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방심(2)
얼마나 급하게 나왔는지 옷도 제대로 못 챙겨 입은 알리샤와 모자 쓰는 것을 잊어버린 테일러가 선교로 올라왔다.
“리안, 상황 보고!”
“엘리아몬이 배신했습니다! 적함 다섯 척, 선수방향 엘리아몬, 우현방향 큭!”
보고를 하고 있는데 굉음과 함께 배가 흔들리며 우리 셋은 사이좋게 바닥에 나뒹굴었다.
“선장님! 괜찮으십니까?”
겨우 자세를 잡고 일어서자 테일러를 부축하는 알리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서 찢어지는 목소리로 피해를 보고해 왔다.
“우현 피격! 피해는 크지 않습니다!”
초탄에 명중탄이라니, 오늘은 일진이 사나운 모양이다.
눈에 핏발이 선 채 자리에서 일어선 테일러가 소리를 질렀다.
“갑판장! 갑판장은 도대체 뭐하고 있나!”
내가 급하게 눈을 돌려 갑판장을 찾았지만, 갑판장 베이커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고, 선원들도 제대로 된 지휘자가 없어서 우왕좌왕 할 뿐이었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되면 볼라트 이 자식도 빨리 선교로 튀어 와야...
설마?
“리안 이등 항해사! 자네까지 뭐하는거야! 당장 바리케이트 준비해!”
내 불길한 상상을 깨버리는 테일러의 고함이 들려왔고, 내가 대답할 여유도 없이 뛰어 나가는데 뒤에서 지휘하는 테일러의 목소리가 연속으로 울려 퍼졌다.
“일등 항해사! 포병대에게 사격 개시하라고 전하고 빨리 갑판장 찾아서 무기고 열어!”
“볼라트 항해사는 어디 있나! 도대체 다들 뭐하는 거야?!”
나는 혼란에 빠진 선원들을 겨우 모아서 우현에 바리케이트를 쌓을 것을 명령하고 최대한 주변의 상황을 살피려고 노력했다.
쾅! 쾅쾅쾅! 철썩!
어떻게 벌써?
나는 지근탄에 의해 튀어 오른 바닷물을 흠뻑 뒤집어쓴 채 해적선을 노려보았다.
보아하니 우리에게 포격을 가한 배는 이미 우리의 포격범위를 벗어나 있었고, 두 번째에 따라오던 해적선이 포격을 가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절망적이게도 그 녀석들도 그대로 이탈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당연히 그 뒤에는 나머지 두 척이 우리에게 당당하게 포구를 내민 채 진입하는 중이었다.
‘이 자식들, 우리가 주요 화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언제 입술을 깨물었는지 입에서는 비릿한 피내음이 퍼져나가고 상황은 점점 암울해져 갔다.
저런 식으로 일격이탈을 시도하면 이쪽은 대응 사격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 포병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지금쯤이면 우리도 대응 사격을 할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정신없이 선원들을 지휘하는 사이에 세 번째, 네 번째 포격이 쏟아졌다.
다행히 명중탄이 더 이상 나오지는 않았지만, 선원들의 사기는 최악이었다.
네 번의 포화를 뒤집어쓰는 동안 우리 쪽은 단 한 차례도 포격을 가하지 않았으니 불안감이 고조된 것이다.
그때 포갑판 쪽 해치를 열고 올라오는 갑판장 베이커가 눈에 들어왔다.
“갑판장! 도대체 뭐...”
전투가 시작된지 한참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낸 베이커에게 한마디 하려던 나는 그가 들고 있는 커틀라스를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커틀라스, 그리고 기괴한 미소를 지은 채 여기 저기에 피를 묻힌 갑판장의 모습.
“여어, 꼬맹이. 아직도 건방을 떨 여유가 남았나?”
“젠장! 당신 지금 무슨 짓을...!”
“아, 아, 난 해군 따위는 정말 되기 싫다고. 그런데 좋은 기회잖아? 이대로 배를 들고튀면 다시는 이 지긋지긋한 배를 안 타도 되니까 말이야.”
내 눈에 갑판장의 뒤를 이어 줄줄이 올라오는 피 냄새 물씬 풍기는 선원들이 보였다.
“반란이다! 갑판장이 반란...! 크윽!”
내가 힘껏 소리를 지르는데 번개같이 다가온 베이커가 칼을 휘둘렀다.
엉겁결에 나도 뽑아들고 있던 칼을 들어 막기는 했지만, 순간적으로 가해지는 무식한 힘에 나도 모르게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제서야 상황을 눈치 챈 선원들이 서로 칼부림을 시작했지만, 말 그대로 모랄빵(사기(士氣)가 극단적으로 떨어진 상태를 이르는 은어)을 당한 우리쪽 선원들이 대번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베이커의 칼을 피하느라 따로 지휘를 할 여유가 없었고.
“어린놈이 오냐오냐 해주니까 건방이나 떨어대고 말이지, 이제 그만 뒈져라!”
실력도 밀리는데 기습까지 당했으니, 대여섯번 칼을 막은 것만 해도 나는 선방한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테일러라도 찌르고 올걸 그랬다.
나는 결국 그의 힘에 밀려 바닥에 넘어지며 칼까지 놓쳐버렸고, 마지막 공격을 위해 다가오는 베이커를 노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 노망난 노친네가 누굴!”
“헉!”
그러니까 내 백마 탄 기사님, 아니, 네이선이 난입하기 전까지 말이다.
언제 나타났는지 네이선이 기세 좋게 베이커를 밀어붙였고, 주변을 재빨리 둘러보니 몇 명의 해병대원들이 장내에 난입해서 반역자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해병대원 몇 명이 추가된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대번에 반전되었다.
사실 모랄빵이 나서 문제지, 애초에 베이커를 따라 반란을 일으킨 녀석들은 새로 모집한 순수한(?) 선원들 위주였고 이쪽은 대부분 군인 출신 선원들이니 실력만 놓고 보면 원래 이쪽이 우위였다.
게다가 반란 주모자인 베이커가 몇 합 버티지도 못하고 네이선에게 목을 잃어버렸으니, 완전히 상황이 역전되어 버린 것이다.
상황이 대충 정리되자 네이선과 해병대원들에게 부상자들을 일단 수습하라고 부탁한 뒤, 상황 보고를 위해 선교로 향했다.
그리고 선교에 다가갔을 때, 여기저기 피를 묻힌 복장으로 테일러에게 뭔가 보고하고 있는 볼라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은, 왠지 모르게 내게 위화감이 들게 만들었다.
볼라트가 들고 있는 저 칼, 왜 핏물이 묻어있는 거지?
반란을 일으킨 베이커 일당과 교전을 했다고 하기에는 지금 타이밍이 너무 안 맞지 않아?
판단이 끝남과 동시에 전력을 다해 뛰었다.
그 잠깐 사이에 과연 지금 내 행동이 옳은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지금은 테일러를 살려놓아야 할 때였다.
지금 테일러가 죽는다면 이번 전투에서 이클로나가 살아남을 확률은 극히 희박해지고, 당연히 내 목숨도 장담하기 어려워진다.
아무리 테일러가 싫더라도 내가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어?
그런데 나 떨어뜨린 칼을 안 들고 왔는데... 아!
거의 순간이동 느낌(그냥 느낌이 그랬다는 것이다)으로 볼라트의 뒤쪽까지 다가선 나는 내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는 볼라트의 얼굴이 반쯤 돌아왔을 때 품에서 꺼낸 과도로 놈의 오른쪽 어깨를 찍어버렸다.
“끄아아악!”
“으히잇!”
볼라트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고, 내 입에서도 기묘한 비명이 터졌다.
다들 알다시피 과도에는 가드(guard, 도검의 손잡이과 칼날을 구분하는 돌기, 사용자의 손이 미끄러지거나 상대의 무기에 손이 상하지 않도록 보호한다)가 없다.
그러니까 아무리 세게 쥐어도 힘껏 무엇인가를 찌르면 손이 칼날쪽으로 밀리면서 베일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뜻이다.
나는 피가 철철 흐르는 오른손을 움켜쥐고 재빨리 테일러와 알리샤 쪽에 섰고, 그 사이에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볼라트가 나를 보고는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이 망할 놈이! 네놈은 그 꼴을 당하고도 저 모자란 귀족 놈의 편을 들고 싶나?!”
“뭐가 됐건 해적놈보다는 낫지, 이 해적놈아.”
되는대로 지껄이기는 했는데, 일단 나는 지금 싸울 상황이 아니다.
이런 손으로 괜히 칼 들었다가 신경이라도 손상되면 바로 불구자가 되는 거다.
제대로 된 치료시설도 없는 곳이니까 몸은 최대한 아껴야지, 암!
다행이 상황을 눈치 챈 알리샤는 이미 칼을 뽑아 든 상태였고, 테일러도 조용히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볼라트는 오른쪽 어깨에 칼침을 맞았으니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거다.
우리를 보며 이를 갈던 볼라트가 알리샤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젠장, 네놈만 없었어도...”
원래 테일러를 조용히 암살하러 온 모양인데, 옆에 실력이 만만치 않은 알리샤가 버티고 있어서 망설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상황에 맞지 않게 차분한 테일러의 음성이 들렸다.
“처음부터 노리고 있었나?”
“크크큭, 설마 그럴 리가. 그런데 옛 동료들을 만나서 말이지. 이놈의 배를 타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이걸 끝으로 배는 그만 탈거야.”
베이커도 그렇고, 다들 은퇴가 마려웠던 모양이다.
하긴 우리 선단을 싹 털면 해적 수백명 정도는 평생 호의호식 할 수 있을 돈이 될 것이다.
품고 있던 사직서를 던진 것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방법이 다들 왜 이렇게 과격한지 원.
그나저나 시도는 좋았지만(?) 볼라트 당신은 이제 끄...
타타타타탁! 우르르르르!
언제 올라왔는지 선원 여섯 명이 선교로 올라와서 볼라트 뒤에 섰다.
이상을 눈치 챈 반란에 가담하지 않는 선원 몇 명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지만, 적어도 20초 정도는 필요해 보였다.
그리고 상황을 눈치 챈 볼라트는 선원들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말했다.
“당장 저놈들 죽여! 지금도 너무 늦었다!”
볼라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도 없이 여섯 명의 선원이 테일러와 알리샤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괜히 난장판에 끼었다가 눈먼 칼이라도 맞을까 싶어 얼은 뒤로 물러났는데, 그래서 전투 진행 상황을 더욱 잘 볼 수 있었다.
먼저 알리샤 이 사람, 해병대원 저리가라 할 정도로 칼질을 잘한다.
무려 세 명이 달라붙었는데도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말이 좋아 2:1, 3:1이지, 한 칼 막는 사이에 다른 칼이 치고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막겠는가?
웬만한 실력으로는 머릿수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알리샤는 숫제 몸 주변에 은색 막이라도 두른 것 같았다.
칼이 얼마나 현란하게 움직이는지 눈에 잘 잡히지도 않는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테일러 쪽이었다.
테일러를 향해 달려든 세 녀석 중 한 놈은 옆에서 지켜 본 나도 제대로 못 본 찌르기에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목에 바람구멍이 나며 고꾸라졌고, 두 놈은 어찌어찌 칼질을 두어번 하기는 했는데, 바로 한 놈이 오른팔 겨드랑이쪽이 깊게 찔리면서 1:1 상황이 되버렸다.
그러고 보니 테일러는 보통 선원들이 애용하는 커틀라스* 가 아닌 아밍 소드*를 들고 있었다.
선원들은 대부분 커틀라스를 사용하고(짧고 베기에 좋아서 좁은 함상 전투에 적합하다), 거기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찌르기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전에 테일러랑 싸울 때 물리적 충돌로 안가서 참 다행인 것 같다.
그런 상황을 싸우는 놈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고, 나름 3~4초 정도 팽팽하던 알리샤 쪽도 이를 눈치 챈 녀석들이 당황하면서 바로 결판이 나버리고 말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알리샤에게 한 놈의 가슴이 길게 갈라지며 나자빠졌고,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테일러에게 달려들었던 마지막 녀석이 가슴과 배에 칼침을 맞고 침몰하면서 남은 반역자 두 놈과 볼라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선교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쳐봐야 이 좁은 배에서 어디로 가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니나 다를까, 놈들은 선교에서 미처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올라오던 해병대장 포아체와 해병대원 두 명과 마주쳤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지금까지 해온 공작에 비하면 허무한 결말이었지만, 세상일이 다 그런 법이다.
쌓을 때 힘들었으니까 무너질 때도 드라마틱할 것 같지만, 실제로 별 볼일 없이, 허망하게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해병대장도 무슨 난리를 치뤘는지 피칠갑을 한 상태였고, 함교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던 그는 멈칫 하더니 들고 있던 칼을 해병대원에게 맡기고 혼자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때 테일러의 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젠장! 엎드려!”
쿵! 콰가가가각! 콰쾅!
누군가 ‘엎드려!’라고 소리쳤을 때 바로 엎드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엎드리지 못했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무엇인가가 온몸을 두들겨 패는 것을 느끼며 쓰러졌다.
다행히 팔로 얼굴은 막은 것 같다.
*1) 커틀라스(Cutlass) : 함상에서 주로 사용하는 짧은 곡도. 본 서에서는 블레이드의 길이가 60cm 전후, 1kg 정도의 재원을 가진다.
*2) 아밍 소드(Arming Sword) : 일반적인 한손용 양날검. 본 서에서는 블레이드(칼날)의 길이가 75~100cm, 힐트(손잡이) 20~25cm, 무게 1.5~2.5kg 정도의 재원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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