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제국 해군 탈출 계획(2) - 무료 마지막 회차입니다. >
오늘이라고 별다를 것은 없었다.
우리가 방문한 술집에는 어김없이 해군과 조선공들이 테이블을 차지한 상태였고, 우리를 보자마자 대번에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 놈들도 있었다.
이클로나에 새로 편입된 놈들이 민간인의 명령을 듣는 군인이 어디 있냐며 툴툴거리는 것이나, 술에 취해 시비를 거는 것은 기분이 나쁠지언정 이해는 된다.
그런데 우리와 같은 배에 타지도 않는 녀석들이 왜 우리에게 시비를 거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 얼굴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는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된다.
게다가 우르타나 네이선이라면 몰라도 나는 항해사다.
항해사는 배에서 중요한 고급 인력이고, 테일러가 돌아오면 장교로 임용될 것이 확실하다.
그러니까 재편성을 하면 내 부하가 될지도 모르는 녀석들이 무슨 배짱인 것인지···. 진짜 오늘만 사는 놈들인가?
우리는 조용히 비어있는 테이블로 이동하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우리를 노골적으로 보고 있는 테이블은 한 테이블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묘하게 낯이 익은 한 남자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테이블에 앉았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 조용하겠다. 설마 고작 네 명으로 시비 걸지는 않겠지?”
“그런데 어차피 선장님이 돌아오면 우리도 계급인가 뭔가 받는 거잖아? 왜 저렇게 난리지?”
“그러게 말이야.”
우리가 앉음과 동시에 다가온 직원에게 주문을 마친 뒤, 자기들끼리 떠들던 두 사람을 조용히 시킨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이선, 일이 터지면 도망가는 놈 없도록 막아. 단검 던질지도 모르니까 조심하고.”
“어?”
“설명할 시간 없어. 대놓고 막지는 말고, 누군가가 도망가려고 하면 막을 수 있게 주의하라고.”
“그, 그래.”
“우르타는 아직 상처가 완전히 아문 게 아니니까 조심하고.”
“응! 그건 걱정 마!”
지시를 마친 나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서 우리 쪽을 보며 자기들끼리 떠들던 녀석들에게 다가갔다.
나를 보고 어이없다는 듯 피식피식 웃던 놈들이 내가 테이블 바로 앞까지 오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미간에 힘을 주고 말했다.
“소속이 어디지?”
“하, 소속? 이봐, 민간인이 어디서··· 아악!”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이죽거리는 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뒷머리를 재빨리 잡아채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훤히 드러난 놈의 목에 가져다 붙였다.
“씨발! 보자보자 하니까, 야 이 새끼야! 내가 테일러 함장에게 직접 스카웃 된 사람이야. 그런데 내가 너희 같은 병신들 때문에 일 때려치우겠다고 하면 네놈들 모가지가 무사할 것 같아?!”
“이 미친··· 이봐, 그 칼 안 치워?!”
내게 머리채를 잡힌 놈의 맞은편에 있던 녀석이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서는 삿대질을 했지만, 어차피 씨알도 안 먹히리라는 것은 그놈이나 나나 이미 알고 있는 거다.
“민간인? 민간이인? 그럼 테일러도 민간인이냐? 어? 그 사람도 공식적으로는 아직 군인 아니잖아? 대답해, 이 새끼야!”
나는 놈을 닦달하면서 일으켜 세워 세심하게 방향을 조절했다.
뭐, 덕분에 단검에는 조금 소홀해져서 작은 상처가 생기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그냥 침 바르면 낫는 거다.
“피, 피! 미친놈아, 피 난다고!”
당사자의 의견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뭐 어때?
그 뒤로 몇 마디의 쓸데없는 말이 오갔지만 영원히 이 대치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나는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최적의 위치에 선 놈의 동료에게 밀어버렸다.
“꺼져, 오늘이 내가 마지막으로 참는 날이야. X 같은 해군, 어차피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한 번만 더 시비 거는 놈이 있으면 바로 때려치울 거야. 그럼 그 원인이 된 새끼는 무슨 처분을 받을 것 같아? 엉?”
나이스 샷!
내가 밀친 녀석은 균형을 잃은 채로 동료에게 쓰러지듯이 안겼고, 그 둘은 내가 노린 테이블을 뒤집으며 요란하게 넘어졌다.
마음이 급하지만 마무리는 지어야겠지?
“테일러와의 약속 때문에 참는 거다. 하지만 덤비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대신 진짜 목을 걸어라. 네이선! 문 막아. 이놈들 칼 꺼내면 한 놈도 못 도망가게 해.”
전에도 말했지만, 뱃사람끼리 시비에서 날붙이를 꺼내 든다는 것은 목숨을 걸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칼은 안 꺼내는 것이 불문율이기도 하고.
아, 네 명을 이길 수 있냐고? 당연히 못 이기지. 진짜 저놈들이 칼을 들면 깔끔한 계획은 다 망한 거고, 나는 네이선 뒤로 도망갈 거다.
다행스럽게도 놈들도 완전히 미친놈은 아니었는지 내게 맞서 칼을 뽑지는 않았다.
사실 이 계획에서 가장 불확실한 부분이 이 시작 부분이었는데, 여러 가지로 적당히 잘 넘어간 듯하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다음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다.
“으흠, 실례가 많았습니다. 괜찮으세요?”
놈들이 넘어져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테이블에 다가가서 사과를 건네자, 남자가 어색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 뭐, 다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들어보니 군인은 아니신 것 같은데··· 군 관계자세요?”
“아, 네, 뭐···.”
나는 남자에게 어물쩍 대답하며 아직 조용한 그 사람을 슬쩍 보았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우리는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고, 나는 그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나를 알아본 것 같았다.
* * *
두 남자에게 사과를 빙자한 합석을 권유한 나는, 적당히 대화에 어울려 주다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화장실 좀···.”
그러면서 그를 슬쩍 보는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갑니다, 나도 막 가려던 참인데.”
그렇게 함께 술집을 나온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이 없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연기가 많이 늘었군. 아니, 원래 연기는 조금 했던가?”
“오랜만이야, 이름이 뭐였지? 그래, 크리드, 그런 이름이었지?”
“지금은 아르만이지.”
“그래, 아르만. 소속은?
“풉, 너는 그 소속을 묻는 것을 좋아하는군. 내가 밝힐 수도 없고, 밝혀도 믿지 않을 것 아닌가?”
우리는 암묵적인 소변기인 외진 풀숲 앞에 서서(소변을 보지는 않았다) 조용히 말을 주고받았다.
크리드, 아니, 아르만, 관두자, 어차피 이름은 매번 바뀌는 놈이니까.
대충 제국에 적대적인 국가나 단체의 첩보원으로 의심되는 남자로, 향료 제도를 다녀오기 전에 델라 항구에서 우리를 상대로 정보를 캐려던 사람이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리안이라고 했었지? 술집에 들어올 때 나를 아는 눈치더군. 오래된 일도 아니라서 기억이 났다.”
와, 솔직히 내 얼굴은 몰라도 이름까지 기억할 줄은 진짜 몰랐다.
나야 두 번의 생에서 처음 본 첩보원이니까 기억을 하지만, 저 남자는 거의 매일 신분을 바꿔가며 나 같은 사람을 만날 것 아닌가?
그런데 아직도 내 얼굴과 이름을 완벽하게 기억할 정도면 도대체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 거야?
이런 놈과 거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몸에 소름이 돋았지만(진짜 소변을 본 것이 아니다) 이미 내친걸음이니 이제 와서 뒤로 뺄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
“거래 하나 하지.”
“미안하지만 난 내 목숨이니, 정체니 하는 것은 취급하지 않아.”
“나도 그런 사소한 것에는 관심 없어.”
함께 밖을 나온 뒤 처음으로 나와 눈을 마주친 아르만이 잠시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좋아. 뭔데?”
“내가 입으로 떠들어봐야 믿을 수 있겠어? 너도 위에 보고해야지.”
“호오?”
나는 안주머니에서 곱게 접혀있는 종이를 꺼내 아르만에게 내밀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 망할 해군을 곱게 떠나서 돈 많은 졸부로 사는 거야. 뭐, 그 과정에서 테일러가 엿 좀 먹었으면 더 좋고.”
“하하하, 가격이 너무 비싼 거 아냐?”
“그거야 물건 확인한 다음에 결정하시고.”
“자신감이 넘치는군. 좋아. 그런데 말이야, 제국 1함대의 초대 사령관으로 내정된 테일러 제독께서 아끼는 리안 항해사님이 굳이? 이 상황을 내가 믿어야 하나?”
그러면 그렇지. 내 이름까지 기억한 것은 아니고 최근에 이곳에서 정보 수집을 하며 내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물론 사진 같은 것이 없는 세상이라 얼굴까지는 몰랐을 테니 예전에 만났던 내가 소문의 리안이 동일인이라는 것은 오늘 알았겠지만.
“대충 알고 있을 텐데? 내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그것도 모른다면 이 거래는 내가 사양이고 말이지···. 늦었네, 나 먼저 들어간다.”
나는 거의 분당 200번쯤 뛰는 것 같은 심장 소리가 녀석에게 들릴까 싶어 먼저 돌아서는데, 뒤를 간질이는 말이 들렸다.
“요즘 제일 비싼 상품은 룸페르라고 하지. 알지? 그 신예함.”
그 신형 전함의 내정된 이름이 룸페르인가?
아직 이름이 새겨지지 않아서, 정작 그 배를 타는 놈들도 배 이름을 몰라서 1번함, 2번함, 3번함으로 부르는데 저놈은 도대체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들은 거야?
아마도 신형 전함의 정보를 캐려고 온 모양인데, 나는 그 정도까지 해줄 생각도 없고 해줄 방법도 없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선원들이 죄다 나에게 적대적인데 뭘 알아내겠어?
그리고 내가 던진 미끼도 충분히 매력적일 것이다.
* * *
다음 날 저녁,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모인 자리에서 네이선이 당직이라고 하자 우르타가 만세를 불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그런데 네이선도 당직 서?”
난 사실 우르타의 관찰력이 워낙 좋아서 어제 그 아르만이란 놈을 알아보고 헛소리를 할까 봐 조마조마했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다.
이 자식, 자기 관심사가 아니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
네이선도 살짝 짜증이 났는지 약간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어제부터 해병대도 자체 당직 돈다고 한참 동안 말했잖아. 남들이 말할 때는 좀 들어.”
“아하! 그랬나? 하여튼! 그럼 오늘 안 나가는 거지, 리안?”
“그래, 이제 그만 나가자.”
내가 선선히 우르타의 말을 따르자 이번에는 네이선의 눈꼬리가 올라간다.
“뭐야? 어제 무슨 일 있었지?”
“일이야 있었지, 알잖아?”
“아니, 우리가 모르는 일!”
“네이선, 너희가 알아야 할 일이면 내가 진작 이야기했겠지. 괜히 쓸데없는 소문 돌게 하지 말고, 배에서는 그냥 입 다물고 있어.”
네이선은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약간 어색한 분위기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새로 들어온 어린 선원이 약간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말했다.
“리안 항해사님, 지금 기지(항구) 밖에 면회 신청이 들어왔답니다.”
“어? 면회···? 아! 맞다, 내가 그 약속을 까먹었네! 얘들아, 오늘 저녁은 너희끼리 먹어. 난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 아는 ㅅ··· 음.”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는지 한 톤 높게 뭐라고 하려던 네이선이 실수를 깨달았는지 입을 닫았고, 나는 쓸데없는 거짓말을 안 하게 해준 네이선에게 눈인사를 보내고는 바로 배에서 내려 항구 밖으로 향했다.
네이선 녀석, 조만간 이야기를 안 해주면 진짜 제대로 삐질 것 같다.
그나저나 고작 하루 만에 입질이 올 줄은 몰랐는데?
“여기야, 리안! 약속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내가 항구의 경계를 벗어나자 천연덕스럽게 손을 들며 친구인 듯 다가오는 아르만이 보였다.
깜빡하면 나도 저놈이랑 엄청 친한 사이였다고 착각할 정도로 완벽한 연기였다.
하지만 연기와는 다르게 하루 만에 헐레벌떡 달려온 것을 보면 아마도 제대로 낚인 것이 분명했다.
< <82화> 제국 해군 탈출 계획(2) - 무료 마지막 회차입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