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방심(1)
일단 냄새는 전혀 없다.
내가 하는 짓을 보더니 슬그머니 약병에 손을 뻗는 우르타을 살짝 노려보며 손을 쳐낸 뒤, 약병의 뚜껑을 막고 밑의 모서리 부분으로 약을 조심스럽게 내리쳤다.
작은 파열음과 함께 약은 미세한 부스러기와 함께 적당한 크기의 네 조각으로 부셔졌고, 나는 조심스럽게 네 개 조각을 집어낸 뒤 부스러기를 알뜰하게 긁어모아 혀에 가져다 댔다.
기묘한 쓴맛이 내 미각을 자극한다.
내 행동이 이상했는지 우르타와 네이선은 가만히 보고 있다가 결국 우르타가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뭐하는 거야? 그거 먹는 거야? 맛있어?”
화학적으로 공장에서 만들어낸 약품은 처음 보는 것일테니 새하얀 것이 맛있게 보일 수는 있겠다.
“맛은 없어. 약인 것 같아.”
“에엑? 약이 왜 그렇게 생겼지? 특이하네? 어디에 쓰는 약인데?”
나도 지금 그게 궁금해서 이 짓을 하고 있잖냐.
나는 우르타의 질문을 가뿐히 무시하고(사실 할 말이 없다) 두 사람을 보면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요즘에 어디 아픈 사람?”
“......”
“......”
우르타는 의문부호가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살 내저었고, 네이선은 내 의도를 눈치 챘는지 질색하는 표정으로 한 발 물러서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세상 건강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어디 아픈 사람이 없...
그때 갑자기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은 오펜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참 호르몬 분비가 왕성할 시기라서 여드름도 조금 있는 편이고, 매일같이 땀으로 목욕을 하고 제대로 씻지를 못하다보니 상처가 덧나서 염증이 자꾸 생기는 것 같았다.
닥터 롱베르가 가끔씩 봐주기는 하는 모양인데 의학 수준이 수준이니만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불법 임상 실험을 하기 전에 최소한의 안전성은 확보해야겠다.
나는 작은 조각 하나를 집어 삼키고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우르타에게 말했다.
“우르타, 가서 오펜 좀 조용히 불러와.”
질색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네이선을 놀리고 싶지만, 혹시라도 이게 마약성 진통제라면 심각한 문제가 될 것 같아서 네이선에게 먹이는 것은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우르타가 고개를 갸우뚱 하며 나가는 것을 본 나는 그대로 침대에 곱게 누웠다.
결국 참지 못한 네이선이 질문을 던졌다.
“리안, 도대체 뭐하는 거야?”
“어떤 약인지 나도 몰라서 그래. 이렇게 가만히 있어야 기분이 뿅 가는지 확인하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뭔지도 모르는 약을 왜 먹는데?”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네이선 녀석이 아픈 데가 없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병대는 거의 대부분의 업무에서 열외다보니 매일 자기들끼리 훈련을 한다.
당연히 대련도 포함이 되어있고, 대련을 하다보면 다치는게 당연한 것 아닌가?
“너 솔직히 말해. 지금 어디 아프지?”
“아, 아프긴 어디가 아프다고 그래?!”
“아프구만 뭘. 조금만 기다려봐. 너도 먹여봐야겠다.”
“안 먹어!”
그러면서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꼴을 보니 웃기다기 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전투만 벌어지면 피칠갑을 하고 사람을 썰어대는 녀석이 고작 콩 반쪽보다 작은 약을 무서워하다니 너무 안어울리잖아?
잠시 후 우르타가 오펜을 데리고 들어왔고, 안그래도 비좁은 내 방은 숨이 막힐 정도로 좁아졌다.
사실 우르타와 네이선만 들어와도 거의 가득 차는 느낌이기는 하다.
“리안 항해사님? 괜찮으세요?”
“어? 리안, 왜 그래?”
침대에 다소곳하게 누워있는 나를 보고 오펜과 우르타가 의문을 표했지만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오펜의 얼굴을 다시 찬찬히 살펴봤다.
확실히 깊은 상처가 난 부분에 염증이 생긴 것이 눈에 띄었다.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자기 얼굴을 살펴보자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 저, 혹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냐. 요즘 상처는 어때?”
“상처요? 아, 선의님이 잘 살펴주셔서 괜찮아요!”
“그래? 내가 이번에 얻은 약이 있는데 효과가 있을지도 몰라, 먹어볼래?”
내 말이 끝나자 네이선이 뜨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 놈은 아무래도 내가 미덥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먼저 먹어봤는데도 난리네.
으음, 아무래도 오펜도 내가 영 미덥지 않은 모양이다.
난처한 표정의 오펜이 슬쩍 물러서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전 괜찮은데... 하나도 안 아파요.”
그러자 우르타가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나! 나! 내가 먹어볼래!”
“넌 안 아프다며?”
“어? 나는 그러니까, 어! 이가 아파! 전에 리안이 때려서.”
아 혈압이... 도대체 그게 언제적 이야기냐?
죽으면 무덤 앞 비석에 새겨줘야겠다, 아주.
대충 15분은 지난 것 같은데 아무런 느낌이 없는 걸 보니 향정신성 약물은 아닌 것 같다.
물론 독극물도 아닌 것 같고.
솔직히 독극물까지는 아닐 줄 알았다.
일단 이 물건들을 자꾸 보내주는 존재가 신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호의적인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그러던 존재가 굳이 설명도 없이 독극물을 보내줄 리는 없지 않을까?
“자, 내가 확인해보니까 문제는 없어 보인다. 사이좋게 하나씩 먹어보자.”
희희낙락해서 얼른 제일 큰 조각을 집어먹는 우르타와 마지못해 입에 넣는 오펜, 끝까지 반항하다가 어쩔 수 없이 남은 하나를 집어먹은 네이선까지.
입안에 퍼지는 쓴맛에 오만상을 찌푸렸지만 다행스럽게도 뱉어내는 녀석은 없었다.
이제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다들 알겠지만, 이건 비밀이다? 이거 진짜 귀한 약이야.”
효과에 상관없이 귀한 약이기는 하지, 세상에 고작 한 병밖에 없는 약이니까.
항생제나 소염제라면 며칠 안에 오펜에게 긍정적인 반응이 올 것이다.
소량이기는 하지만 오펜은 약물 내성이 없으니 충분히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놀랍게도 효과가 가장 먼저 나온 사람은 우르타였다.
다음날 아침에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내 문을 박차고 들어온 우르타가 소리를 질러 댄 것이다.
“우와! 리안! 진짜로 이가 안 아파!”
어? 너 진짜 이가 아픈 거였냐?
내가 그래서 양치질 열심히 하라니까, 어휴.
우르타의 입 냄새를 참으며 진짜 아프다는 오른쪽 어금니 쪽을 보니, 잇몸 부위가 빨갛게 부은게 확실히 염증이 있어보였다.
그래서 확인차 남은 알약 중 하나를 꺼내 세 조각으로 나눈 뒤(그냥 때리니까 세 조각이 되었다는 뜻이다) 매일 저녁마다 하나씩 먹으라고 하고 내보냈다.
이후로 내 관심사는 지나다니는 오펜의 얼굴이었다.
다음날에는 별 차이를 못 느꼈는데, 사흘째가 되자 확실히 빠르게 상처가 아물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자연적인 치유라고 해도 할 말이 없기는 하지만 나는 일단 약을 항생제 혹은 소염제로 잠정 결론을 지었다.
우르타의 잇몸이 완전히 나은 것이 가장 강력한 근거였다.
* * * * *
오늘도 선교 당직을 서며 지나가는 오펜의 제법 깨끗해진 얼굴을 보며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데 나를 발견한 오펜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 리안 항해사님.”
“응? 왜?”
“혹시...”
“약 더 줄까?”
내가 약이라고 하자 얼굴이 빨갛게 변하며 손사래를 치던 오펜이 곧 정색을 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요.”
“뭐가?”
“혹시 우현 쪽 선박들에 대해 인수인계 받으셨나요?”
“우현? 별다른 말 없던데? 왜?”
설렁설렁 대답하고 보니 네 척짜리 선단이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진행중이었다.
바흐카덴 근처까지 왔으니 특별히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다.
조금 가깝기는 하지만, 옆을 통과할 때 충돌을 우려할 정도도 아니다.
“아까부터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요.”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순간 나는 싸늘한 바람이 나를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출입항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고서는 선박 간 거리는 최대한 벌리는 것이 맞다.
그러니까 서로 진행 방향이 겹치는 상황이라면 서로 약간씩 침로를 수정해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정상이라는 뜻이다.
서로 지속적으로 가까워진다는 것은 저쪽도, 이쪽도 서로 가까워지도록 침로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인데...
지금 우리 선단의 침로를 결정하는 것은 선두의 엘리아몬이다.
머릿속에 경종이 울린다.
우리는 다섯 척, 저쪽은 네 척이다.
일반적으로 해적은 숫자에서 앞서는 상대를 공격하는 일이 드물다.
그러니까 네 척이 설혹 해적선이라고 해도 우리를 공격할 확률은 낮다는 뜻이다.
하지만 만약, 만약에 내가 처음 바흐카덴을 떠날 때 의심한 것처럼 엘리아몬이 위장한 해적선이라면?
이 한 번의 대박을 위해 지금까지 열연을 펼친 것이라면?
실제로 해적들이 약탈을 했을 때 가장 수익률이 좋을 시점이 바로 이 시점이다.
향료 제도에서 값비싼 교역품들을 가득 싣고 판매처 근처까지 와주는 이 시점.
볼라트 이 멍청한 자식! 왜 이런 중요한 일을 보고는커녕 인수인계도 안 한 거지?!
“씨발! 오펜, 너 당장 테일러, 아니 선장님한테 보고해!”
다부진 표정으로 뛰어가는 오펜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메인 마스트의 견시대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견시! 견시! 타종! 당장 종 울려! 총원 전투 배치!”
지나가던 선원들이 갑작스러운 내 외침에 혼란에 빠져 웅성거리고 견시도 당황했는지 종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씨바아아알!! 다 뒈지고 싶어?! 당장 총원 전투 배치! 갑판장! 갑판장 어디 갔어?! 견시! 타종하라고!!”
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
“전투 배치!”
“전투 배치!”
드디어 긴박한 타종소리가 울리고, 얼어있던 선원들이 하던 일을 내 팽개치고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전투 배치’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앞과 뒤의 배에서도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아니, 앞쪽인 힐레아테가 조금 빨랐던 것 같기도 한데,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겠나.
어느새 망할 해적놈들은 우리를 포격 유효 거리에 넣고 있었다.
이 상황이 되도록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볼라트와 분명히 이상함을 느꼈을 텐데도 뒤늦게 반응한 기함 힐레아테의 멍청함에 이를 갈고 있는데, 선수 쪽 멀리서 포성이 울렸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내 눈에 급선회 한 엘리아몬의 포격에 선수를 제대로 얻어맞는 힐레아테의 모습이 잡혔다.
내 머릿속에 절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만약 저 한 방으로 힐레아테가 전열에서 이탈한다면 해적선은 다섯 척, 우리는 세 척이 된다.
우리 뒤에 있는 피오베르타는 일전의 마다카트 해전에서 본 것처럼 실제로 적에게 유효타를 날릴 수 있는 전력은 아니니까 실제로는 2:5가 되는 것이다.
저번에는 6:11이더니 이번에는 2:5라니, 내가 무슨 충무공 이순신도 아니고 왜 매번 이따위 전력비로 싸움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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