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왕 서방과 재주부리는 곰
유쾌한 파티였다.
미르바프 대위, 아니 중령은 시간이 지나 많이 미화된 그 날의 기억이 완전히 날아갈 정도로 최선을 다해 우리를 챙겨주었다.
분위기 좋은 고급 술집을 통째로 빌려서 클랫피넛으로 깨어나버린 내 미각이 만족할 정도의 음식을 무제한으로 내어 놓았고, 제법 깊이가 느껴지는 연주를 하는 악단을 불러서 연주를 시켰다.
내가 술에 취해 마구 흥얼거리는, 이 세상에서는 생소한 전생의 노래들에 맞추어 반주를 넣을 정도로 실력 있는 악사들이었다.
검이나 싸움으로는 져도 허허 웃지만, 술에 관해서라면 절대 지려고 하지 않는 네이선이 행복함에 취할 정도로 좋은 술이 쏟아졌고, 시중드는 아가씨들도 전생의 고급 술집이 생각나게 할 정도였다.
오해는 금물이다.
내 말은 손님의 대화를 잘 받아주고 즐겁게 해주는 스킬이 대단했다는 뜻이다.
우르타는 뭐했냐고?
우르타는 다 좋아했다.
음식을 먹고 물개박수를 치며 좋아했고, 처음 마셔보는 고급술을 마시고는 한 병만 싸가게 해달라고 미르바프에게 졸랐다.
첼로 비슷한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끝내 악기를 연주하게 해달라고 해서 우리의 귀를 괴롭게도 했으며, 재질이 궁금한 푹신한 소파를 진지하게 관찰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가씨들이 좋아했다.
......
그래, 우르타가 아가씨들을 좋아한 것이 아니고 아가씨들이 우르타에게 뭐하나 주지 못해서, 옆에 앉지 못해서, 말 한마디 걸지 못해서 아주 그냥 난리를 치더라.
정말 짜증나는게 뭔 줄 알아?
우르타 저 자식은 하루에 8시간쯤 땡볕 아래에 있고,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을 제일 많이 맞는데도, 피부가 전혀 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펜을 우르타 크기로 키우면, 우르타가 더 어려 보일 지경이다.
이 정도면 뭔가 우리와 같은 종족이 맞는지 의심해야 하는 것 아닐까?
약간의 불만이 남기는 했지만 그렇게 즐거운 광란의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밝았다.
그리고 즐거웠던 한 때에 대한 후유증은 너무나 컸다.
“이게 이렇게 맛없는 음식이었나...?”
“말도 마. 난 이게 술인지 오줌물인지 잘 모르겠어...”
“너는 이 와중에 술이 또 입에 들어 가냐?”
“술이 아니라니까...”
네이선과 헛소리를 주고받던 나는 문득 어젯밤 유일한 불만(?)의 원인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우르타는?”
“오줌은 안마셔봤지...”
“오줌 말고 우르타 이 자식아.”
“어? 우르타? 너도 한번 가봐. 3층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 방이야.”
좀비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네이선의 말을 따라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던 나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아, 내가 왜 진짜 여기를 올라가는 거지?”
어이가 없어서 육성으로 속마음을 내뱉은 나는, 고작 다섯 개 정도 남은 계단을 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3층까지 고작 다섯 계단을 남겨두고 되돌아가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혹시나 해서 노크를 해봤지만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그래서 문고리를 잡아챘더니 아무런 저항 없이 문이 열리며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절로 신을 찾게 되는 풍경이었다.
원래 침대 위를 점유하고 있어야 하는 이불과 베개는 비참하게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고, 2인용으로 제작된 침대 위에는 2인은 확실히 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완전히 살색으로 도배된 것은 아니지만, 잠자리에서나 입을 법한 얇거나 면적이 아주 작은 옷들만이 눈에 띄었고, 그마저도 없는 사람이 절반이었다.
그리고 그녀들 가운데에 입을 헤 벌린 채 꿀잠을 자고 있는 우르타의 얼굴이 보였다.
네이선이 왜 그냥 왔는지 알 것 같았다.
나도 차마 그 자리에서는 우르타를 부를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까.
쓸데없는 광경을 뒤로 하고 털레털레 내려오는 나를 보더니 네이선이 낄낄거리며 웃었고, 그걸 빌미로 나는 네이선의 뒤에서 헤드락을 걸었으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한참을 투닥거리다가 다른 손님들의 항의가 전달되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각자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여자가 없으면 어떤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배 위의 거친 해먹이나 비좁은 침대 대신에 단단히 고정된 고급 침대가 있는데?
그래서 우리가 다시 모인 시간은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르고,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조금 늦은 애매한 시간이었다.
다만 술자리를 시작하기 좋은 시간은 ‘하루 종일’에 해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술을 마시기로 하고 자리를 옮겼다.
미르바프가 우리에게 잡아준 숙소는 음... 우리 같은 서민들이 지내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고작 중령이 어떻게?’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어제 들은 말로는 지금 쿠샤 왕국에서는 총독과 수비대장 임명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재 마다카트 섬의 최고 권력자는 수비대 부대장인 미르바프인 셈이다.
죽을 고생은 내가 다한 것 같은데 솔직히 이정도 대접은 받아야 좀 덜 억울하지.
* * * * *
“나 분명히 얼마 전에 저 풍경 본 것 같은데, 왜 내 하루가 없어진 기분이지?”
내가 창문 밖으로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노려보며 중얼거리자, 우르타가 좋다고 낄낄거린다.
꽤 오래 함께 지낸 것 같은데도 저 녀석의 개그 코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도대체 어느 부분이 웃기는 거냐?
우르타의 웃음이 잦아들 때 쯤, 독한 데킬라 계열 특산주를 마시던 네이선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나 내일 아침에 복귀해야 해.”
“뭐? 여기서 3일 쉰다고 했는데? 굳이 내일 아침에?”
“어, 낮에 오펜이 왔다갔는데, 대장님이 내일까지 집합하라고 했대.”
“그래? 그럼 뭐, 미리 인사하자. 잘 들어가.”
내가 놀리는 말투로 손을 살살 흔들자 네이선이 혼잣말을 궁시렁거렸다.
“아, 왜 항해사들은 정박만 하면 할 일이 없나 몰라...”
“그러게! 불공평해, 진짜!”
불퉁한 표정으로 우르타도 투덜거렸다.
이 녀석도 내일 오후에는 복귀해야한다. 당직이거든. 흐흐흐.
그나저나 오펜이 제일 어려서 그런지 항구에서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말은 전달하는 일은 대부분 오펜에게 떨어지는 느낌이다.
귀찮기는 하지만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라서 오펜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잘 모르겠다.
다음에 물어봐야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늘 그렇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은 5분 뒤도 모르는 거고, 오펜에게 질문할 기회는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찾아왔다.
정확히 5분 정도 지났을 때 술집의 문이 열리며 오펜이 모습은 드러낸 것이다.
“어? 여기 계셨네요, 리안 항해사님!”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떨떠름하게 오펜을 맞이했다.
“그, 그래, 오펜. 오늘 많이 바쁜 모양이구나? 이런 일은 너만 하는 것 같다?”
“괜찮아요! 새로운 항구를 돌아다닐 수도 있고 좋거든요. 워트 형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구요. 아 참! 항해사님, 선장님이 호출하셨어요.”
맡은 일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기는 한데, 앞으로 너에게 나쁜 소식(?)을 자주 듣게 생겼구나...
“그래... 하필이면 지금?”
“네!”
나는 테이블을 두들기며 미친 듯이 웃어 재끼는 우르타와 네이선을 보며 처연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굳이 이 타이밍에?”
“네?”
“아니다, 내가 마지막이니?”
“아니요! 처음이요!”
그래, 아무런 고민이 없는 소년이여, 넌 해맑아서 참 좋겠다.
“어... 알겠으니까 이만 가봐...”
“네!”
인사를 꾸벅 한 오펜은 잰 걸음으로 술집을 나섰다.
“아이쿠! 리안 항해사님! 빨리 복귀하셔야 하는데 이 술은 제가 마시겠습니다! 흐흐흐.”
“리안 항해사님! 어서 복귀하셔야지요? 히히힛, 남은 음식은 저희가 처리할테니 계산만 하고 가세요!”
“......”
* * * * *
하필이면 타이밍이 그래서 놀림을 당하기는 했지만, 호출을 받고 뭉그적거릴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이클로나로 향했다.
한참 걸어가고 있는데, 뒤쪽에서 타닥거리는 뛰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뒤를 돌아보니 볼라트 항해사가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 리안 항해사, 지금 복귀하는 길입니까?”
“네, 볼라트 항해사님. 근처에 계셨나봐요?”
“그런 모양입니다. 어제는 그 사람과 보내셨다구요? 선원들이 이야기 하던데...”
“미르바프 대위, 아니 중령이요? 일전의 일을 사과한다고 해서 말이죠, 안그래도 항해사님도 찾던데...”
그러자 볼라트가 보기 드물게 얼굴을 확 찡그리며 말했다.
“어휴! 전 싫습니다. 그 사람 얼굴도 보기 싫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려요.”
그런데 당신은 그날 제일 고생 안한 사람이잖아...
갑자기 생각났다. 그때 그 표정.
내가 그날 당신에게 복귀 및 내용 전달을 안 시켰으면 아마 제대로 일냈을 걸?
우리가 도착하고 30분 쯤 지났을까?
선장실에 간부 전원이 집합했다.
포병대장 미겔이 약간 술 냄새를 풍기고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양호해 보였다.
“늦은 시간에 소집을 해서 미안하네. 오늘 회의에서 엘리아몬 측의 요청으로 기항 기간을 5일로 늘리기로 했네. 그러니까 9월 29일에 출항하겠군.”
배라는 것이 늘 정비가 필요한 것이라 가끔 출항 일정이 밀리는 경우가 있으니까 특별한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이 본토로 복귀하기에 바람이 좋은 시기의 마지막 때라 굳이 간부들을 소집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일등 항해사 알리샤는 일정 자체가 밀린 것이 짜증나는 모양이었다.
“무슨 이유라고 합니까?”
“음, 그쪽에서 내세운 이유는 키와 타륜의 연결축 쪽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네. 하지만 분명히 몬타로 항구를 출항하기 전에 충분히 점검할 여유가 있었을 텐데...”
몬타로 항구라면 우리가 상선대와 만난 항구로, 무려 보름 전에 기항한 항구다.
배를 구성하는 주 재료인 나무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도 안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충격과 외압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피로도가 쌓여서 한 순간에 맛이 가버릴 수도 있다.
물론 지속적인 점검과 부품 교체로 이런 상황을 최대한 막기는 하지만, 갑작스런 문제의 발견 정도는 허용범위 안쪽이라는 뜻이다.
진짜 편집증적 성격이상이 생긴 것인지 자기처럼 철두철미 하지 못하면 참지를 못하는 것인지... 어휴, 어쩐지 갈수록 밉상이다.
볼라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때부터 보름이나 흘렀으니 충분히 이상이 생길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급한 일이 있으신 것도 아니고 선장님이 이해하시지요?”
“음, 다른 것보다 풍향이 바뀌는 것이 걱정이 되네만... 자네가 곧 풍향이 바뀌는 시기라고 하지 않았나?
“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통 10월 보름을 전후해서 풍향이 바뀌기는 합니다만, 조금 빨리 바뀐다고 해도 우리 선단은 이미 거의 도착할 시기라서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겁니다.”
볼라트의 말이 끝나자 잠시 고민하던 테일러는 조리장에게 식료품과 식수를 조금 더 확보할 것을 명령했고, 해병대장과 포병대장에게 무장과 전투 준비에 최선을 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배라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평소보다 더 많은 보급품을 싣게 생겼으니, 당분간 선원들은 꽤나 불편하겠다.
“마지막으로, 볼라트 항해사가 일전에 말한 것과 같이 가장 위험한 순간은 본토에 도착하기 직전이다. 심지어 우리 선단은 한 척이 줄어들어 전력이 감소했지. 분명히 이곳 마타카트에도 해적 제도에서 나온 첩자들이 있을테니 우리는 이미 노출된 것으로 봐야한다. 모두 전투 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이상.”
선장실을 나오며 무심코 옆에서 걷던 볼라트에게 물었다.
“생각해보니까 우리쪽 정보가 새는게 확정적이면 최대한 빨리 움직이는 쪽이 해적들에게 안걸리는 방법이겠죠?”
“글쎄요, 해적 제도의 해적들은 굳이 정보가 없더라도 정탐선을 운용합니다. 고작 출항 일을 빠르고 느리게 한다고 영향을 받지는 않아요.”
“아... 그렇다면 최대한 준비하는 방법밖에는 없네요.”
“하하하, 지금처럼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보다 아직 시간이 애매한데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시죠?”
* * * * *
볼라트에게 얼떨결에 끌려가서 갑판장을 비롯한 선원들과 술을 마시고, 메를리오네 사람들에게 초대를 받아서 술을 마시고, 우르타가 같이 안 놀아 준다고 투정부려서 술을 마시고, 일등 항해사가 기분 풀어준다고 불러서 술을 마시고, 미르바프가 아쉽다고 불러서 술을 마시고...
“어우, 죽겠다. 배타는 놈들은 다 술병 걸려서 간암이나 위암으로 죽을거야.”
“리안, 그게 무슨말이야?”
“어? 우르타냐? 왠일이야?”
“너 당직 설 시간인데 왜 안나오냐고 일등 항해사님이 가보래.”
“이런 젠장!”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나가려는데 우르타가 따라오지 않고 침대 밑에서 끙끙거리는 것이 보였다.
쟤는 또 왜 저래?
“왜? 뭐하는거야?”
“아앗! 잡았다!”
침대 밑에서 손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선 우르타가 손에 든 것을 내밀며 물었다.
“리안, 이거 뭐야? 엄청 이쁘네?!”
“어, 시발, 그게, 아니, 거기 왜 있는지를 떠나서, 도대체 뭔데?”
“어? 어?”
나는 재빨리 우르타의 손에서 그 물건을 낚아채어 살펴보았다.
주둥이가 좁은 손바닥보다 약간 작은 유리병에 새하얀 알약이 가득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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