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찜찜한 결말 >
처음과 달리 제법 괜찮은 기동을 보이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처음보다 나아진 기동 훈련을 마친 어느 날 밤, 우르타와 함께 뱃머리에 누웠다.
이제 계급도 있고 내 위치가 위치인 만큼, 이렇게 한밤중에 우르타와 단둘이 있을 때가 아니면 사담을 나누기가 어렵다.
얼마 전에 한 번 우르타와 반말로 대화하는 것을 일등 항해사 미치라는 미친놈에게 걸렸는데, 그걸 함장한테까지 고자질해서 대판 깨졌다.
음, 솔직히 말하자면 두 사람은 나를 굉장히 싫어한다.
항해 경험만 놓고 보면 내가 그들보다 많지만, 나름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나를 깔아뭉개지 못해서 안달이다.
“오늘이 며칠째지? 아예 육지를 밟지 않기로 작정했나?”
“모르겠어, 나 이제 온몸이 간지러워. 한 20일은 된 것 같은데···.”
우르타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종아리가 간지러워져서 득득 긁으며 중얼거렸다.
“망할, 나는 그냥 중량 테스트하느라고 많이 쌓는 줄 알았는데···.”
내가 부함장이다.
이클로나에 탑승한 102명의 인간 중에 100명이 내 밑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절대 권력을 쥐고 있는 함장이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아대니, 예전에 테일러 밑에 있을 때보다 배가 돌아가는 사정에 더 어둡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항해 계획과 작전 계획을 부함장한테 제대로 말을 안 해주는 것은 도가 지나친 것 아니야?
내가 알기로 이번 항해의 목적지는 바흐카덴 항구인데, 아무리 늦어도 10일이면 도착할 거리를 지금 20일이 다 되도록 도착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식료품이랑 식수를 가득 채우라고 할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며칠 전에 내린 비로 다행히 식수를 깨끗하게 갈았지만, 만약 비가 안 왔다면 지금쯤 녹색 건더기가 들어간 물을 마시고 있어야 했을 거다.
물을 생각하다 보니 주머니에 챙겨두고 깜빡 잊은 것이 생각났다.
내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서 건네주자, 우르타가 맹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뭐야? 킁, 맛있는 냄샌데?”
“먹어봐, 육포야.”
“응? 나 육포 싫어···. 너무 짜고 맛없어.”
“다른 거야, 먹어봐.”
“진짜?”
의심스러운 눈길로 잠시 나를 보던 우르타는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내 손에 든 육포를 잡았다.
“어? 안 딱딱하네?”
“그만 떠들고 좀, 그냥 먹어.”
“으응, 냄새도 좋은 것 같고··· 고급 육포야?”
끝까지 조잘조잘 떠들던 우르타는 육포를 입에 넣고는 제대로 씹지도 않은 채 벌떡 일어났다.
“우와···?! 이게 육포라고?!”
“아 쫌! 조용히 말해! 미치, 그 미친놈이 깨면 어쩌려고 그래?”
“앗, 미안. 그런데 이거 정말 육포야?”
“그래, 선실 가기 전에 내 방에서 몇 개 더 챙겨줄게. 다시 못 구하니까 아껴 먹어.”
“응! 고마워, 리안!”
그렇게 한동안 잡담을 나누던 우리는 내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굳이 좋은 방을 놔두고 밖에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흠, 남자밖에 없는 배에서 밤에 남자 둘이 한참 동안 같은 방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
심지어 우르타 녀석은 여장을 시키면 정말 감쪽같을 외모란 말이지.
하여간 그런 이유로 밤에는 우르타도 내 방에 잘 오지 않는다.
내가 침대 밑에서 커다란 양철통을 꺼내자, 우르타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임시로 덮어둔 나무판을 치우고 손이 베이지 않도록 조심해서 육포 조각을 한 주먹 꺼내서 건네주자, 육포보다는 양철통에 더 관심을 보였다.
“처음 보는 통인데? 뭘로 만든 거지? 쇠?”
“비슷해.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육포 챙겨서 빨리 가. 나 피곤해.”
“칫, 대답 안 해주는 걸 보니 리안도 모르는구나? 알았어, 나 간다!”
하, 저건 가끔 바보인 건지 천재인 건지 헷갈린다니까?
나는 기가 막히게 팩트를 짚어내고 사라지는 우르타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내 육포가 담긴 내 머리통만 한 양철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늘 아침에 발견한 아무런 장식이 없는 양철통.
캔 따개라는 것이 없는 관계로 과도로 따느라 한참을 끙끙거렸더랬다.
이전에 나왔던 약병 때문일까?
부푼 기대를 안고 통을 열었지만, 그 안에서 나온 것은 고작 육포였다.
사실 구멍이 나자마자 새어 나오는 냄새 때문에 조금 일찍 눈치를 채기는 했다.
물론 이 세상의 육포와 같이 놓고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맛있는 녀석이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오히려 먹으면 없어지는 육포 쪼가리보다는 이 양철통이 더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문제는 내 지식이라는 것이 딱히 전문적인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전생이라 그런 것일까?
내 전생에 대한 기억은 잘 살펴보면 구멍 난 부분이 좀 많다.
예를 들어, 난 대학을 다닌 것 같다.
친구들과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시험을 보고, 여행을 다닌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친구가 누구인지, 들은 수업이 무엇인지, 교수는 누구였는지, 심지어 학교는 어디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이 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재질의 통을 양철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안다.
그런데 이 양철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모른다.
애초에 양철이 도대체 뭐야?
청동 같은 것처럼 합금인가? 아니면 그냥 철판에 도금한 건가?
도금을 했다면 뭘로 도금한 거지?
합금이 아니라 도금이라면 이 세계에서도 재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내가 대장장이가 아니라서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잘 보관해뒀다가 기회가 되면 알아봐야겠다.
만약 물통만 이런 재질의 드럼통처럼 만들 수 있어도, 항해 가능 거리가 부쩍 늘어날 거다.
최소한 나무통에 담긴 물에 비하면 보존기간이 혁신적으로 늘어날 테니까.
* * *
그럭저럭 함대가 함대다운 꼴을 갖추자, 드디어 우리는 바흐카덴에 입항할 수 있었다.
바흐카덴의 연안경비대는 물론이고 일전에 우리를 구해 준 쿠샤 왕국 제1함대 소속 선박들까지 거의 20여 척의 군함이 뛰쳐나오는 이벤트가 있기는 했지만, 사전에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기함 룸페르에 단정 하나가 접근한 이후로 별다른 잡음 없이 입항 허가가 나왔다.
다만 쿠샤 왕국에서 지정해 준 자리는 우리가 늘 정박하던 바흐카덴 교역항은 아니고 한쪽 구석에 있는 다른 항구였다.
목적 자체가 그런 것인지 교역소까지 거리도 멀고 바흐카덴 교역항에 출입항 할 때는 잘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하지만 우리가 교역을 할 것도 아니고, 어차피 식량과 식수만 보급하고 떠날 것이기 때문에 별 상관없는 일이기는 했다.
물론 장기간의 항해에 지쳐 상륙을 요구하는 수병들이 적지 않았지만, 타국의 군함을 들인 것만 해도 많이 양보한 쿠샤 왕국 측에서 난폭한(?) 해군의 상륙을 허가해줄 리가 없었다.
제국의 입장에서도 아직 1함대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만큼 힘으로 윽박지르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테고.
양 측이 이 불편한 관계를 빨리 청산하기를 원하다 보니, 보급은 바로 이루어졌다.
다음 항해 계획이라고 제대로 알려줄 것 같지 않아서 보급품 적재 중인 곳에서 직접 확인하는 중인데, 인부 하나가 접근해왔다.
“저, 높은 분이시죠? 이쪽에 문제가 있어서 좀···.”
“어? 뭔데요?”
“아무래도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쪽으로···.”
솔직히 담당자는 내가 아니고 갑판장이라서 갑판장에게 보내려고 인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요, 가봅시다.”
몇 개의 상자가 부서져 있고 주변에 사람은 하나도 없는 곳에 도착하자, 인부, 아니, 인부로 위장한 아르만이 씨익 웃으며 말을 걸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아르만, 오늘은 좋은 소식이면 좋겠는데?”
“그러지. 어차피 시간이 많지도 않으니까.”
“뭐야? 할 말이.”
“준비는 끝났어. 프롬힐에 도착하면 우리 쪽 사람이 접근할 거야. 그 사람에게 출항까지 일정만 알려줘. 일정에 맞춰서 세부 계획을 조절해야 하니까. 기회는 한 번뿐이고 급하게 진행될 테니 항상 긴장하고 있으라고.”
“좋아. 다른 준비할 것은?”
“뭐, 딱히? 우리는 이게 마지막이군. 그동안 재밌었어, 리안 씨.”
“왜지? 프롬힐에서 일을 마무리해야 할 것 아니야?”
“거기는 내 담당구역도 아니고, 난 다 끝난 일의 뒤처리는 안 해. 그러니 우리는 이제 볼 일이 없는 거지.”
“좋아,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아르만은 큰 목소리로 떠들며 굽실거리기 시작했다.
“네,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로 사람을 보내서 부서진 물품을 더 가지고 오라고 하겠습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갑판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갑판장 모르아 상사는 20년 경력의 선원 출신 40대 남자로, 그나마 배에서 말이 통하는 편이다.
“무슨 일입니까, 부함장님?”
“아, 갑판장. 여기 인부가 실수로 물건을 좀 깬 것 같아요. 다시 가지고 온다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흠, 들어가시죠, 이곳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수고하세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를 뜨기는 했지만, 자꾸 뒤를 돌아보고 싶어져서 참느라 혼났다.
분명히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기는 한데, 왜 이렇게 찜찜하지?
* * *
벨로키나와 케이라 왕국의 가운데에 위치한 프롬힐은 내해에 접하고 있는 제국의 유일한 영지의 항구로, 교역항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교역선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약간 애매한 위치의 항구였다.
하지만 내해에서 제국군이 당당하게 입항할 수 있는 유일한 교역항인지라, 또다시 23일이나 바다 위에 떠 있던 선원들에게는 거의 천국처럼 느껴지는 곳이기도 했다.
윗선에서도 더 이상 수병들을 조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는지, 프롬힐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수병들에게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덕분에 오랜만에 네이선을 만나 함께 술을 마시는 중이다.
“그런데 오펜, 너도 올 줄은 몰랐는데?”
“네이선 하사님이 같이 가자고 하셔서요, 제독님께서도 프롬힐에서는 편하게 쉬라고 하셨거든요.”
“그래, 제독···. 어감 좋네.”
“네?”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너 왜 이렇게 술을 잘 마셔?!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장난스러운 내 호통에 살짝 어깨를 움츠리던 오펜이 이내 헤헤하고 웃는다.
귀여운 녀석. 아직도 그 생사불명의 형이라는 남자를 찾는 모양이지만, 똑똑한 녀석이니 곧 현실을 인정할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계속 마시겠다는 우르타와 네이선을 겨우 방으로 들여보내고(오펜은 진작 재웠다) 내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술기운이 싹 날아간 나는 허리춤에 매달린 단검을 뽑아 들고 살며시 문을 열었다.
“리안 씨, 조용히 들어오시지요.”
“······.”
내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조심히 안에 들어가서 문을 닫자, 태연하게 침대에 앉아있던 남자가 손짓으로 내게 자리를 권했다.
“손님이 자리를 권하는 것이 어색하기는 합니다만, 시간이 없으니 빨리 끝내시죠.”
“누구야?”
“이미 아시는 것 같은데 굳이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까? 일정만 알려주시면 조용히 사라지겠습니다.”
“7일 후 아침, 케르빈 섬 북동쪽까지 진출했다가 돌아올 거래. 예상 소요 일수는 20일.”
“흐음, 그럼 출항 전날 이클로나에서 불이 날 겁니다. 그때 대피를 안내하는 수병의 지시를 따르십시오.”
“잠깐, 그럼 네이선은? 그리고 가능하면 오펜이라는 친구도 같이 빼줬으면 하는데.”
“네이선 하사는 진화 작업에 차출될 겁니다. 오펜이라는 친구는 뭐, 이야기는 해보겠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시죠.”
“그쪽도 실수한 게 있으니까 이 정도 서비스는 가능하지 않아?”
“계획에 손을 대는 것은 제 소관이 아니라서요. 대신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당신이 건네준 자료, 테일러 제독을 낙마시키는 데 유용하게 쓰일 것 같습니다. 그 사람, 안에도 적이 많더군요.”
“후, 알았어. 대신 가능하면 오펜도 부탁해.”
“그럼 이만.”
할 말을 마친 남자가 열려있는 창문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고,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긴장을 털어냈다.
오펜을 구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일단 이 위태로운 상황은 이제 끝인 거다.
게다가 향료 제도로 다녀오는 항해에서 있었던 굵직굵직한 일들을 테일러의 판단 미스로 보이게끔 살짝 조미료를 친 항해일지를 몇 장 넘긴 것도 효과가 있는 것 같으니, 탈출은 물론 복수도 성공적일 것 같다.
< <85화> 찜찜한 결말 > 끝
작가의말
양철은 철판에 주석 도금을 한 것을 말하네요.
이.흙.살 세계에도 주석잔은 있습니다.
문제는 주석이 귀금속입니다.(현실도 마찬가지죠)
가격 차이는 있지만, 금잔이나 은잔이나 주석잔이나 귀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추가로, 설정상 이.흙.살의 유리는 현대의 유리보다 내구성도 약하고 완전 투명하게 만들기도 힘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