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배려와 오해의 상관관계
바닥에 최대한 엎드려서 몸을 웅크린 상태로 불안한 기다림이 지나고, 배가 크게 휘청이며 굉음이 울렸다.
콰드득! 우드드, 끼이이익, 쿠구궁!
배가 균형을 잡기 무섭게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보니 이클로나의 좌현에 바싹 붙은 해적선에서 수십 개의 갈고리가 넘어오는 것이 보였다.
얼핏 봐도 해적의 수는 100명 내외, 우리 쪽은 30명도 안 되는 것 같다.
반역자들이 죽은 것도 모자라 그들 때문에 입은 피해, 포갑판에 내려간 선원까지, 원래 상정한 전투 인원의 절반 수준이다.
막상 백병전 상황이 되고 보니, 해적선과 1:2는커녕 1:1도 이길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개개인의 기본적인 기량이 뛰어나고 방어하는 이점을 살린다고 해도 3배의 병력 차이는 아무래도 버거울 수밖에 없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상황이 나빠지고 있었지만, 마냥 손 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래도 마지막 숨을 내쉬기 전까지는 발버둥이라도 쳐봐야 하지 않겠어?
“마지막으로 선물 날려주고 우리도 백병전에 가세한다. 하나, 둘, 셋! 날려!”
내 구령에 맞출 수 있었던 석궁수 대여섯명이 동시에 상체를 들고 널빤지를 든 녀석들 위주로 마지막 사격을 가했다.
거의 시간차 없이 저쪽에서도 대응 사격을 했지만, 다들 주의하고 있어서인지 이번에는 피해가 없었다.
나는 바로 소용이 다한 석궁을 집어 던지고 아까 주워온 커틀라스를 빼들었다.
“못 이기면 어차피 다 뒈지는 거야! 해적으로 전직하고 싶은 미친놈은 없지?!”
“걱정 마쇼! 가자!”
일부러 크게 소리 지른 내게 호응하는 한 선원의 외침을 끝으로 목숨을 건 한 판 승부가 시작되었다.
널빤지는 이제 막 놓이고 있었지만 두 배의 현측이 거의 붙다시피 했으니 로프를 타고 넘어온 놈과 뛰어서 넘어온 놈들이 벌써 십수명이었다.
나는 내가 일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휘두르는 해적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하고
까맣게 때가 낀 녀석의 목덜미에 빨간 줄을 그어주었다.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는 놈을 무시하고, 충돌로 인해 더 빈약해진 바리케이트를 발로 차고 있는 해적에게 달려가 비어있는 가슴에 칼을 먹였다.
엉망진창으로 무너진 바리케이트였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만약 바리케이트 없이 난전이 되었다면 머릿수가 압도적인 해적이 꽤 유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리케이트 바깥쪽 공간은 한정되어있었고, 덕분에 우리는 꽤나 대등한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문제라면 아직 넘어오지 못한 해적 몇 놈이 자꾸 볼트를 날리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사선(射線)에 해적들이 더 많이 걸려서 효과적인 일제사격은커녕 제대로 노리고 쏘지도 못해서 피해는 미미했다.
하지만 머릿수가 부족하다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였다.
하나씩, 둘씩 우리 쪽 인원이 전열에서 이탈하면서 바리케이트를 넘어오는 해적들이 많아졌고, 결국 원치 않던 난전 양상이 되고야 말았다.
또 한 놈을 겨우 죽이고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한 쪽에 테일러까지 합류해 칼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배가 진동하며 포성이 울렸다.
아직도 포격을 할 상황이 되나?
우현 쪽을 힐끔 보니, 의외로 그쪽 해적선은 아직도 우리 배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알리샤와 대포를 잡은 선원들이 제법 선방하는 것 같지만, 백병전에서 밀리면 말짱 도루묵일텐데...
잠깐 한눈을 판 대가일까?
갑자기 왼쪽 어깨 뒤쪽에 시큰한 느낌이 들더니 곧 화끈한 고통으로 변했다.
고통보다는 놀란 마음에 뒤로 돌면서 어림잡아 칼을 휘둘렀지만, 칼에 걸리는 것은 없다.
그리고 내 눈에 볼트가 박힌 목을 움켜쥐며 쓰러지고 있는 해적이 보였다.
어쩐지 공격이 좀 얕은 것 같더라니, 놈이 볼트를 맞고 쓰러지면서 칼이 스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누가?
내가 놀란 가슴을 부여잡는데 메인 마스트의 견시대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항해사님! 거 뒤는 조심합시다! 으갸갸각!
견시대를 올려다보니, 견시대에 삐죽삐죽 박혀있는 몇 발의 볼트가 보인다.
마지막의 이상한 비명은 저 볼트들 때문이리라.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고마운데 안 죽고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나도 안 죽어야 다시 보겠지.
* * * * *
원래 전투니 살인이니 하는 것들은 맨 정신을 유지하면서 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시 정신을 반쯤 놓고 칼질을 하고 있는데, 문득 한쪽에서 다리를 절면서도 칼을 휘두르는 알리샤와 선원들, 미친 듯이 날뛰는 포아체와 해병대원들, 아직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테일러가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우리가 이기고 있었다.
믿겨지지 않는 현실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해적선 쪽을 보니, 언제 철거했는지 널빤지와 갈고리는 모두 끊어지거나 회수되었고 이클로나와 천천히 멀어지고 있는 해적선이 보였다.
아니, 도대체 왜?
해적선을 보면 아직도 인원이 절반은 남았다.
그에 반해 우리 쪽은 알리샤와 테일러까지 포함해도 칼을 쥐고 움직이는 인원은 고작 열댓명에 불과했다.
다 이긴 싸움을 포기하는 해적이라니?
혹시나 해서 우현방향을 보니 그쪽에는 전보다 더 멀어져서 크게 선회중인 해적선이 보인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모든 해적선이 전투를 포기하고 도주하는 중이었다.
일단 몇 명 남지 않은 해적들을 다른 이들과 힘을 합쳐 모두 죽이고 나니까 겨우 상황이 눈에 보였다.
메를리오네와 포격을 주고받던 해적선은 이미 저 멀리 도주 중이었고, 메를리오네는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으며, 마스트에 백기가 계양된 피오베르타는 항복을 받아 줘야 할 해적선이 도주 중이라 바다 위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힐레아테와 엘리아몬은 여전히 서로 엉겨 붙어 있었는데, 그 뒤로 무려 12척의 함대가 위풍당당하게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오, 씨ㅂ, 아니, 망할, 신이시여... 내가 이 세상에서 아직 할 일이 남은 모양입니다?
상황이 얼추 정리되자 긴장이 풀리며 온 몸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어깨 쪽에 베인 상처뿐만 아니라, 언제 맞았는지 오른쪽 팔뚝에도 긴 상처가 있었고, 허벅지와 종아리에도 자잘한 상처가 꽤 있었다.
시체에서 흐른 핏물과 오물로 질퍽한 갑판위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내 머리 위로 누군가가 그림자를 드리우며 물었다.
“리안, 괜찮아? 많이 다친 것 같은데.”
힘겹게 고개를 올려보니 네이선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보는 순간 갑자기 왈칵 눈물이 솟았다.
우르타, 그 해맑은 바보 녀석이 생각난 것이다.
“어? 어! 리, 리안? 우, 울어? 지금 우는 거야?”
“네이선... 우, 우르타가... 크흑.”
“아니, 뭐라고 하는 거야? 얼마나 아프면 말도 제대로 못하고 울기까지 해?! 안되겠다, 일단 업혀! 선의님한테 가자!”
나는, 그리고 네이선은 살았다.
정말 이걸 보고 기적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다.
그런데 난 정말 기뻐해도 되는 걸까?
슬퍼서 눈물이 나는데도 마음 한 구석에는 살아남은 것이 기쁘고, 그렇게 기뻐하는 내가 싫어서 화가 난다.
* * * * *
12척으로 구성된 함대의 출현을 눈치 챈 해적선 네 척은 도주에 성공했지만, 사방을 포위당한 엘리아몬은 끝내 나포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엘리아몬을 나포한 선박들은 알고 보니 쿠샤 왕국 제 1함대 소속 군함들이었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에 쿠샤 왕국 해군이 출현하면서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좋다’라고 말할 정도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이클로나에서 자력으로 거동이 가능한 사람은 고작 21명에 불과했고, 그 인원조차 대부분은 어디 한 군데가 불편한 사람들이었다.
이정도 인원으로는 도저히 이클로나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해군에 예항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힐레아테는 우리보다 더 심각해서, 부상이고 뭐고 살아남은 사람이 겨우 12명이었다.
백병전이 벌어지기 무섭게 항복한 피오베르타도 사상자가 30여명에 이르렀고, 백병전을 치르지도 않은 메를리오네조차 사망 및 실종이 14명에 달했다.
해적들이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선적물들의 피해는 적은 편이라 상행 자체는 실패라고 하기 애매했지만, 인원 손실로 따지면 거의 대참사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틀 후, 우리는 해군의 도움 덕분에 무사히(?) 바흐카덴 항에 입항 할 수 있었다.
* * * * *
나는 멍하니 누워서 아련하게 울리는 타종소리와 입항 알림을 들었다.
우리 배에서 울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클로나에서 멀쩡하게 서서 돌아다닐 수 있는 인원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안 된다.
닥터 롱베르도 어디에 부딪혔다며 머리에 붕대를 감고 다니는 판이니, 정상인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의무실에 딸린 병실로는 턱없이 부족해서 선실을 임시 병실로 개조했다.
비좁기는 해도 선원들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선실이 사라졌지만, 공간을 사용할 인원이 확 줄어든 것은 물론, 환자가 아닌 선원도 없어서 아무도 불만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간부들은 자기 방에서 요양중이다.
나는 1/3로 쪼개진 약의 마지막 한 쪽을 들고 생각에 잠겼다.
전투 후 수습이 끝나고, 닥터 롱베르에게 간단한 치료를 받자마자 바로 항생제로 추정되는 약을 3등분하여 하루에 한 쪽씩 먹고 있었다.
물론 한 개가 1회분으로 만들어진 것 같기는 한데, 내 몸은 항생제에 대한 내성이 없으니 굳이 1회분을 다 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였다.
혹시라도 이상이 느껴지면 더 먹을 생각은 있었지만, 다행히 상처는 잘 아물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이 약을 사람들에게 풀어야 하는가 마는가였다.
어차피 할 일이 없으니 약의 수를 세어봤는데, 딱 100알이 있었던 모양이다.
테스트할 때 한 알, 우르타... 에게 한 알, 내가 한 알, 응?
96개였던 것 같은데?
100개쯤 세다보면 숫자가 조금 틀릴 수도 있는 거니까 원래 100개가 맞았을 것이다.
각설하고, 지금 부상으로 쓰러진 사람 중에 적지 않은 수가 감염으로 고생하고 있을 거다.
다들 몇 달이나 함께 한 사이다보니 얼굴을 모르는 이도 없고,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당연히 약을 푸는 것이 옳다.
하지만 ‘세상에 100개도 남지 않은 약을 아낌없이 베풀 정도로 친한가?’라고 말하면 애매한 부분이기도 하다.
하나 더, 만약 약에 대한 소식이 테일러의 귀에 들어가면 도대체 어떤 오해를 하게 될까?
이미 결별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그래서 더욱 내가 그를 버리기 전에 다시 의심을 사는 것은 절대 사양이다.
당연히 이 약을 돈 몇 푼에 뺏기는 것도 사절이지.
게다가 지금 약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알리샤일 것 같았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따져볼 때 내가 알리샤를 미워할만한 이유는 없다.
막말로 알리샤가 목숨 걸고 선장의 권위에 도전하면서까지 내 입장을 변호해 줘야 할 의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원래 미운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과 친한 사람도 같이 미워지는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
그래서 솔직히 알리샤에게 이 약이 돌아가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다.
아니다, 그래도 닥터에게 몇 개 넘기고 심한 사람에게 쓰라고 해야 하는 것이 옳겠지?
내가 마음을 정하고 서랍에 손을 뻗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네이선이 뛰어 들어왔다.
저 놈은 그 난장판에서도 몇 개의 생채기와 타박상만 입었다.
진짜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것 같다.
“리안! 그 약! 약 어딨어?!”
“어? 갑자기 무슨 약? 문도 좀 닫고 천천히 말해 봐.”
일단 네이선을 진정시키려고 모르는 척 했지만, 사색이 된 네이선은 문을 닫을 생각도 하지 않고는 여전히 약만 찾았다.
저놈이 여기에서 찾을 약이 항생제밖에 없는데, 도대체 왜?
해병대에서 친해진 사람이 많이 아픈가?
“어차피 몇 개 들고 닥터에게 갈 생각이었어. 왜 그래? 친한 사람이야?”
“친하냐고?! 그게 무슨... 아! 너 설마, 몰랐어?! 우르타, 우르타가 많이 아파! 지금 온 몸이 불덩이야! 선의님도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대. 하지만 그 약! 그거면 고칠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네이선의 말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우르타가 살아있다니, 어떻게?
아니, 살아있으면 나한테 이야기라도 해줘야지, 왜 지금까지...?!
하... 생각해보니 전투 이후로 우리는 우르타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건강이 양호한 네이선이 너무 바빠서 만나서 이야기 할 시간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 내가 의도적으로 그 이야기를 회피해왔다.
살아있으면 진작 달려왔을 녀석인데 안 달려오는 것을 보면,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이선도 일부러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말았다.
그런데 사실 우르타가 살아있었던 것이다.
겨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은 나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서랍을 열고, 약병에서 약을 한 움큼 꺼냈다가 다시 반을 집어넣고, 다시 다섯 개만 남기고 나머지를 집어넣었다.
고열은 감염의 대표적인 증상이지만 고열이라고 해서 모두 감염이 원인은 아니고, 애초에 약이 항생제인지 소염제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굳이 여러 개를 사용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내가 약사는 아닐지 몰라도, 우르타처럼 심각한 환자의 경우 아무 약이나 썼다가는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상식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우르타의 상황을 먼저 보고 다음 행동을 결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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