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80화 (80/420)

<80화> 어부지리(漁父之利)

네이선의 부축을 받으며 아픈 몸을 이끌고 겨우 의무실로 내려가니, 병실의 중환자 네 명을 보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롱베르씨가 보였다.

“닥터, 우르타, 우르타가 살아있어요?!”

“응? 리안 항해사? 자네도 웬만하면 움직이지 말라니까 거 참, 하긴... 옆에 그 친구가 가서 알린 모양이군. 들어가 보게. 어제까지는 나쁘지 않았는데, 오늘 갑자기 열이 심하게 오르면서 안 좋아졌어.”

롱베르씨가 알려준 침대로 가니 온 몸이 땀으로 젖은 우르타가 보였다.

두 눈으로 살아있는 우르타를 확인하고 나니 그제야 진짜 우르타가 살아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지만 우르타는 굳이 몸에 손을 대지 않아도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고, 아직 의식은 희미하게 남은 것 같았지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우, 우르타...”

“리안...”

“자, 잠깐만 기다려, 내가 꼭 고쳐줄게.”

나는 고장 난 수도꼭지마냥 흘러넘치는 눈물을 급히 닦고는 롱베르의 의무실을 뒤져서 작은 막자와 사발을 찾아냈다.

그리고 내가 막자에서 약을 하나 부수기 시작하자, 이를 지켜보던 롱베르씨가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네만, 환자에게 아무거나 먹이면 안 되네. 내가 최선을 다할 테니 가서 인사나 하고 나가게.”

미쳐버릴 것 같은 답답함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침착한 말투로 롱베르씨에게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롱베르씨에게 이것저것 설명할 시간도, 방법도 없었고, 괜히 롱베르씨와 트러블이 생기면 일이 꼬이기만 할 테니까.

“닥터, 이번 한번만 믿어줘요. 이럴 때 쓰려고 힘들게 구한 약이예요, 네?”

“휴... 리안 이등 항해사, 안되네. 자네 친구이기 이전에 내 환자야. 내가 치료하고, 실패하면 그 책임은 내가 오롯이 감당할 일이네. 아무리 자네라도 내 환자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먹일 수는 없어.”

정말 돌아가시겠군.

평소였다면 정말 시대에 안 맞는 멋진 의사라고 엄지를 치켜세울 행동이기는 한데, 지금만큼은 아주 골치 아파 죽겠다.

그렇다고 이 약이 지금보다 수백 년쯤 앞선 기술로 만들어진 의학과 화학의 결정체라는 것을 알려줄 방법도 없고...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롱베르씨를 설득할 수 있을까?

“후우, 좋습니다, 닥터 롱베르. 그럼 환자에 대해 물어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요?”

“음, 그러게.”

“우르타, 왜 저러는 거죠? 원인이 뭔가요?”

사실 우르타를 보고 조금 이상했던 부분이 바로 몸이 너무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전투 중에 다쳤으면 온 몸에 칼자국이 났어야 정상인데, 오른쪽 다리에만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았을 뿐, 다른 곳에는 멍 자국 몇 개 외에는 육안으로 보이는 상처가 없었다.

“지금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네만... 물어보니 대답해주지. 저 친구는 오른쪽 종아리에 거칠게 찢어진 상처로 이곳에 왔네. 다만 상처에 비해 통증의 세기나 붓기로 볼 때 뼈에 금이 간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지.”

“그럼 고열은 어떻게 된겁니까?”

잠시 내 눈을 피한 롱베르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큰 외상을 입은 경우 회복과정에서 고열을 동반하는 것은 일반적이네.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것을 자가 치유를 위한 과도한 생명활동의 부작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우르타라고 했지? 저 친구의 경우는 열이 조금 심하기는 하지만, 며칠 후면 깨끗하게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너무 걱정하지 말게.”

허! 현미경도 없고,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존재도 모르며, 백혈구나 항체의 개념도 없는 시대에 정답에 가까운 추론을 내밀다니 이 사람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결론이 틀렸다.

우르타의 열이 몇 도까지 올라간 것인지는 모르지만, 의식이 흐려질 정도의 고열을 방치하면 위험하다는 것은 전생에서는 상식이다.

“하지만 저 정도 열이 계속되면 위험하다는 것, 사실 닥터도 알고 있죠?”

“그래서 열은 내가 지속적으로 내리려고 노력을...”

노력이라...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은 노력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여기는 에어컨도 없고 얼음 팩도, 얼음 욕조도 없잖아?

이번에 가져온 멜레스라는 녀석이 해열에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는 몰라도 그래봐야 고작 생약에 불과하다.

게다가 열의 원인을 제거하지 못하고 열만 내린다고 해결이 될 문제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걸 먹이면 된다구요. 자, 여기 이걸 보세요. 진짜 공들여서 만들어진 약이예요. 응급상황에서 열을 내리고 상처의 회복을 돕는 약이라구요.”

나는 다른 네 알의 약을 꺼내서 보여주며 롱베르씨에게 부탁했다.

원래 항생제가 그런 용도는 아니지만 대충 넘어가자.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흐음... 확실히, 음...”

이 세계는 공장에서 찍어낸 약이라는 것이 없고 대부분의 생약을 그대로 쓰거나, 보관과 사용이 조금 편하도록 가공해서 약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나마도 다 수제품이다 보니 크기나 모양이 미세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넘겨준 약들은 색도 색이고, 크기나 모양도 일정한 것이 딱 봐도 범상해 보이는 것은 아닌 거지.

“이게 그런데 약은 맞는 건가? 이렇게 공들여 만든 약은 내가 들어본 적도 없어서 그러네.”

“제가 며칠 전에 오펜과 우르타에게 확인도 했습니다.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믿어줘요.”

잠시 고민하던 롱베르는 땀에 흠뻑 젖은 우르타를 한 번 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멜레스까지 듣지 않는 상황이니... 좋네, 대신 물에 타서 먹이도록 하지. 내가 지켜보다가 상황이 나빠지면 바로 토하게 해야 하니까.”

으음, 나도 어차피 물에 타서 먹일 생각이었다.

닥터의 허락이 떨어지자 안절부절 못하던 네이선이 번개처럼 물과 물 잔을 가져왔고, 나는 조심스럽게 물이 반쯤 들어있는 잔에 약 가루를 털어 넣었다.

아, 그런데 이거 너무 쓰다고 도로 토하면 어떡하지?

거의 의식을 잃은 우르타에게 약을 탄 물을 먹이고, 나머지 네 개의 알약을 롱베르씨에게 넘겼다.

“저도 정말 어렵게 구한 약입니다. 아마 다시는 못 구할 거예요. 우르타가 완전히 의식을 회복할 때까지 매일 3분의 1, 아니 반개씩 먹여주시고 남는 것은 닥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쓰세요.”

“음, 만약 저 친구에게 효과가 있다면 한번 고려해 보도록 하지. 그런데 도대체 어디에서 구한 건가?”

“그건 밝히기가 좀... 그러니까 닥터도 비밀 좀 지켜주세요. 알았죠?”

조금 불안하기는 한데, 롱베르씨라면 약속을 지킬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징벌방에 갔을 때 끝까지 반대한 유일한 사람이며, 그 날 이후로 테일러랑 관계도 냉랭한 편이라 일단 믿기로 했다.

* * * * *

다행히 내 도박은 성공적이었다.

그날 밤이 되기도 전에 우르타는 열이 내리기 시작했고, 이후에 약을 먹은 다른 고열 환자들도 모두 극적인 회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바흐카덴에 입항한지 사흘째가 되는 오늘, 우리 일행은 이제 네 명이 되었다.

“그러니까 우르타를 발견한 사람이 오펜 너라고?”

“네, 항해사님!”

“진짜, 오펜이 아니었으면 선실 바닥에서 굴러다니다가 죽었을 걸?”

지독하게 운 좋은(?) 네 번째 맴버의 이름은 오펜, 이클로나의 최연소 선원이자, 이제 유일하게 살아남은 수습 선원이었다.

오펜의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상황은 이랬다.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우르타는 당직을 마치고 선실에서 자는 중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잠에서 깨어 급하게 갑판으로 올라가려던 우르타는 해치 바로 아래에서 포격의 충격으로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때 삐져나온 못에 종아리가 찢어진 것도 모자라 다리뼈에 금까지 가버린 것이다.

통증 때문에 제대로 걷지를 못하니 제 시간에 포갑판에 갈 수 없었고, 그래서 겨우 반란군에게 걸리지 않아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바닥에서 낑낑대던 우르타를 발견하고 부축해서 의무실로 데려간 사람은 오펜.

덕분에 오펜도 의무실로 환자를 옮기고 롱베르씨의 조수 노릇을 하느라 전투에 직접적으로 휘말리지 않아 목숨을 건졌으니, 둘이서 저렇게 좋아 죽는 꼴이 이해가 되기는 한다.

그런데 우르타, 너를 살린 사람은 오펜이 아니라 나인 것 같다만?

원래부터 멀쩡한 네이선과 오펜, 몸을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는 나, 이제 정상 체온으로 돌아와서 목발을 짚고 다니는 우르타까지, 우리는 술집에 모여 전투 상황을 안주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우르타는 아직 환자라서 술은 안 먹이려고 했는데, 아까부터 슬금슬금 오펜의 술을 뺏어 마시길래 그냥 맥주를 시켜줬다.

그리고 오펜은 아직 어리기는 하지만... 에잇, 여기는 지구가 아니다.

음주에 대한 연령제한 따위는 없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래도 양심적으로 독한 증류주 대신 맥주만 마시게 하고 있다.

물론 당사자는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어차피 애들은 영원히 이해 못하는 내용이니 그냥 어른인 내가 다 감수하기로 했다.

한참을 웃고 떠들던 와중에 네이선이 화제를 돌렸다.

“아! 해병대 사람들에게 대충 듣기는 했는데, 정확하게 어떻게 된 거야, 리안? 해병대는 다 좋은데 말이 길어지면 이해하기가 좀...”

“그래, 이야기 좀 해봐! 오늘 회의 갔다 왔잖아?!”

“저도 궁금해요.”

나는 잠시 술을 마시며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를 정리한 다음,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했다.

오늘 낮에는 선단 전체 간부와 왕국 해군 1함대 관계자가 모여 포로의 심문(?) 내용과 집계된 피해 상황, 선단 해체와 향후 계획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회의에서 알게 된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엘리아몬은 애초에 우리와 조우하기 얼마 전에 에스피온사 제도의 해적 놈들에게 나포당한 선박이었다고 한다.

원래대로라면 해적과 거래하는 상인들에게 헐값에 넘겨졌어야 할 엘리아몬은, 포로로 잡힌 선장의 악에 받친 저주를 듣던 해적들의 기발한 생각에 의해 용병 호위함으로 변신했다.

배의 인원이 모조리 해적으로 바뀌었지만 그것을 눈치 챌 사람은 없었고, 죽은 전 선장의 꼼꼼한 항해일지를 기반으로 태연하게 거짓말을 내뱉은 해적 놈의 말에는 한 치의 어색함도 없었다.

심지어 뒷조사에서도 엘리아몬의 행적은 당연히 완벽했다.

선장이나 선원들의 얼굴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였을 뿐.

비록 앞뒤가 잘 맞는다고 할지라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엘리아몬이 어느 정도 의심을 받는 것은 당연했지만, 공교롭게도 마다카트 앞바다에서 해적들의 기습을 당하면서 분위기가 바뀌게 된다.

출신이 발바라스 제도라서 에스피온사 제도의 해적이던 엘리아몬을 동종업계 종사자라고 생각하지 못한 마다카트의 해적들은 엘리아몬을 오히려 가장 강력한 전력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 공격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계획이고 뭐고 도망가려던 엘리아몬은, 죽어라고 물고 늘어지는 마다카트 해적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어라고 싸울 수밖에 없었고...

놀랍게도 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얼떨결에 계획을 계속 진행할 수 있게 됨은 물론 다른 선장들의 신뢰까지 얻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며칠 전 마다카트에서 시간을 끌어가면서까지 에스피온사 제도에 대기 중인 동료들에게 항해 계획을 전달할 때만 해도 그들의 계획은 완벽했다.

그렇다면 엘리아몬이 아닌 힐레아테의 항해사였던 볼라트와 우리의 임시 갑판장인 베이커 놈은 어찌된 것이냐?

이것도 웃긴 것이, 볼라트 이 자식은 원래 해적질을 하던 놈인데 최근 몇 년 동안 마음을 잡았다면서 힐레아테의 이등 항해사로 조용히 일하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해적질을 하다가 평범한 상선의 이등 항해사로 사려니까 좀이 쑤시던 와중인데 옛 동료들을 만난 것이다.

옛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법 그럴 듯 했고, 자기가 합류해서 이클로나를 뒤집기만 하면 한몫 제대로 챙길 수 있을 것 같았던 볼라트는 그때부터 준비에 들어간다.

그러나 전혀 틈을 주지 않던(그때는 진짜 테일러에게 충성을 다할 생각이었다) 나 때문에 계획이 지지부진 하던 상태였다가, 내가 실각하고 욕심 많은 베이커가 갑판장이 되면서 포섭에 탄력이 붙은 것이다.

아마 일련의 사건들로 테일러가 선원들의 신뢰를 많이 잃은 것도 아마 큰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볼라트도 거의 성공할 뻔 했다.

만약 테일러의 암살에 성공만 했다면 알리샤 혼자서는 도저히 상황을 수습할 수 없었을 테고, 이미 포병대를 쓸어버린 볼라트의 입장에서는 대충 시간을 끌어서 해적선이 접현 할 때까지만 버티면 이기는 상황이었으니까.

볼라트의 실패와는 상관없이 해적들도 거의 계획을 성공시키기 직전까지 갔었다.

볼라트가 실패하기는 했지만 이클로나의 대포를 무력화시키는 것에는 성공했으니 해적들로서는 딱히 나쁜 상황도 아니었고, 힐레아테는 이미 전멸, 피오베르타는 항복한 상황이었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타난 쿠샤 왕국 1함대가 아니었다면 놈들의 계획은 아마 성공했을 것이다.

그런데 더 반전인 것은 그 전함들도 우연히 그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힐레아테의 선장님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인지 몰라도, 마다카트 섬에서 먼저 떠나는 상선 편에 바흐카덴에 주둔중인 제 1함대 부사령관에게 함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원래 인맥이 있었던 것인지, 출발 전에 이미 약속된 것인지는 당사자인 힐레아테 선장님이 전투에서 횡액을 피하지 못하신 관계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상당량의 해군 국방 지원금... 을 빙자한 뇌물을 약속한 것은 확실(?)했다.

부사령관의 부관이라는 작자가 사망한 힐레아테 선장님의 친필 서약서라면서 엄청난 금액을 기부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종이를 들고 왔거든.

그 내용을 보면 이렇게 돈을 내놓을 건데 도대체 이 위험한 일을 왜하나 싶을 정도였지만(누가 봐도 위조문서라는 뜻이다) 이해 당사자가 없다보니 만장일치로 전액 지불하는 것으로 결론 났다.

다른 선박에 소속된 사람들은 생명의 은인들(?)에게 남의 돈으로 보답을 하게 돼서 행복했고, 힐레아테의 남은 생존자들은 넉넉하게 배정된 보상금에 만족했으며, 해군은 피해 없이 해적 소탕(?)이라는 공적을 올린 것도 모자라 거액의 지원금까지 생겨서 즐거운 해피엔딩이었다.

물론 힐레아테 선장님의 일방적인 손해였지만, 원래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다.

그렇게 물고, 물리고, 지지고, 볶고, 난리를 친 이번 사건의 결과를 정리하면, 우리와 발바라스 제도의 해적과, 에스피온사 제도의 해적이 싸웠고, 쿠샤 왕국 1 함대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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