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제국 해군 탈출 계획(1)
선단이 해체되고 며칠이 지나도록 테일러는 배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무래도 행정적인 처리라던가 여러 가지 문제가 산적해 있는 까닭이었다.
그래서 조선소에서 수리를 마친 이클로나를 되찾는 것도, 메를리오네와 선원을 재편성 하는 것도 일등 항해사인 알리샤가 맡아서 진행했다.
메를리오네의 선장이었던 펠리엔이 살아있었다면 그가 지휘를 했겠지만, 그쪽도 부선장 오엔이 선장 대행을 하는 판이니 별다른 잡음은 없었다.
다만 간부들에 대한 재임명이나 선원 충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입항한지 9일째 되던 날 밝혀졌다.
이클로나의 차후 일정이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였기 때문에 제국군 출신이 아닌 선원들은 거의 다 배에서 내렸다.
애초에 제국군 출신이 아닌 선원은 몇 명 남지도 않았고, 이정도 상황이면 아무리 눈치가 둔한 사람도 이클로나와 메를리오네에 뭔가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 때가 되었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는 했다.
그래서 메를리오네와 재편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클로나에 소속된 선원은 고작 27명에 불과했다.
두어달 전에 이곳을 출항할 때만 해도 제국군 출신 선원이 메를리오네까지 합쳐서 120명이 훌쩍 넘었을 텐데, 이제 남은 인원은 50여명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접근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부족한 선원을 보충하기 위한 자들이라는 것에 내 왼쪽 손모가지를 걸 수 있다.
나름대로는 티를 내지 않는다고 한 명, 혹은 두세명씩 상당한 거리를 두고 움직이고 있지만, 선교에서 부두 전체를 보면 흐름이 눈에 보인다.
그날 이클로나에 합류한 인원은 총 50명, 항해 필수 인원에도 못 미치던 선원 수가 단번에 77명까지 늘어났다.
아쉽게도 항해사나 갑판장을 맡을 고급 인력은 합류하지 않았지만, 겨우 배를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한 것이다.
다만 갑판장이 없으면 선원 통솔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임시 갑판장 역할은 알리샤가 맡기로 했다.
뭐, 만약 내가 맡았으면 문제가 되었을 확률이 높기는 하다.
새로 합류한, 그래서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선원이 전체의 65%에 달하는데, 그 사람들은 당연히 젊다 못해 어린 갑판장을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서로 어색함을 풀지도 못한 다음 날 아침, 이클로나와 메를리오네는 바흐카덴을 떠나 남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몰로스 제국의 군항, 힐로템이었다.
힐로템까지 가는 항로는 평온하기는 했을지언정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길이었다.
꼭 마다카트 항구를 떠나서 겪었던 지독한 항해가 생각나게 하는 폭풍지대가 우현 쪽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보다 거리는 더 멀어서 잊을만하면 슬쩍 보이는 정도인데다가 해안에 최대한 붙어서 항해를 했기 때문에 위험도는 현저히 낮았지만,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 나를 포함한 몇몇에게는 실시간으로 정신력을 갉아먹는 원흉이었다.
폭풍에 항로이탈, 암초지대와 식량, 식수 부족 등 항해를 하며 겪을 수 있는 생명의 위협중 대부분을 한 번에 겪었는데 트라우마가 안 생겼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5일쯤 항해하자 제국의 연안경비함과 조우할 수 있었고, 연안경비함의 함장은 이클로나에 승선해서 테일러에게 정중하게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함ㅈ, 크흠, 선장님.”
“그래, 자네 이름이...?”
“맥커스 소령입니다.”
“기억이 나네, 재작년 확대회의 때 본 것 같은데?”
“기억해주시니 영광입니다.”
10분정도 환담을 나눈 맥커스 소령은 우리를 안내할 경비정을 하나 붙여주었다.
그 경비정은 배수량이 고작 150톤쯤 될 것 같은 구닥다리 갤리선이었는데, 그 뒤로 700톤 급 이클로나와 메를리오네가 따라가니 어른들에게 쫓기는 꼬맹이 같은 느낌이라 웃음이 나왔다.
물론 경비정 안에서 노를 젓는 노잡이들은 전혀 웃기지 않은 상황이겠지만, 그것까지 고려하기에는 내 감정이 너무 마모된 것 같다.
그런데 해적선의 노잡이들은 사로잡힌 포로들이라고 하지만, 공식적으로 노예제도가 없는 이 세상에서 저런 해군선박이나 상선의 노잡이를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워낙 험한 일이라서 자발적으로 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앞서서 선도하는 경비정 덕분인지 우리는 이틀 후 별다른 검문 없이 힐로템에 입항할 수 있었다.
원칙적으로 한 나라의 군항에 일개 상선이 입항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 이클로나와 메를리오네가 군에 소속된 선박이라는 것은 비밀도 뭣도 아니었다.
이클로나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놀라는 사람이 딱 한 명 나왔다.
“설마, 설마... 군인이 되어야 하는 건가요?”
“어, 음, 그러니까, 이것 참...”
나는 거의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내게 질문을 던지는 오펜을 보고는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배를 처음 타는 이 녀석은 당연히 모를 테니 미리 알려줬어야 했다.
테일러자식은 전속 전령이라고 맨날 끼고 뭔가 가르치는 것 같더니, 이런 중요한 일을 안 가르쳐 주고 뭐 한 거야?
“어, 오펜.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어. 그리고 네가 정말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배에서 내리게 해줄게. 다른 배에 탈 수 있도록 말이야.”
“하지만...”
“너무 당황하지 말고 잘 생각해봐. 어차피 다른 배에 가면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낫기는 힘들 거야.”
오펜의 경력이 1년만 되었어도 다른 배로 옮겨 타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수습 선원인 이상 다른 배에서 수습 선원으로 사느니 그냥 내가 있는 곳에서 수습 선원을 하는 쪽이 낫다.
그리고 그래야 내가 배를 내릴 때 데리고 갈 수 있잖아?
“네, 리안 항해사님. 잘 생각해 볼게요.”
* * * * *
힐로템은 군항이라서 교역항 같은 활기도, 딱히 볼거리도 없었다.
항구 경계 밖에도 군인과 조선공들을 주 고객으로 하는 유흥시설이 몇 개 있을 뿐, 민간인이 사는 마을과도 꽤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내 시선을 사로잡은 딱 한 가지가 있었는데, 바로 군함이었다.
전장이 60m쯤 될 것 같은 엄청난 크기, 한쪽 현측에만 20문의 대포가 배치된 2층 포열, 하늘 높이 솟은 세 개의 마스트, 빠른 기동과 선회에 특화된 유선형의 날렵한 선체까지, 일전에 보았던 일레드 왕국의 최신예함 엘베도라에 맞먹는 위용을 보여주는 전함이었다.
항구에서 단연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세 척의 전함을 보고 있으면 약간의 욕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신뢰할 수 없는 지휘관이란 내 목에 걸린 시한폭탄 같은 것, 빠른 손절이 필요한 시점이겠지.
힐로템에 입항한 뒤 테일러는 황제의 부름을 받아 바로 수도로 떠나야 했고, 공식적으로 이클로나와 메를리오네는 몰로스 제국 해군의 호위함으로 편입되었으며, 선원들은 모두 제국 해군이 되었다.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다보니 테일러에 대한 적대감이 많이 옅어져서 복수를 위해 굳이 그의 인생을 망가뜨리겠다고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에 회의감이 들기도 했고... 본격적으로 준비된 제국의 해군 창설 계획을 눈으로 확인하니까 계획의 주축인 테일러라는 인간에 대해 겁이 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펜을 시켜 슬쩍 알리샤를 떠봤더니 해군 편입을 원치 않을 경우 기밀 유출 방지를 위해 최소 3개월을 억류하겠다고 대놓고 말해서 어쩔 수 없이 이전 계획을 계속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오펜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애니까 진짜 3개월 억류만 할지도 모르지만, 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는 거잖아?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우르타와 네이선에게 내 속내를 털어놓았다.
“어... 그러니까 테일러 뒤통수를 치겠다는 거야?”
“그렇지.”
“으음, 난 네가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그걸 어떻게 잊겠냐? 아마 내가 늙어 죽을 때도 기억 날 것 같은데.”
“그런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우리가 더 위험하지 않을까?”
“그래, 정 그렇게 선장님이 싫다면 그냥 떠나겠다고 하자. 그게 나을 것 같아.”
우르타와 네이선은 이야기를 듣고 바로 나와 함께 움직이겠다는 의사를 표현했지만, 테일러를 향한 복수에 대해서는 약간 회의적인 듯 했다.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하지만 본인이 직접 당한 것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봐도 복수 따위는 감수해야 할 리스크에 비해 얻는 것이 너무 적었으니까.
심지어 별로 떠나고 싶지도 않은 것 같다.
“너희들이 착각하는 것이 몇 가지 있어.”
“응?”
“그게 뭔데?”
“첫째, 우리는 결코 제국 해군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어. 이미 테일러와 나의 신뢰가 무너졌으니까. 미안하지만 테일러는 나 때문에 너희도 믿을 수 없을 거야. 군에 남는다면 언젠가 희생양으로 죽임을 당할 뿐이겠지.”
“설마 그렇게까지...”
“그럴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테일러는 도대체 어떤 정신구조를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앙금을 다 털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편집증과 비슷한 의심병을 가진 테일러를 신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얘들아, 테일러와 계속 함께하는 것은 너희한테도 너무 위험해서 그러는 거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우르타와 미심쩍은 표정의 네이선의 표정을 확인 한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둘째, 우리는 지금 제국군을 나갈 수 없어. 내가 며칠 전에 몰래 오펜을 시켜서 확인한 일이야. 3개월을 억류한다고 했다더라. 오펜은 아는 것도 없고 하니까 진짜 억류만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그런 말을 하면 아마 죽여서 입을 막으려고 할 걸?”
“에이, 설마?”
“리안, 이번에는 좀 과한 것 같은데?”
두 사람이 이번에는 피식 웃으며 영 못미더워 했지만, 아직 요 녀석들은 내 손바닥 안이다.
“으이구, 답답한 놈들아, 잘 생각해봐. 알다시피 제국의 해군 창설 계획은 극비야. 뭐, 지금쯤이면 다른 나라들도 어느 정도 눈치 챘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내부 정보를 제대로 알고 있는 정보원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3개월 후? 도대체 왜 제국이 정보 유출의 위험을 3개월이나 감수하겠어? 심지어 3개월 후에 풀어주면 제국에 해가 될 확률이 높은데. 나 같아도 차라리 속편하게 죽여 버릴걸?”
그냥 내 뇌피셜이기는 하지만, 아주 가능성이 없는 추측도 아니다.
내 잘못이라면 확인되지 않은 추측을 사실인 것처럼 들리도록 말한 것 정도일까?
내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은 대번에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한 30초쯤 지났으려나? 네이선이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리안 네 생각은 뭔데? 솔직하게 말해서 테일러는 우리가 어떻게 할 상대가 아니라고.”
“맞아, 우리가 어떻게 할 상대는 아니지. 하지만 굳이 우리가 직접 상대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씨익 웃으며 대답하자, 혼란에 빠진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내 얼굴만 보았다.
* * * * *
테일러가 떠난 뒤로 이클로나와 메를리오네는 대대적인 개장에 들어갔고, 개장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훈련이었다.
군인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한데... 문제는 나를 포함한 군 출신이 아닌 사람들의 계급이었다.
알다시피 군대는 시대를 막론하고 상하가 뚜렷한 수직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계급이다.
그런데 우리는 당연히 계급이 없었고, 고작 알리샤나 오엔 정도의 권한으로는 일개 사병이라도 함부로 공식적인 계급을 부여할 수 없었다.
그나마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사람들이라면 계급이 없어도 서로 적당히 해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클로나와 메를리오네에 편입된 100명(각 50명씩)을 제외하고도 내가 눈여겨보았던 대형 전투함에 임시로 배속된 인원들까지, 훈련에 참가하는 인원 중 대부분이 낯선 사람이니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훈련이라고 해도 힐로템 근해에서 하는 기동훈련 정도였기에 밤이 되면 당직자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요 며칠 우리는 군항 밖의 술집이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시비에 휩쓸리고 있었다.
오늘도 군항을 나서는 나에게 끌려온 우르타는 이미 입이 댓 발이나 튀어나온 상태였다.
“리안, 우리 그냥 배에 있으면 안 될까? 나 다리 아파, 응?”
네이선도 떨떠름한 표정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 가봐야 매일 똑같은데 왜 자꾸 가자고 하는 거야?”
그리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우르타의 다리를 본다.
사실 나도 우르타의 다리가 불편한 것은 계속 신경이 쓰이기는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꾹꾹 참으면서 물리적 충돌만큼은 피하는 중이고... 아, 이 새끼들이 그래서 점점 더 수위가 높아지는 것도 같다.
하지만 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생각나는 다른 방법이 없다.
어쩌면 지금의 상황은 약간 어설픈 내 계획에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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