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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73화 (73/420)

<73화> 완벽한 항해

저 멀리 먼저 항구를 빠져나간 엘리아몬이 보이고, 뒤를 이은 힐레아테도 선회를 마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클로나의 선교를 지휘하는 테일러의 입에서 출항 명령이 떨어졌다.

“이클로나 호, 출항.”

옆에서 대기하던 알리샤와 출항 준비 보고를 마친 갑판장 베이커의 입에서 출항 명령이 반복되고 사방에 출항을 외침과 동시에 이클로나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향료 제도에 올 때보다 한 척 줄어든 다섯 척의 상선단은 이제 향료 제도를 뒤로 하고 본토로 복귀하는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제발 돌아가는 길에는 아무 일도 없기를...

가끔은 기도가 통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지난 8일 동안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일이 없는 항해였다.

얼마나 일이 없었냐 하면, 몬타로 항구에서 출항해서 푸에리오다 제도의 파난 항구까지 도착하기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오펜이 붕대를 푼 일이었을 정도였다.

올 때와 다르게 이클로나의 위치는 대열의 중앙이었기 때문에 앞에 가는 힐레아테만 잘 따라가면 되는 일인지라, 내 항해술 실습에도 꽤 도움이 되었다.

특히 선도함인 엘리아몬의 부드러운 완급 조절은, 항해술에 대해 알고 나서 보니 더욱 대단하게 보였다.

하긴, 향료 제도로 올 때도 선단의 앞뒤와 좌우를 기동하면서 경계를 한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섬이나 항구처럼 고정된 거점이라면 몰라도 상선단은 계속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안정적인 대열을 여전히 유지중인 우리 상선단은 파난 항구에서 하루만 쉬고 바로 출항한 상태였다.

평소였다면 8일이나 항해하고 하루밖에 쉬지 않는다며 징징거렸을 선원들도 이번에는 모두 조용했다.

본토 출신인 선원들이야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향료 제도 출신인 선원들은 소문과 이야기로만 접했던 문명의 대륙에 빨리 도착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호르세 사건으로 분위기가 안좋던 수습선원들도 꽤 배에 적응한 모양이었다.

“여어, 오펜. 요즘 어때?”

며칠 사이에 더 까맣게 타버린 오펜이 종종거리며 뛰어가는 것을 부르자, 나를 보고 한껏 웃으며 대답한다.

“앗, 리안 항해사님! 다들 잘해주셔서 좋아요!”

그러게 말이다.

재수 없게 걸리는 바람에 첫 항해를 시작하자마자 된서리를 맞기는 했다만, 너처럼 첫 항해가 축복받은 경우도 참 드물다.

8일짜리 장거리 항해에 이어 지금 또 6일째 항해중인데 지금까지 제일 높은 파고가 1.5m 수준이다, 세상에.

15일쯤 항해하면 내해의 잔잔한 바다에서도 한 번쯤은 2.5m정도는 보는 것이 정상인데 말이지.

이쪽 바다에 대해 경험이 가장 많은 볼라트도 어제는 술을 마시며 신을 찾았을 정도로 완벽한 항해였다.

선교 지휘도 적당히 익숙해져서 그런지 이제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졸리다.

갑판장인 베이커씨가 선원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더니 볼라트의 개인실 문을 두드리는 것이 보였다.

요즘 묘하게 볼라트가 베이커와 친하게 지내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뭐, 사실 항해사도 갑판장과 친해지는 것이 좋기는 하다.

선교 당직자야 일등 항해사 알리샤가 정하지만, 그 당직 시간에 자신과 잘 맞는 선원을 배치시켜 주는 것은 갑판장이니 말이다.

그것 외에도 자잘하게 갑판장과 친해야만 편해지는 부분들이 많기는 하다.

이 전까지는 볼라트가 정식으로 우리 배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서 약간 열외자 느낌이 강했지만, 확실히 우리 배에 소속된 이상 갑판장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맞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갑판장일 때에도 묘하게 나랑 친하게 지냈었구나?

* * * * *

- 마다카트 섬 항구 기항 하루 전, 이클로나 호 선교 -

내가 당직 교대를 위해 선교에 오르자, 한 쪽을 망원경으로 유심히 바라보던 볼라트가 나를 보고는 씩 웃으며 망원경을 넘겼다.

오자마자 무슨 일이람?

전 당직자에게 상황을 인수인계 받는 것은 기본중에 기본이기 때문에 나는 군말 없이 망원경으로 볼라트가 바라보던 방향을 보았다.

“배네요. 두 척이군요.”

“기억나죠? 그 때 그 해적들.”

“아! 당연히... 설마 저놈들이?”

나는 다시 유심히 망원경으로 멀리 있는 두 척의 선박을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사실 잘 모르겠다.

“그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적입니다.”

“네에?! 그걸 어떻게...?”

내 말에 볼라트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더니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멀어서 흘수선은 잘 안보이지만, 지금 거의 1시간째 저 놈들 진행 방향이 저희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저희와 진행 방향이 같으려면 상선이거나 해군이어야 겠죠?”

“뭐, 그렇겠죠?”

“물론 해군일 수도 있지만... 이쪽에 다니는 해군 함대들은 최소 다섯 척 이상으로 몰려다닙니다. 상선대도 마찬가지구요.”

하지만 우리처럼 안 좋은 경우도 있지 않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생기기 마련이다.

“상황이 절박하면 두 척으로도 요행을 바라고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요? 보아하니 주 항로랑도 약간 어긋난 것 같구요.”

“뭐, 그렇기는 한데 진짜 그런 상황이라면 절대 저쪽으로는 안갈겁니다. 저 위로는 그 악명 높은 발바라스 제도고, 거기에서 영업 나오는 해적선들이 통과하는 곳이거든요.”

해적들이 자신이 해적임을 숨기고 일반 항구에도 기항하고 한다지만, 솔직히 전업으로 해적질하는 녀석들은 보통 항구는 들어가기에 걸리는 것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쓸 만한 섬들은 모두 나라의 행정력이 미치다보니 해적들이 마음대로 다닐만한 곳은 제대로 된 섬이라기 보다는 작은 섬들이 모여 있는 제도였다.

장점은 두 가지, 하나는 국가에서 군사력과 행정력을 동원해 점령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첫 번째, 두 번째는 작은 섬들이라고는 하지만 선박 몇 척이 숨어들기에는 충분한 크기의 섬들이 수 백개나 모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유명한 제도가 몇 군데 있는데, 그 중에 서해 항로 근처에 있는 제도는 두 곳이다.

하나는 해적 제도라는 이명으로 더 유명한 에스피온사 제도, 두 번째가 바로 방금 언급된 발바라스 제도였다.

굳이 따지면 향료 제도나 푸에리오다 제도에도 해적들이 있기는 한데, 거기는 해적보다 교역품이나 필수 기항지로 더 유명하니까 일단 빼자.

아마 마다카트에서 전 총독이 끌어들였던 해적들도 이 발바라스 제도 출신 해적들이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볼라트 항해사는 전에도 그렇고 해적에 대해서 꽤 박식한 것 같다.

서해 항로를 여러 번 다니다보니 이쪽으로 특화 된 모양이다.

모든 것이 잘 정리된 문서가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해적들에 대해서는 진짜 몸으로 배우는 수밖에 없다.

해적들의 세력 분포나 이런 것들은 바뀌는 속도가 어마어마해서 누군가 그걸 문서로 만들 엄두도 못 낸다고 들었다.

그러니 기회가 될 때 최대한 많이 알아두는 것이 좋겠지.

“그럼 지금 조금 위험한 것 아닙니까? 갑판장을 호출할까요?”

“아니예요, 안 그래도 그건 갑판장과 이야기 했죠, 저 놈들 못 덤빌 겁니다. 아쉬워서 쫓아오기야 하지만 딱 봐도 만만치 않은 엘리아몬이 선두에 있고 이클로나와 후미의 메를리오네도 쉽지 않아 보이니까요.”

“그래도 혹시 저번처럼 반대쪽에서 다른 녀석들이 합류해서...”

“네, 확실히 리안 항해사는 습득이 빠르네요. 다 아시니까 별 말 안하겠습니다. 이쪽에 너무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다른 쪽에 신경을 더 쓰세요. 어차피 다른 배들도 충분히 경계하고 있겠지만 말이죠.”

그 외에 몇 가지 사소한 인계 사항을 전달한 볼라트는 내 어깨를 두어번 두드린 후 선교를 내려가서 마침 지나가던 갑판장과 웃고 떠들며 멀어져갔다.

이야기를 대충 들어보니 당직이 끝났으니까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하는 모양이었다.

무슨 놈의 술을 대낮부터 마시겠다는 것인지.

그보다, 아무리 별 위험이 없어보인다지만 갑판장 저 사람은 좀 긴장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 상황에서 술을 마시겠다고?

긴장한 내가 무색할 정도로 우리 선단 근처, 아니 솔직히 근처도 아니고 멀찍이서 얼쩡거리던 두 척의 선박은 곧 욕심을 버렸는지 떠나가 버렸고, 이후로도 몇 번이나 해적으로 추정되는 선박들이 접근했지만 곧 멀어졌다.

하긴 해적들이 눈에 보이는 대로 상선을 공격했다면, 그 항로를 다니는 상선이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몇 번은 ‘위험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몇 번이나 볼라트에게 교육받은 성과가 있어서인지 큰 실수는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음... 사실은 딱 한 번, 왼쪽에 나타난 해적선 의심 선박 세 척을 경계하다가 후방에서 접근하는 일곱 척의 선박을 보고는 놀라서 일등 항해사 알리샤를 호출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갑판장에게 전투 배치를 시키는 멍청한 짓 까지는 가지 않았다.

왜 멍청한 짓이냐고?

후방에서 접근한 일곱 척은 선두와 후미의 호위함을 제외한 나머지는 둔한 대형 상선으로, 어딜 봐도 해적일 수 없는 선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뒤에 선단 소속 선박이 두 척이나 더 있는데 뒤에서 접근하는 배에 혼비백산한 것은, 내가 생각해도 좀 창피하기는 하다.

둔한 대형 상선이 우리를 추월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둔하다고 말한 것은 가속과 선회 능력이 떨어진다는 뜻이지, 속도가 느리다는 뜻은 아니다.

* * * * *

오래간만에 함께 여유를 부리게 된 우리 셋은 뱃전에 기대어 가까워지는 항구를 구경했다.

“결국 아무 일도 없이 여기까지 와버렸네.”

“진짜... 이번에는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을 수 있나 싶을 정도였지.”

“응! 보통 이럴 때 쓰는 말이 폭풍전야 맞지?!”

“입 대, 이 자식아!”

우르타, 제발 그 입 좀 다물면 안되겠니?

네이선이 우르타의 입술을 한 번에 잡아서 주욱 당기는 것을 보며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어라? 그런데 저기 왠지 낯익은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마다카트 항에 입항하자 애증의 얼굴이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이렇게 다시 얼굴을 보게 되어 기쁘군요, 리안 보좌관.”

“미르바프 대위...”

“이런, 전 이제 대위가 아닙니다. 마다카트 수비대 부대장, 미르바프 중령입니다.”

무슨 계급이 몇 달 만에 두 단계나 올라가?

내 어이없는 표정이 겉으로 드러난 모양이다.

자랑스럽게 견장을 강조하던 미르바프가 슬쩍 웃으며 변명했다.

“대충 때가 되기는 했지만, 본국에서 이미 소령 진급을 확정한 상태였나봅니다. 그 이후에 반란 진압 소식이 전해졌고, 보시다시피 소령 계급장을 달아보지도 못하고 바로 중령을 달아버렸군요. 다 리안 보좌관 덕분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을 고생을 한 대가로 당신은 두 계단 진급이라는 초유의 대박을 맞았고, 나는 당신이 계속 부르는 그 보좌관 자리를 잃었네?

정말 세상은 지독하게 불공평하다.

“어, 그래요. 오래간만인데 신수가 아주 훤해지셨군요, 미르바프 중령님.”

“다 보좌관님 덕분이죠. 가시죠, 지금은 여유가 있으니 제가 거하게 한 번 사겠습니다.”

“저 보좌관 아닙니다.”

“네?”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던 미르바프가 의외의 내 반응에 순간 갈피를 못 잡고 얼굴이 굳었다.

에이, 관두자. 내가 이 꼴이 된 것이 이 사람 잘못도 아니고... 거하게 쏜다는데 굳이 빈정거릴 것도 없잖아?

“저 이제 이등 항해사거든요. 앞으로 항해사라고 불러주십시오.”

“아! 항해사가 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가시죠, 이미 부하들을 시켜서 자리를 잡아놓으라고 했습니다.”

“네에, 그, 중령님도 진급 축하드립니다. 당황스러워서 축하 인사가 늦었네요.”

나는 뒤늦은 축하인사를 건넨 뒤, 내 뒤에 따라오는 우르타와 네이선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저 애들도 데리고 가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이왕이면 그때 그 항해사님도 함께 가시죠?”

“아, 볼라트 항해사요? 잠시만요.”

잠시 선원들을 시켜 볼라트를 찾으라고 했지만, 곧 이미 내렸다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뭐가 이렇게 빨라?

내가 미르바프와 인사하던 곳이 현문에서 고작 2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 언제 지나간 거지?

미르바프를 분명히 봤을 텐데 인사도 안하...

아, 볼라트도 딱히 미르바프를 좋아할 이유가 없기는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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