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일단 약에 대한 궁금증은 접어두고, 약병을 궁금해하는 우르타는 내쫓고, 그놈의 약병을 방 안에 잘 숨긴 다음 선교로 달려갔다.
알리샤는 시간을 못 지키는 것을 꽤 싫어하는 편이라 벌써 표정이 영 안 좋다.
“리안 이등 항해사!”
“죄송합니다, 일등 항해사님.”
“...휴, 몰골을 보아하니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군. 앞으로는 주의하게.”
나를 폐인으로 만든 범인 중에 한 명이 본인이다 보니 한번 봐주는 모양새다.
5일 내내 술을 퍼마셨으니, 정상일 리가 있겠냐고?!
그건 그렇고 알약의 정체가 뭘까?
일단 형태는 전생에서 자주 보던 공장에서 찍어낸 일정한 크기의 알약인데... 얼핏 봤을 때 표면이 매우 밋밋했다.
보통 흰색 알약이면 형태가 특이하거나 표면에 영문이 찍혀있거나 그렇잖아?
그런데 그런게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약사나 의사가 아닌 이상에야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약의 정체를 알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약을 주려면 설명서를 같이 주던가!
랜덤으로 나오는 아이템(?)에 명확한 규칙이라도 있으면 유추라도 할 텐데 지금까지 규칙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못 찾았으니 난감할 뿐이다.
당장 필요한 약이라면 숙취해소제인데 설마 아니겠지?
최악의 경우를 꼽아보면 숙취해소제, 멀미약, 소화제, 일반 진통제, 건강 보조제가 되겠다.
숙취와 멀미는 죽을 것 같지만 결코 죽지 않는 이상한 병(?)이고, 소화제와 건강 보조제는 대체제가 충분하다.
일반 진통제는 유용하기는 할 것 같은데, 그 정도로 해결될 통증이면 솔직히 목숨이 걸린 문제는 아니다보니 애매한 부분이 있다.
베스트는 아무래도 항생제와 마약성 진통제겠지.
그 외에 정말 필요하고 이곳의 의술로 해결이 불가능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겠지만, 그 정도 전문적인 분야로 가면 그 효과를 찾아낼 확률이 너무 낮다.
고민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니까 일단 접어두자.
정 안되면 몸 아픈 사람들에게 하나씩 먹여보지 뭐.
그나마 괜찮은 의사인 닥터 롱베르도 대놓고 불법 임상 실험(?)을 하는 판인데, 나도 좀 하면 어때?
나는 정체불명의 약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주변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어차피 바다는 견시수들이 살피고 있을테니, 내가 살펴보는 쪽은 갑판쪽이었다.
갑판 쪽을 왜 살피나 싶겠지만, 출항 전에 배웅을 나온 미르바프의 섬뜩한 경고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 * * * *
- 출항 30분 전, 이클로나 호 앞 부두 -
미르바프는 퀭한 나를 보고 약간 민망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하하, 어제 너무 과하게 드신 것 같습니다? 안색이 안좋습니다.”
“아, 네... 우웁!”
어우, 잘못하면 토할 뻔 했다.
어제 그 난장판을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와...
내가 겨우 속을 다스리고 제대로 서자, 한 발짝 뒤로 물러섰던 미르바프가 손을 내밀었다.
“오늘 고생 좀 하시겠네요. 그보다 이렇게 헤어지면 앞으로 보기 힘들겠군요?”
“서해 항로를 다니면서 이곳을 안 거칠 수가 없으니 볼 수 있지 않겠어요?”
다시 올지 안 올지는 모르지만 굳이 이야기 할 필요는 없겠지.
내가 손을 맞잡으며 대답하자, 그는 손을 흔들며 웃었다.
“하하하, 어제 이야기 했는데 기억이 안 나시나 봅니다. 저 함상 근무로 발령을 신청했습니다. 아마 이쪽 인사가 해결되는 대로 함대로 발령 받을 것 같습니다.”
“어? 해군이었어요?”
“네, 마다카트 수비대는 전원 해군소속 육전대입니다. 저는 항해사 자격도 있구요.”
“아... 그럼 뭐, 오며가며 한 번씩 볼 수도 있겠네요. 전 이만 가볼... 헉!”
미르바프에게는 내가 퍽이나 고마운 사람인 모양이겠지만, 사실 나한테는 그리 의미 있는 인연은 아니었다.
솔직히 이번에 이렇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물질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다면 나에게는 악연에 해당한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보니 다시 못 본다고 해도 별 감흥은 없어서 내가 이만 손을 놓고 작별하려는데 갑자기 그가 내 손을 확 당기며 가깝게 붙었다.
그리고는 내가 당황해서 어버버 하는 사이에 빠르고 낮은 어조로 말했다.
“방금 들어온 정보인데, 최근 해적 제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아마 그쪽 선단에 첩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 나간 선단도 있기는 하지만, 해적들이 노리기엔 너무 크거든요. 이걸로 목숨 값은 갚은 것으로 합시다.”
말을 마치고 바로 나를 밀어낸 그는 크게 웃으며 내 손을 놓았다.
“부디 무탈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 * * * *
첩자, 첩자라...
사실 선단의 구성원이 너무 많이 바뀌는 바람에 첩자를 특정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막말로 우리 배 뿐만이 아니라 다른 배들까지 새로 모집한 선원들 신상을 전수 검사를 해야 할 판인데, 그게 가능하지도 않고 숨기려고 마음먹으면 신상 숨기는 것이야 일도 아니니까.
오히려 해적들의 공격은 지금 선단 대부분의 사람이 예상하고 있으니, 특별한 위협은 아니다.
이전에 6:11의 전투에서처럼, 피해가 너무 커지면 해적들이 먼저 내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까 ‘위험하지만 도전할만 하다’ 정도의 생각이랄까?
하지만 첩자는 조금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단순하게 이쪽의 정보만 전달하는 정도면 몰라도 전투 중에 키를 망가트리거나, 화약을 폭파시키거나, 돛을 망가트리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만약 그런 첩자가 여러명이고 여러 선박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을 터뜨리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그런데 뭐, 첩자가 ‘나는 첩자’라고 이마에 써 붙인 것도 아니고... 그냥 걱정만 할 뿐이다.
처음에는 테일러에게 이야기를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괜히 나 같은 피해자만 양산할 것 같아서 포기했다.
그리고 누구인들 이 상황에서 뾰족한 수가 있겠어?
굳이 방법이라면 항로를 벗어나서 우회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항로를 벗어난다는 것은 자동차가 도로를 벗어나는 것과 비교가 안 되는 위험한 일인 만큼 일개 항해사의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근거로 항로를 벗어날 것 같지는 않다.
그 때 배가 살짝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응? 배가 좀 흔들리네? 조타수, 지금 몇도 잡고 있어?”
“네? 어, 095도입니다, 항해사님.”
앞쪽의 힐레아테와의 거리와 방향을 확인하고는 지나가는 선원을 붙잡았다.
“어이, 가서 파고 좀 보고와.”
내 말을 들은 선원은 현측으로 쫄래쫄래 가서 바다를 확인하더니 소리를 질렀다.
“파고 2m입니다! 더 거칠어질 것 같은데요?”
2m정도면 아직 위험 수위는 아니다.
그리고 하늘을 살펴보니 구름이 몰려드는 상황은 아니라서 폭풍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준비는 해야지.
나는 파고 보고를 마치고 볼일을 보러 가던 선원을 다시 불러 세웠다.
이번에는 가볍게 궁시렁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잠깐! 오틴이었지? 가서 갑판장 좀 불러와. 아, 입술 삐죽이지 말고!”
“에이, 솔직히 그런 건 좀 애들 시킵시다. 애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이 나이에 갑판장 찾아서 배를 뒤져야겠수?”
본인은 30대 초반이라고 우기는데 내 눈에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오틴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긴 이런 잡일은 보통 애들(수습 선원)에게 시키는 것이 맞기는 하다.
내가 누구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게 되었을 때 이 배에 수습 선원이 없어서 영 익숙하지 않을 뿐.
“아, 그런가? ...그럼 가서 애들 시키면 되잖아! 내가 애들 찾으러 다녀?”
생각해보니까 내가 심부름 시키러 선교를 떠나는 것도 웃기잖아?
앞으로는 선교 옆에 전령으로 쓸 수습 선원을 한명씩 당직으로 붙이는 것을 건의해 봐야겠다.
애들도 하루 종일 힘든 일만 하느니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되는 당직시간을 꽤 반길거다.
“아이고, 알았수다.”
10분 정도가 지나자 갑판장 베이커씨가 선교로 와서 고개를 까딱했다.
“리안 항해사, 부르셨다고?”
“아, 갑판장님. 지금 파고가 좀 그래서요.”
“오면서 확인했소. 2.2m정도 되는 것 같던데.”
“그러게요, 조금 거칠어지는 느낌이라.”
베이커는 하늘을 한참 노려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직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데... 어떻게, 폭풍 항해 준비합니까?”
“아니요, 저도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고, 갑판장님이 미리 주의해서 살펴주시라구요. 상황이 변하면 먼저 조치하고 선교에 알려주셔도 됩니다.”
“그럽시다, 그 외에 더 시키실 일이라도?”
나는 베이커를 구석으로 살짝 이끌고는 조용히 물었다.
“요즘 선원들 사이에 이상한 일이나 이상한 선원 없어요?”
“엥? 그게 무슨 말이요?”
“아니,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겠네. 항해사님이 뭐 들은거라도 있수?”
“아이고, 아닙니다. 혹시라도 문제가 있으면 사소한 일이라도 말 좀 해줘요.”
“뭐, 그럽시다.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이오?”
“아니요, 마지막이라니까 영 불안해서 그런가봐요.”
다행스럽게도 베이커가 떠나고 다음 당직자인 볼라트가 올때까지 폭풍으로 바뀐다거나 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어두워지기는 했지만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바람과 파도가 조금 세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이야깃거리도 안 되는 일이었다.
“특별히 전달하실 사항은 없어요?”
“파도가 좀 거칠었는데, 해지면서 점점 가라앉는 중이예요. 그래도 아직 2m 가까이 되는 것 같으니까 신경을 쓰시는게 좋겠어요.”
“그러죠.”
“그럼 전 이만, 수고하세요.”
볼라트에게 당직을 인계하고 선교를 나서자 이미 기다리고 있었는지 우르타와 네이선이 양쪽에 달라붙었다.
“리안, 네 방에서 술마시자, 응?”
“우르타가 되게 신기한 걸 봤다던데 뭐야?”
우르타 이 한없이 가벼운 입의 소유자여.
“너 이 자식, 괜한 말 뿌리고 다닐래? 누구한테 이야기 했어?!”
“아얏, 놔, 놔! 네이선한테 밖에 얘기 안했어!”
내가 멱살을 그러쥐고 추궁하자 우르타가 내 손을 탁탁 치며 이실직고했다.
“진짜지?!”
“에잇, 진짜야! 내가 그런 말을 왜 딴 사람한테 해?”
“혹시 뭐 포병대나 이쪽 사람들한테 이야기 한거 아니지?”
“응, 오늘 포갑판 안갔어. 걔들 대청소 했거든.”
양아치인거냐, 약삭빠른거냐... 매일 포갑판에 출근도장 찍다가 대청소한다고 안 간거야?
“부탁인데 내 이야기는 함부로 하지 말아주라. 특히 이번처럼 특이한 물건들은.”
“에이, 내가 언제 이야기했다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야, 네이선 너도 마찬가지고.”
“어, 그래. 그보다 빨리 보러가자. 나도 궁금해.”
내 방에 들어간 두 녀석은 마지 자기 방인 양 침대와 의자에 걸터앉았고, 그 꼴을 본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약병을 찾아서 보여줬다.
“와, 이게 뭐지? 유리? 이렇게 투명한 유리도 있나?”
“그 안에도 되게 신기해. 완전히 하얀색이야. 구름처럼 깨끗한데? 아니다, 구름보다 깨끗해보여!”
“근데 뭐지? 장식품? 리안, 이게 도대체 뭐야?”
그러게, 그게 뭔지 제일 궁금한 사람이 바로 나야.
나는 우르타에게 약병을 빼앗아 들고는 입구를 막고 있는 코크 마개를 뽑았다.
잘못 말한 것이 아니고 진짜 코크 마개다.
전생의 약병이 코크 마개로 막혀있는 것은 본적이 없으니까 이제 정체는 더 불분명해졌다.
솔직히 이제는 이게 약이 맞기는 한지도 의심이 든다.
포장 용기가 바뀌었다는 전제가 깔리면, 내용물도 보이는 그대로 믿기 힘든 것이다.
그냥 막 박하사탕이면 어떡해?
그래서 내 결론은, 일단 먹어보는 것이다.
설마... 독극물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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