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87화 (87/420)

< <87화> 안녕, 이클로나 >

우리가 갑자기 자기들을 향해 돌격해 오는 것은 상정하지 않았는지, 북동쪽을 막고 있던 네 척의 일레드 군함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후방에 폭풍지대를 놓고 있으면 나 같아도 좀 안심했을 것 같기는 하다.

덕분에 우리는 대가리(함수)에 포탄이 박히는 대참사를 피해 놈들의 대열 사이로 파고들 수 있었다.

물론 그 외에 다른 곳에는 거의 열 발에 가까운 포탄을 얻어맞기는 했지만, 일단 항해는 가능하니까 나중에 신경 쓰도록 하자.

뒤따라오는 다른 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라고 준비하고 있던 양현의 포를 한 번씩 쐈는데, 우현 포대에서 럭키 샷이 터졌다.

함미 쪽 하부를 얻어맞은 적함 한 척이 대열을 이탈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이, 아마도 키가 망가진 모양이었다.

우리가 포를 쏘고 그대로 지나치자 적들은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우리를 쫓자니 뒤따라오는 다른 아군이 걸리고, 놔두자니 그냥 탈출하거나 오히려 뒤를 잡힐 판인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살아서 돌아가기만 해도 제국과 외교적인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하지만 곧 우리를 포기하고는 다른 아군을 공격하는데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반격하기는 힘들고, 남쪽으로 함수를 돌려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사실 그런 판단이 나올 정도로 이클로나의 상태가 안 좋기는 했다.

중요 구조물들이야 별문제가 없었지만, 전체적인 성능은 크게 떨어진 상태였던 것이다.

폭풍 속으로 직진하면서도 과연 이게 최선이 맞는지 계속 곱씹어야 할 정도로 말이다.

우리 뒤를 바짝 쫓던 룸페르는 무사히 폭풍지대로 진입했지만, 나머지 두 척은 운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바르노스는 적함의 포격에 재수 없게도 메인 마스트가 부러지며 추진력을 거의 잃어버려서 대열에서 이탈했고, 마지막에서야 부랴부랴 함수를 돌리던 메를리오네는 쏟아지는 집중포화를 이기지 못하고 완파 당했다.

그나저나 이거, 일단 한번 해본 짓이라고 무모하게 덤비기는 했는데, 진짜 여기서 살아나갈 수는 있는 걸까?

“갑판장! 지금 당장 전투 배치 풀고 보수에 최선을 다하세요! 무조건 침몰만 면할 수 있도록! 아시겠죠?”

“그런데 부함장님, 아직 저놈들이 쫓아오고 있는뎁쇼?”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을 손바닥으로 받으면서 말했다.

“저놈들이 과연 어디까지 쫓아올 것 같아요? 우리랑 다 같이 죽겠다고 덤비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하, 진짜 살아남으면 부함장님이 내 형님이오.”

“난 늙은 동생 안 키워요. 빨리 움직여요!”

갑판장이 소리를 지르며 선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을 확인한 나는 정면에 집중했다.

진짜 여기서 뒤지기 싫으면 방향을 잘 확인해야 하는 거다.

이 폭풍지대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는 몰라도, 파도를 잘 타서 남쪽으로 돌렸다가 약간 서쪽으로 틀어서 폭풍지대를 나가면, 잘하면 살아서 땅을 밟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살아남기만 하면, 제국 1함대는 와해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떠나겠다고 해도 말릴 사람도 없을 거다.

우리 뒤를 따르는 룸페르에서 네이선과 오펜도 살아남는다면 금상첨화겠지만, 현실적으로 둘 다 살아남기는 조금 어렵겠지.

다행히 전투 보직을 포병으로 받은 우르타는 살아남아서 방금 나한테 손을 흔들고 갔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지 30분도 채 지나기 전에 바다는 미친 듯이 거칠어졌다.

파고는 대략 4미터, 함수로 계속 파도를 받다 보니 이제 웬만한 크기의 파도는 긴장도 안 된다.

그나저나 이제 일레드 놈들도 떨어져 나갔고 슬슬 방향을 돌려야 하는데, 어떻게 돌리지?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만 방향이 틀어지면 바로 전복될 것 같은데···.

게다가 걸레짝도 안쓰럽게 생각할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양 현의 상황을 생각하면, 괜히 방향 돌리면서 선측면으로 파도를 받았다가는 전복되기 전에 용골이 부러져서 배가 수수깡처럼 부러질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갑판장! 상황은 어때요?!”

“난장판입니다! 우현은 침수구역이 세 구역, 좌현은 한 구역입니다. 나머지도 응급 수리는 했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구요.”

“이런 젠장, 방향을 돌려야 하는데···!”

“꿈도 꾸지 마십시오! 지금 돌렸다가는 바로 전복입니다!”

“에이씨, 나도 알아요!”

혹시라도 폭풍이 약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로 한참을 그렇게 순간을 모면하며 버텼지만, 폭풍은 수그러들기는커녕 갈수록 심각해졌다.

그리고 결국 한계에 다다른 이클로나가 온몸으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부함장님! 미즌 마스트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등 항해사 사르헨이 보고해 왔고,

“함수 하부는 수복 불가입니다! 닻은 줄을 끊어 파기했습니다!”

다른 이등 항해사 아인델프가 보고했으며,

“부함장, 이클로나의 비명이 안 들리시오?! 어떻게 좀 해보쇼! 살려준다며!”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어진 갑판장이 거의 울다시피 악을 썼다.

나는 이를 악물고 울부짖는 바다를 노려보았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수준의 미친 폭풍이었다.

거의 30초마다 이클로나의 함교보다 높은 파도가 밀려들었고, 파고를 가늠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바다가 미쳐 날뛰었다.

아무리 시간의 흐름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지만, 그래도 아직 밤이 되었을 리가 만무함에도 불구하고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언제부터인가 뒤를 따라오던 룸페르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타륜을 쥐고 있는 손에 감각이 없어질 지경이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는 순간 이클로나에 탑승한 전원의 목숨이 끝난다고 생각하면, 팔이 부러지더라도 놓을 수가 없는 거다.

그때 응급처치도 하지 못했는지 갑판장이 여전히 상의에 피가 흥건한 상태로 함교에 올라왔다.

그리고 잠시 나를 지켜보더니, 타륜을 잡은 내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방금 사르헨이 빠졌습니다.”

“······.”

“미리 말씀 못 드렸지만, 에반 중위도 하부 갑판에 내려가서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씨발···.”

“어차피 확률이 낮은 도박이었지 않습니까? 그래도 일레드 놈들이 계속 찝찝해할 테니 그냥 거기서 죽은 것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보고를 갑판장이 해요? 아인델프 이등 항해사는?”

“아인델프 소위는 최후까지 메인 마스트를 지키겠답니다.”

나는 갑판장과 아마 마지막이 될 대화를 나누면서도 정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이클로나의 마스트보다 높을 것으로 보이는, 전생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스케일이 커지니까 오히려 무덤덤해진다.

모두에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어쩌겠어?

이런 상황을 두고 불가항력이라고 하는 거잖아?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합니다.”

“크흠, 생각해 보니까 살아서 부함장의 동생이 되는 것도 그리···.”

갑판장의 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참을성 없는 파도가 우리를 덮쳤고, 이클로나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들으며 나는 의식을 잃었다.

* * *

- 24일 전 마르셀 항구 인근 해상, 고드실카 호 선교 -

공포에 질려 하얗게 뜬 얼굴을 한 항해사가 선교로 뛰어왔다.

“선장님! 포격이, 포격이 멈추지 않습니다···.”

“갑판장은?”

“그게, 지금 단정을 내리는 중입니다.”

“자네도 가게.”

“네? 선장님!”

“그동안 못난 선장 밑에서 고생했는데, 마지막까지 좋지 못해서 미안하네.”

“흑, 선장님···.”

“어서 가게. 전 갑판장처럼 의리 있는 사람은 아니라서 자네가 늦으면 버리고 갈 거야.”

“선장님은 어쩌시려구요?”

선교 근처에 맞은 포탄 때문에 잠시 균형을 잃었던 고드실카 호의 선장, 루이스는 엉덩이를 반쯤 빼고 있는 항해사를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까지 탈출하면 단정도 위험하지 않겠나?”

루이스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탑승 유무와 상관없이 단정이라고 무사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다짜고짜 포격을 퍼붓는 놈들의 목적이라면 살인멸구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마지막까지 살아보겠다고 노력하는 것을 말리고 싶지는 않지만, 확실히 오늘 고드실카 호에 생존자는 없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고드실카 호를 뒤따르듯이 네 척의 일레드 군함이 급하게 출항한 것부터 이상했다.

심지어 거의 만재 흘수선까지 잠기도록 상품을 채워 넣은 고드실카와 군함의 속도가 같을 리가 없건만, 이틀째 가시범위 안에 있는 군함들을 발견하는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망망대해에서 무슨 재주로 군함들을 따돌릴 수 있을까?

재빨리 적재화물까지 다 버리게 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주변에는 도움을 청하거나 눈치를 보게 할 만한 선박조차 없는 것이, 아마 지금 순간을 기다린 것이 분명했다.

아무런 증거도 남지 않도록 고드실카 호를 세상에서 지워버리기 위해서 말이다.

잠깐 상념에 빠진 사이 항해사는 이미 선교를 떠났고, 선체가 눈에 띄게 기울어져서 더 이상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서 루이스는 한참을 고민했다.

도대체 일레드 해군이 보잘것없는 고드실카 호를 공격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범죄에 연루된 의혹이 있다면 정선시키고 수색이나 조사를 했어도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포 하나 없는 소형 상선인 고드실카는 멀리서 대포만 쏘아대도 대응할 방법이 없는데 무슨 배짱으로 해군의 지시를 거절하겠는가?

공격을 받자마자 혹시나 해서 바로 백기를 올렸지만, 그들은 묵묵히 대포를 쏘아댈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고드실카는 늘 자신을 받쳐주던 바다의 품에 천천히 안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바티아넨 왕국에 내전이 발생했다고 했었다.

데이먼 3왕자가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을 규합해서 반기를 들었다던가?

3왕자의 뒤에 제국이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 소식이 들리고 나서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갑판장이 배를 떠났었지.

마지막 술자리에서 루이스에게도 이제 그만 은퇴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그저 ‘갑판장도 늙었구나.’라고만 생각했지, 두 사건을 연관 지어 생각하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두 사건을 붙여서 생각해 보니, 일레드 왕국의 공격을 받을 만한 일이 있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루이스는, 기억력도, 사고력도 둔해진 자신의 머리를 원망했다.

치사한 사람 같으니라고, 이왕이면 제대로 알려주고 갈 것이지.

갑판장은 루이스의 머리가 예전처럼 빠르게 회전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리안이라고 했던가? 눈치도 빠르고 일도 잘하는 젊은 친구였다.

물론 이 사건의 원흉이기는 하지만, 딱히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면 그 친구의 입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니까.

아마 그때의 일이 아니었다면 조만간 자신은 은퇴하고 그 친구에게 고드실카 호의 선장 자리를 물려줬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루이스는 고드실카를 처음 보던 날이 생각났다.

형님의 사망 소식과 함께 유산이라며 고드실카 호가 주어졌었는데, 루이스는 저주받은 배라고 욕하면서 불태워버릴 생각까지 했었다.

결국 형님처럼 루이스도 배를 타게 되었지만, 형님처럼 슬픔과 함께 고드실카를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뭐, 이제는 고드실카를 누군가에게 물려줄 일은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다만 애석한 것은, 루이스 자신도 형님처럼 바다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부디 배에서 내린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불똥이 튀지 않기를···.

케이라 왕국의 상선, 고드실카 호는 일레드 왕국의 마르셀 항구를 떠난 이후로 행적이 끊어졌다.

시간이 흐른 뒤 마르셀 항구 근방에서 고드실카 호의 것으로 추측되는 몇 개의 부유물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고드실카 호는 나타나지 않았고, 이전의 다른 수많은 실종 선박들처럼 고드실카 호도 그렇게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몰로스 제국이 야심차게 준비한 원양 함대가 발족과 동시에 노던테라로 향하는 항로를 개척하다가 실종되었다는, 더 큰 소식이 대륙을 떠들썩하게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 <87화> 안녕, 이클로나 > 끝

작가의말

지금까지 리안의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부터는 로빈슨 크리안의 무인도 이야기가... 쿨럭;;

.

.

.

.

.

비온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했습니다!

비가 다 온 다음에 말이죠.

비가 그쳐야 땅이 굳어지는 겁니다.

뭐, 그렇다구요...

역시 주인공이라하면 역경을 이겨낸 증거(절름발이, 외팔이, 얼굴에 깊은 흉터, 외눈, 뭉개진 코, 짝귀 등등)가 하나 필요하지 않을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