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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78화 (78/420)

<78화> 방심(3)

“으어으으으으...”

이번에는 정신을 놓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입에서 나도 모르게 좀비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정도로 온 몸이 아팠음에도 불구하고, 아픈 곳을 살피는 것 보다는 일단 상황 파악이 먼저였다.

빠르게 얼굴을 가리던 팔을 내려 바닥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는데,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선교가 아주 걸레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포탄이 선교 근처를 치고 지나간 모양이었다.

조금만 각도가 틀어졌다면 지휘부 전멸이라는 대참사가 나올 뻔 했지만,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테일러, 알리샤, 해병대장 포아체는 물론 뒤쪽에 대기하던 해병대원 두 명까지, 한 명의 예외없이 신음성을 흘리면서 바닥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나도, 그냥 조금 더 바닥에 누워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콰광! 꾸우웅!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폭음과 함께 다시 배가 크게 흔들렸거든.

당연히 나도 다시 한 번 바닥을 굴러야 했다.

바닥에 닿는 모든 부위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다.

도대체 밖의 상황이 어떻길래 이렇게 연타로 두들겨 맞는거지?

그리고 이 미친 해적놈들은 약탈을 해야지, 다 때려 부수면 어쩌겠다는 거야?

정신이 반쯤 나갔는지 별별 생각이 다 든다.

* * * * *

확실히 사람은 좀 별로지만 테일러가 능력은 있다.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그 시간에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선원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대충 급한 명령을 마치자 포아체에게 질문을 던졌다.

“해병대장, 보고해.”

“네! 첩자들의 사보타주로 선원 일부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현재 주동자 및 동조자는 모두 사살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피해는?”

“아직 정확한 집계는 어렵습니다만, 해병대원은 1명 사망, 2명 부상입니다. 그런데 포병대가...”

설마 아니겠지? 뭐, 전멸이라거나...?

잠시 시간을 끌던 포아체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 전원 사망했습니다.”

우르타!

제기랄! 전투 배치가 되면 우르타는 포갑판에서 포병대와 행동을 함께한다.

반역자 놈들이 포병대원을 다 죽이면서 굳이 우르타를 살려놓지는 않았을 텐데...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반역자들이 포병대원을 모두 죽이고 상갑판으로 올라간 상태였으며, 그 반역자들은 여기 리안 이등 항해사와 함께 모두 사살했습니다. 저는 선내 다른 구역을 확인하고 오는 길이었는데, 그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포병대가... 전멸이라고?”

사실 애써 외면하기는 했지만 포갑판 쪽에서 갑판장이 올라올 때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결과였다.

굳이 반역자들이 포갑판에서 올라온 이유가 뭐겠나?

그때 다시 한 번 배가 흔들렸다.

이번에는 명중탄은 없고 지근탄만 있었던 모양인지 고막이 터질 듯한 충격음은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도저히 가만히 있기가 힘들다. 미칠 것 같다.

우르타가 걱정이 되고, 슬프고, 화가 나는데, 당장 우르타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이성이 뜯어 말린다.

...지금은 전투중이다. 이성을 잃으면 죽는 거야.

그리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건 우르타의 생사는 이미 결정되었을 테니 차라리 지금 상황에 더 집중하는 것이 맞기는 하다.

테일러도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침통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알리샤를 보며 명령을 내리려다가 시선이 그의 허벅지로 향했다.

알리샤의 오른쪽 허벅지에는 어린 아이 팔뚝만한 나무 파편이 박혀서 쉴 새 없이 출혈을 강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악문 테일러는 알리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일등 항해사! 당장 선원 중에 포를 다뤄본 자들을 뽑아서 포격 실시하게. 맞추지 못해도 좋으니까 무조건 쏘게! 움직여!”

“네! 선장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알리샤가 오른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물러나자 이번에는 포아체에게 명령을 내렸다.

“해병대장, 당장 갑판장 시신에서 무기고 열쇠... 제길, 이미 열렸겠군. 무기고에서 선원들에게 무기 분배하고 백병전 준비하게!”

“네! 선장님!”

해병대장이 부동자세로 대답하는 것을 듣지도 않고 테일러는 나를 보고 말했다.

“이등 항해사는 피해상황 파악하고 어떻게든 최대한 수복하게. 당장!”

“크윽, 네...”

젠장! 망할! 우르타... 제발 살아만 있어라.

나는 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선교를 내려와 주변 상황부터 살폈다.

메를리오네는 해적선 한 척과 포격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대포의 수는 조금 밀리는 듯 하지만 어차피 저 정도 화력이라면 진짜 럭키 샷이 터지지 않는 이상 한참 동안 대치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터였다.

지금쯤이면 달라붙어서 접현을 시도해야 할 해적선이 포격전을 벌이는 것을 보니, 이쪽의 전력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해적선에 타고 있는 해적의 수에 따라 다르겠지만 1:1의 백병전이라면 메를리오네도 쉽게 밀리지 않을 테니까 다른 해적선과 합공으로 백병전을 벌일 생각이겠지.

다른 한 척은 피오베르타를 추격중이었다.

피오베르타는 아예 싸울 의지조차 없는지 후미를 보이며 전장에서 멀어지는 중이었지만, 교역품이 가득 실린 상선이 해적선보다 느린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지금부터 교역품을 죄다 버린다고 하더라도 곧 따라잡힐 것 같았다.

그리고 나머지 두 척이 이클로나 주변에 있었는데, 방금 전에 두 번의 포격이 저놈들 소행인 듯 했다.

마지막으로 선단 기함 힐레아테는...

우리와 꽤 거리가 있음에도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선수가 손상된 상태였고, 엘리아몬과 백병전이 진행 중인 것 같았다.

백병전에서 힐레아테가 엘리아몬을 이길 확률은 없다.

선원과 해적의 전투력을 객관적으로 비교하면 아무래도 해적 쪽이 근소하게 우세하고, 애초에 선원 수도 두 배쯤은 차이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었다.

최소한 우리에게 붙어있는 해적선 두 척을 우리 힘으로 전열에서 이탈시켜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포병대가 전멸한 상황에서 포격전으로 뭔가를 바라기에는 무리고, 두 척을 상대로 백병전을 시도하기에도 반란으로 인해 우리 쪽 피해가 너무 컸다.

심지어 두 척이 양 현에 붙어있어서 도주도 여의치 않았다.

나는 지나가는 선원 두 명을 불러서 선수와 선미쪽으로 보내며 피해상황을 파악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하고 우리를 노리는 두 척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방금 전의 포격을 끝으로 이쪽으로 접근하는 것이, 이제야 백병전을 시도하려는 것 같았다.

지금 전력으로 양쪽의 해적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도대체 테일러는 어쩔 셈인지 모르겠다.

“우현 현측 난간 파손입니다. 피해는 심각하지 않습니다.”

“좌현 함수 창고와 선실 쪽 외벽이 피격 당했습니다.

“수리가 필요할 정도는 아니고?”

“우현은 괜찮습니다.”

“좌현도 상부 구조물이라 운항에는 지장 없습니다.”

내가 보낸 선원들이 뛰어와서 보고를 하는데 또 배가 흔들리며 물벼락이 떨어졌다.

바리케이트를 쌓을 물건을 들고 오던 선원들 몇 명이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것이 보였다.

“너희도 무장하고 백병전 준비해. 더 이상 포격은 없을 것 같다.”

선원들을 보내고 내 방으로 뛰어가서 석궁을 들고 나오려는데 상처투성이인 팔이 눈에 들어왔다.

팔 뿐만 아니라 파편이 튀면서 온 몸이 생채기투성이였다.

서랍에 들어있는 약병에 생각이 미쳤지만, 잠깐의 고민 끝에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다 해서 100개가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양인데 최대한 아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만약 감염으로 열이 오르거나 할 때 먹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약이 단순한 소염제라면 소용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는 낫겠지.

밖으로 나오자 시간이 없었는지 영 부실한 바리케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한 쪽에는 포아체가 선원들을 배치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내가 바리케이트 뒤에 자리를 잡자마자 배가 흔들리며 포성이 울렸다.

내가 자리 잡은 좌현이 아니라 반대 방향(우현)에서 접근하던 해적선 근처에 물기둥이 치솟아 오른다.

알리샤가 어떻게든 포격을 가하기는 한 모양인데, 솔직히 탄착도 엉망이고 지근탄 한 발도 그냥 운이 좋았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저놈들이 조금이라도 늦게 붙도록 할 수만 있다면 아주 의미 없는 짓은 아니다.

장전을 마치고 나서도 계속 우현 쪽이 불안해서 힐끔거리다보니, 어느새 좌현으로 접근하던 해적선이 사격 유효거리까지 다가왔다.

“사격 준비!”

내가 소리를 지르자 석궁을 든 십여명의 선원들이 바리케이트 위로 몸을 일으키며 각자 마음에 드는 놈을 조준했다.

“발사!”

퍼퍼퍼펑!

요란한 발사음이 동시에 터지고 우리는 바로 바리케이트 아래로 몸을 숨겼다.

“재장전!”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리케이트를 뭔가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해적놈들도 대응사격을 한 것이다.

바리케이트가 얼마나 부실했는지 볼트 하나가 판자를 뚫고 내 옆구리를 쿡 하고 찔렀다.

“니미럴! 누가 이따위 판자를 바리케이트로 쌓았어?!”

상처가 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식은땀이 날 정도로 식겁한 순간이었다.

생각을 해보라, 화살(여기서는 물론 볼트지만)이 날아드는 순간에 갑자기 뾰족한 것이 허리를 찌르는 거다.

팔, 다리 잘라내는 비교적 간단한(?) 외과수술도 성공률이 의사에 따라 천차만별인 세상인데, 내부 장기가 손상되면 항생제고 뭐고 그냥 죽는 거다.

아니, 마법도 있고 사제의 치유력도 있는 세상에 왜 포션 같은 필수품은 없는지 모르겠다.

“장전 완료!”

“장전 끝!”

다들 장전이 끝났는지 한 번 확인한 나는 바리케이트 위로 살짝 머리를 들어 해적선의 위치를 확인하고 소리쳤다.

“사격 준비!”

우리가 상체를 올리고 조준하는 순간 몇 개의 점이 시야에 잡혔다.

그리고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처절한 두 번의 비명이 울렸다.

“으아아악!”

“크르르륵...”

해적 놈들이 방금 전에 모두 사격한 것이 아니고 몇 놈은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린 모양이다.

눈에서 불똥이 튀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일단 명령부터 내렸다.

“쏴!”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가라앉히며 바닥에 엎드린 채 물었다.

“피해는?”

내 옆에 있던 선원이 좌우를 확인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헤리슨이 목에 맞았습니다. 베리는 왼쪽 어깨입니다. 더 이상 사격은 힘들 것 같습니다.”

“제기랄...”

솔직히 이번에는 내 판단 미스다.

해적들도 뇌 대신 우동사리가 들어있는 것이 아닌 이상, 엄한 바리케이트에만 볼트를 쏴재끼지 않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예상해야 했는데...

죽은 헤리슨과 반쯤 목을 내놓은 베리에게 미안했다.

아, 베리의 경우는 죽을 정도의 상처라는 뜻이 아니고, 전투 중에 팔을 하나 못 쓴다는 것은 목숨을 반쯤 내려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장전 끝나면 개별 사격 해. 저 놈들이 대응 사격하니까 조심하고.”

나는 궁수들에게 자율 사격을 명령하고 다시 석궁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칼질하기 전에 최대한 적을 줄여놔야만 했다.

내가 세 번째 사격을 하기 전에 우리 배에서 두 번째 포격이 날아갔고, 어떻게 맞추기는 했는지 선원들의 함성이 잠깐 들렸다.

그리고 세 번째 사격을 마치고 장전을 하는 중에 머리 위 마스트쪽에서 비명에 가까운 경고 소리가 울려 퍼지고, 뒤이어 포아체가 목청껏 내지르는 경고가 내 고막을 때렸다.

“으아아악! 충돌합니다!”

“충돌! 충돌 대비! 엎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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