.

유사시 선박의 지휘권 인계 순서는 선장, 부선장, 일등 항해사, 선임 이등 항해사, 다른 이등 항해사, 갑판장 순서고, 명확한 계급이 없는 민간 상선에서 이는 곧 서열과 직결된다.

그런데 뭐, 경력 부족한 이등 항해사나 갑판장이 지휘권을 행사할 상황이면 이미 망한거나 마찬가지라고 봐야지.

이렇게 갑판장의 서열은 가장 낮음에도 불구하고, 갑판장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선장, 부선장밖에 없음은 물론, 일등 항해사 정도나 되어야 제안이나 요청을 빙자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실질적으로 선원들을 관리, 지휘하는 실세가 갑판장인 데다가, 보통 승선 경력만 놓고 보면 갑판장보다 높은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등 항해사가 된 나는 임시 갑판장인 베이커의 명백한 권한에 대해 토를 달 자격이 없었다.

나는 문득 동석한 선원들과 웃고 떠드는 네이선을 보았다.

해병대로 소속이 바뀌고 나서는 다른 선원들과 사이가 약간 서먹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함께 술도 못 마실 정도로 멀어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쩌면 지금 모인 선원들이 다 군인 출신들이고, 명확하게는 몰라도 어차피 자신들이 다시 군에 복귀할 것을 알기 때문에 해병대에 대한 반감이 적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테일러와 이미 틀어진 나에게는 조금 부담스럽다.

그나저나 클렛피넛이라고 했던가?

부유한 평민들은 물론 귀족들도 즐기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이해가 간다.

크기는 땅콩과 아몬드 중간 정도인데, 아삭한 겉과 달리 속은 견과류 치고는 매우 부드럽다.

게다가 씹으면 입안에 퍼지는 진한 고소함과 특이한 향은 정말 중독을 불러올 만 하다.

소금을 약간 넣고 볶았는지 약간의 짭짤함이 섞여서 풍미를 더 끌어올린다.

무려 이 세상에서 처음 느끼는 ‘전생’보다 맛있는 음식이다.

품종 개량이라는 개념도 희박하고 요리기술도 발달하지 못한 곳이다 보니 식재료도, 음식도 솔직히 ‘맛있다’라고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귀족들이 먹는다는 정말 눈알이 튀어나오게 비싸고 이름도 모르는 요리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내가 언제 그런 요리를 먹어보겠어?

이 ‘클렛피넛’도 가끔 항구에서 구경이나 했지, 먹어보는 것은 처음이다.

본토라면 나 같은 월급, 아니 일당쟁이는 손도 못 댈 정도로 비싸거든.

네이선와 은행에 다녀오는 길에 샀는데, 여기서도 약 500g쯤 되는 한 봉지에 무려 600로스(대략 6~7만원)나 줘야했다.

보통 견과류보다 부피에 비해 약간 무겁다는 것을 감안하면, 원산지임에도 충분히 비싼 가격이다.

이러니 본토에서는 일반인이 손도 못 대지...

이번 생이 시작된 이후로 처음으로 황홀함을 맛보는 미각에 집중하고 있는데, 한 선원의 말이 관심을 가져갔다.

“그런데 너희 그 쪽 이야기는 들었나?”

“어디? 다짜고짜 그 쪽이라면 어느 쪽인지 어떻게 알아?”

“메를리오네 말이야.”

“아! 이야기는 들었지. 거기 선장님이 죽었다며?”

“그거 말고! 내가 오는 길에 들었는데...”

정보의 중요함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무려 내가 전생을 살 때 그 때의 시대를 다들 ‘정보화 시대’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나는 왠지 중요한 정보 같아서 그의 말에 관심을 기울였다.

“오는 길에? 어디에서?”

“아, 그, 항해사님이랑 네이선이 은행인가 뭔가 간다고 했을 때 근처에서 옛 동료들 만나서 빠르게 한 잔 했는데 그때...”

“하, 그 사이를 못 참고?”

“내 참, 항해사님 그 은행인가 한번 가면 밥 먹고도 남을 만큼 있다가 옵니다. 우리가 한두번 겪어보나?”

하긴, 은행에서 순번 기다리는 나도 짜증이 나는데 그냥 멍 때려야 하는 다른 사람들은 더 길게 느껴지기는 하겠다.

나는 괜히 무안해져서 클렛피넛 봉지를 살짝 밀어 주었다.

“그래서 이런 것도 사왔잖아. 이야기 계속 해봐.”

“어험, 맛있기는 하네. 그러니까 그 메를리오네에서 선상 반란이 일어났다지 않소?”

“뭐?! 반란?!”

“에이, 너무 놀라지 마쇼, 뱃놈들 허풍이 하루 이틀인가? 내가 들어보니 반란까지는 아니고 그냥 신입 놈들이 불만을 토하다가 한바탕 한 수준인 것 같소.”

“그럼 그냥 소요 사태 정도인가? 그래도 심각한 문제이기는 한데?”

“알잖소? 폭풍에 배는 엉망이지, 선장은 죽었지, 또 누가 하나 더 죽었다던데? 그래서 지휘부는 제 기능 못하고, 갑판장은 신임이니까 만만 했을 것이고... 우리 배도 그렇지만, 그 신입놈들이 또 험한 놈들 아니요? 그러니까 한번 치받은거지.”

물론 마다카트 섬에서 모집한 선원들이 선원과 해적의 중간쯤인 험악한 녀석들이긴 하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그 멍청한 놈들이 상황 파악을 잘못 한 거다.

신임이라고 해도 그 갑판장이 바로 이클로나의 갑판장이었던 사람이거든.

만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거지.

게다가 갑판장이 메를리오네를 처음 탄 것은 맞는데, 어차피 선원 대부분은 제국군 출신이니 그런 소요 사태에서 갑판장을 따르지 않고 어깃장을 놓을 일도 없다.

“결론은 어떻게 된거야?”

“당연히 바로 제압당했지. 뭐, 항해사님도 대충 알겠지만 그쪽이나 이쪽이나 응? 아시잖소? 그런 해적놈들 쯤이야 해장거리도 안되지! 하하하핫!”

“그렇겠지.”

배를 움직이는 것은 서툴지 몰라도 사람 죽이는 전문직(군인)에 종사하던 사람들이다.

아무리 군대처럼 진에 따라 움직이지 않더라도, 백병전이 붙으면 수가 절반도 안 되는 고작 일반인인 반 해적(?)들이 버터 낼 리가 없었다.

“주동자 몇 놈은 꽁꽁 묶어서 고기밥으로 던져주고, 나머지는 채찍으로 맞고 마스트에 매달린 모양이오. 격렬하게 반항한 한 놈은 징벌방에 갔다던데?”

제기랄, 망할 징벌방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튀어나오네.

말하면서 눈치를 살살 보는 꼴이 정확한 사정을 모르니까 나를 놀리려고 일부러 꺼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기서 욱하면 그게 바로 저놈이 원하는 반응이겠지.

“그쪽도 분위기 개판이겠네?”

“에? 음, 그, 그렇죠, 당연한 것 아니겠소?"

반응을 보아하니 역시나 그런 의도였던 모양이다.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다, 어휴...

함께한 선원들에게 딱히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혹시 몰라 술을 자제하며 마시고 있는데, 술집 문이 벌컥 열리면서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잠시 술집을 둘러보며 손님들을 확인하더니 이내 우리를 발견하고는 기쁘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다 온 것인지 얼굴부터 시작해서 온 몸이 땀범벅이다.

“아이고 오펜, 몸도 성치 않은 녀석이 뭐하느라 땀을 이렇게 흘렸어? 여기 물부터 한 잔 마셔.”

“헥, 헥, 감사합니다. 리안 항해사님.”

내가 건네준 물을 들이킨 오펜이 잠깐 숨을 고르다가 말을 했다.

“선장님 명령으로 갑판장님이랑 조리장님이랑 해병대장님이랑 항해사님들...”

대충 간부들을 소집한 모양이다.

“그래, 누구를 말하는지 알겠어. 그래서 선장님이 뭐라는데?”

“아! 그 선장실로 모이시라고 전달하랍니다!”

“지금?”

“네? 아니요! 지금은 아니고 내일 아침이래요.”

“아침 먹자고 부르는 것은 아닐테고, 아침 먹고 오래지?”

“아앗! 어떻게 아셨어요?”

간부 소집만 몇 번을 당했는데 그걸 모르겠니.

그런데 급한 일도 아닌데 얘는 왜 이렇게 뛰어다니는 거야?

“알았어. 그런데 왜 이렇게 급해? 다른 급한 일이라도 있어?”

얼핏 밖을 보니 이미 어두워지고 있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만 해가 지면 배의 일과는 끝이다.

게다가 정박 중에 선원들은 사실상 비급여 상태이므로, 일을 안 시키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다.

“아니요! 그냥...”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데 저렇게 열정이 넘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인간의 열정이라는 것은 무한하지 않아서 어느 순간이 되면 번아웃(burn out)이 올 수 밖에 없는거니까.

적당히, 남에게 피해를 안주고 능력을 인정받는 범위 내에서 요령껏 일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럼 왜 그렇게 뛰어다녀? 어차피 이 시간에 잘 사람도 없고, 급하게 전달할 사항도 아닌데. 천천히 돌아다녀, 괜히 뛰지 말고. 그리고 아직 전달 못한 사람은 누구야?”

“그러니까 아직 못 만난분이...”

오펜이 아직 못 만났다는 사람들이 있을만한 곳을 말해준 뒤, 오펜에게 저녁이라도 사 먹고 돌아다니라며 은화 한 개를 쥐어줘서 내보냈다.

오펜이 문밖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자기들끼리 떠들던 선원 중 한명이 내게 툭 물었다.

“항해사님은 그 아이가 뭐가 그리 좋으십니까?”

“딱히 좋은 것은 아닌데?”

“그런데 되게 친절하시네요.”

“말 몇 마디와 은화 한 개로 사람의 호의를 살 수 있다면 싼 거니까. 나 장사 잘하거든.”

“아, 그래요? 그럼 제 호의도 사가실 의향은... 흐흐흐.”

“닥치고 술이나 마셔, 뭔 개소리야? 네 호의는 상품가치가 없어서 안 사!”

그럴 의도로 받아들인 녀석은 아니지만, 오펜은 내 계획에 상당히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선장의 전속 전령이라는 것은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일단 선장에게 접근하기 매우 쉽다는 점에서 오히려 나보다 나은 부분도 있거든.

그리고 그런 오펜의 호의를 사기위해 약간의 시간과 돈을 들이는 것 정도의 수고는 기꺼이 할 용의가 있다.

왠지 사람을 이용해 먹으려고 위선을 떠는 것 같아서 씁쓸하기는 하지만, 테일러처럼 내가 먼저 신뢰를 저버리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니겠어?

* * * * *

다음 날 술에 취해 쿨쿨 자고 있는 네이선을 버려두고 배로 복귀하자, 현문에서 반쯤 풀린 눈으로 당직을 서고 있는 우르타가 보였다.

“여, 우르타! 힘들어 보이네?”

“리안... 리안이 다시 갑판장 하면 안될까? 베이커 갑판장은 곧 나를 죽여버릴지도 몰라...”

“무슨 소리야? 솔직히 그동안 너무 편했던 거지.”

나는 피식 웃고는 고개 숙인 우르타의 등짝을 툭툭 쳤다.

솔직히 이 녀석 내가 갑판장이라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꿀 좀 빨았다.

대놓고 챙겨준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친구 비슷한 녀석인데 조금 편해도 되잖아?

물론 반대로 내가 갑판장이라고 여러 가지 작업에 차출된 경우도 많지만...

하여간 지금 힘들다고 하는 걸 보면 내가 갑판장일 때 챙겨주긴 했던 것이 맞다.

“나 좀 살려줘...”

“으이구, 조금만 참아, 다음 당직자들 들어올 때 다 된 것 같으니까.”

“진짜? 다, 다행이다. 너무 피곤해.”

우르타에게는 미안하지만 선의의 거짓말을 조금 했다.

아직 다음 당직자들이 들어오는 시간이 되려면 한참은 있어야 할 것 같고, 보통 첫날 상륙한 다음 당직자들은 높은 확률로 지각한다.

선장실에 들어서자 테일러 외에도 일등 항해사 알리샤와 선의 롱베르씨가 이미 자리해 있었고, 의외의 얼굴이 함께 있었다.

“응? 볼라트 항해사님?”

“좋은 아침이예요, 리안 항해사.”

“아니, 여기는 무슨 일로?”

그러자 테일러가 낮은 헛기침을 하며 내게 말했다.

“리안 이등 항해사, 일단 앉지. 여기 볼라트 이등 항해사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다 모이면 이야기 할 걸세.”

“네, 선장님.”

자리에 앉아 사람들과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곧 회의 인원들이 모두 선장실에 모였다.

“이제 다 모였군. 쉬는 중에 소집해서 미안하게 생각하네.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아. 들은 사람도 있겠지만 메를리오네가 제대로 된 운항이 어려울 정도로 엉망인 상황이다. 도저히 고급 인력을 나눌 여유가 없어.”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좌중을 둘러본 테일러가 볼라트를 보고 눈짓하며 말했다.

“현 상황에 대해 선단 기함, 힐레아테 호의 선장님이 깊은 우려를 나타내셨고, 볼라트 항해사의 제안을 따라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로 하셨다. 다시 소개하지, 오늘부터 바흐카덴 항에 입항할 때까지 임시로 우리와 함께 하기로 한 이등 항해사 볼라트일세.”

예상했던 테일러의 소개가 끝나자, 볼라트가 살짝 자리에서 일어서 목례를 했다.

“선장님이 말씀하신대로 제가 당장 빠지면 이클로나도 항해인원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과 친분도 있고 배에 익숙한 제가 이클로나의 항해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당신이 왜 돌아왔을까?

단지 그것이 상황의 합리적인 해결 방안이고 우리와의 친분이 있어서?

세상일이 그렇게 단순했다면 참 좋겠는데 말이지...

겉으로는 웃으며 환영의 박수를 쳤지만 내 마음에는 의심이라는 괴물이 자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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