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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88화 (88/420)

< <88화> 구사일생 >

어우, 목말라 죽겠다. 농담이 아니고 진짜 죽을 것처럼 고통스럽다.

어제 애들이랑 술을 많이 마셨던가?

아니, 잠깐만··· 어라? 내가 아직 살아있나? 분명히 이클로나에서···.

그런데 목이 너무 마르다.

기절하고 바닷물이라도 마신 걸까?

그런데 기절한 사람이 바다에 빠져서 살아남는 게 말이 되나?

영화에서 보면 폭풍에 난파한 선박의 생존자가 무인도 해변에서 깨어나곤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폭풍을 겪으면 그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인지 깨닫게 될 거다.

아무리 심폐지구력이 뛰어나도, 눈에 보이지도 않던 섬까지 밀려가서 살아남을 정도로 바다가 만만하지가 않아.

물론 살아남은 내가 그렇게 말하면 조금 어폐가 있기는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몸을 겨우 일으키며 주변을 살펴보니 다행스럽게도 무인도는 아닌 것 같았다.

바닥은 이름 모를 푹신한 풀이 깔린, 급조한 티가 나는 자리였지만, 일단 천장과 벽이 있다.

이런 곳에 곱게 눕혀졌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구조되었다는 뜻이니까, 일단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뜻인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내가 정신을 잃은 시점에서 살아서 도착할만한 곳에 사람이 사는 곳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의 확장을 막았다.

지도를 더듬어보면 우리가 일레드 왕국에게 공격당한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는 일레드 왕국 북단이고, 거리는 최소로 잡아도 400km 이상은 떨어져 있었다.

배를 타고 가도 최소한 이틀은 가야 하는 거리를 맨몸으로 파도에 떠밀려왔다는 것은 질 나쁜 농담도 못 된다.

혹시 내가 도착한 곳이 노던테라가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생기고 있는데, 입구를 막고 있던 거적(사실 그쪽이 입구인지도 몰랐다)이 들리면서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 드디어 깨어났구만? 역시 예언대로 여기에서 죽을 운명은 아닌가 보군, 흐흐흐.”

그 사람은 몸을 반쯤 일으키고 있는 나를 보며 히죽 웃으며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어··· 누구십니까?”

아니, 나도 원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하는 소리도 이상하고, 하고 있는 모양새도 영···.

옷은 비교적 멀끔한데, 머리와 수염이 난 꼴은 아주 광인이 따로 없다.

“보통 이런 경우에 생명의 은인이라고 부르지? 목이 마를 것 같은데, 일단 마시고 이야기하지. 목소리가 영 듣기 껄끄러워.”

나는 그가 내민 투박한 나무잔에 든 물을 허겁지겁 마셨다.

물을 보니까 당장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것을 어떡해?

컵에 들어있는 물을 다 마신 뒤, 조금 멀쩡해진 정신으로 질문을 던졌다.

“크으, 혹시 절 구해주신 분이십니까?”

“그렇지. 내가 바로 자네를 구해주신 분이지.”

“그,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뭔가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일단 은혜를 입었으면 갚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

일단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목숨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하나 싶기는 한데, 보통 이럴 때는 겸양의 대답을 하게 마련이니까···.

“은혜! 그렇지, 은혜! 당연히 갚아야겠지? 그렇다면 나를 이곳에서 나가게 해주면 되네!”

“네?”

···보통은 그렇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방금 전에 제 발로 들어온 사람이 나가게 해달라니, 그냥 걸어서 나가면··· 설마?

나는 갑자기 엄습하는 불안감에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있습니까?”

내 질문을 들은 남자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가 어디냐고? 뭐라고 해야 할까, 섬일세.”

“섬이라니요?”

“그냥 섬일세. 이름도 없고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어. 자네가 타고 온 배를 잡아먹은 ‘울부짖는 바다’ 어딘가에 있는 섬일세.”

‘울부짖는 바다’는 내가 들어온 폭풍 해역의 별명이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람이 사는 섬이 있다는 이야기는 소문으로도 들어본 적도 없다.

차라리 애들도 안 믿을 상상 속의 괴물이나, 마법사가 존재하던 고대의 강력한 마도구가 있다는 소문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진짜 전생의 판타지에나 나올법한 ‘마도시대’라는 고대도 증거가 없어 그냥 신화 정도로 치부되니까, 둘 다 현실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나는 거의 패닉에 빠져 남자에게 연거푸 질문을 퍼부었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흙수저로 태어나 밑바닥부터 박박 기어서 이제 좀 살만해지려니까 이번에는 로빈슨 크루소가 되게 생겼다.

조금 이상한 사람인 것 같지만 이야기라도 나눌 저 아저씨라도 있으니 다행··· 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다.

일단 구조를 바라는 것은 번개를 열다섯 번 연속으로 맞고 살아남을 확률보다 희박할 것 같고, 둘이서 뗏목을 만든다고 해도, 그 지랄 맞은 바다를 어떻게 뗏목으로 건너겠어?

아니지, 이 아저씨도 표류했다고는 하지만 혼자가 아닐지도 모르잖아?

아저씨는 이곳에 표류한 지 7년이나 되었다고 했고, 그동안 뭔가 방법을 생각해 놓은 것이 있으니까 나가게 해달라고 했겠지.

“아저씨, 다른 분들은요? 다른 분들도 있는 거죠? 함께 표류했다던가?”

“하,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말이야. 내가 이렇게 신나서 환자를 붙잡고 계속 이야기를 하겠나?”

“에이, 놀리지 마세요, 이 섬에서 나가게 해달라면서요? 방법이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한 거 아니에요?!”

“방법! 그래! 내가 7년! 무려 7년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서 탈출하는 것만 꿈꾸며 생각한 방법이 있지! 그 방법을 이제 자네들이 이루어 주어야 하는 거고.”

“네? 자네들이요?!”

“이런, 너무 신나서 깜빡했군! 조금 더 쉬어! 빨리 회복해야 은혜를 갚을 것 아냐?”

말을 마친 그는 내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부랴부랴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혼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정신적으로 약간, 아주 약간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거 괜찮은 건지 잘 모르겠네.

나는 퉁퉁 부은 왼쪽 발목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발가락도 움직이고 감각도 살아있는 걸 보니 심각한 부상은 아닌 것 같지만, 정확한 의학적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 치고는 몸의 다른 곳들은 상태가 굉장히 양호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아저씨, 분명히 ‘자네들’이라고 했지.

나 말고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 * *

자신을 드웰이라고 밝힌 남자는 가끔 들어와 내 상태를 살피고 그럭저럭 먹을 만한 죽 같은 것을 주는 등 꽤나 신경 써서 내 회복을 도왔다.

그리고 저녁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찾아왔다.

“우, 우르타?!”

“리안! 살아있었구나!”

“부함장님, 살아계셨군요!”

“부함장님!”

우르타와 함께 들어 온 수병 네 명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반겼다.

다들 시퍼런 멍과 자잘한 상처는 많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굉장히 건강해 보인다.

그런데 한두 명이면 몰라도 이렇게 많은 인원이 살아남을 수도 있나?

이틀이 지나서야 발목의 붓기가 제법 가라앉았고, 나는 어설프게 만든 목발을 짚고 처음으로 밖으로 나섰다.

드웰 씨의 말에 의하면 그가 구조한 사람은 모두 27명이었다.

그중에 어제까지 5명이 사망했고, 지금 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22명이라고 했다.

돌아다녀도 될 정도로 쌩쌩한 녀석들은 첫날 보았던 우르타 외 4인과 추가로 회복된 두 명뿐이지만, 다른 15명도 대부분은 회복 중이라고 한다.

대부분은 말이다.

그래서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여기까지 왔다.

옆에서 나를 따라오던 우르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아? 아파 보이는데?”

“어,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아. 그보다 너는 다리 괜찮아?”

내가 다리가 아프다 보니 갑자기 우르타가 다친 다리가 생각난다.

붕대를 풀고 시간이 꽤 지났는데, 얼마 전까지도 통증이 남았는지 걸을 때 가끔 표정을 찡그리고는 했다.

“응, 아직 뛰거나 하면 조금 아프기는 한데 이제 괜찮아. 선의님도 괜찮다고 하셨고.”

“다행이네. 그래도 당분간은 조심하고.”

우르타와 떠드는 사이에 숲이 끝나고 탁 트인 해변이 펼쳐졌다.

그리고 한쪽에는 흉물스럽게 모래톱에 얹힌, 이클로나의 잔해 -그 처참한 모습을 어떻게 이클로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도록 산산조각이 나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로 선체가 완전히 박살 나 있는 이클로나의 모습은, 혹시나 하는 내 기대를 완전히 짓밟아버렸다.

저 정도로 망가진 선박을 수리한다고 하면, 큰 항구의 조선소에서도 고개를 내저을 것이다.

그래도 원래 목적은 달성할 가능성이 조금 있을 것 같다.

일단 선체가 바닷물에 완전히 잠겨있는 상태도 아니었고, 가까이에서 살펴보니 부함장실 쪽도 나름 손상이 적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 우르타, 부탁할게. 지금 그거 못 찾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걱정 마! 내가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 그래. 부탁한다.”

약간 떨떠름한 기분으로 부탁한다고 말하자, 우르타는 재주 좋게 잔해 사이를 헤치며 부함장실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우르타는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리안, 이거 진짜 신기하다! 유리인데 왜 안 깨졌지?”

강화유리라던가 뭐 그런 종류는 아니겠지만, 유리 자체가 두꺼워서 기대를 했었는데, 역시나 내 약병은 온전하게 내 방을 굴러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배가 부서질 정도의 충격이었으니 두꺼운 유리라도 깨졌을 수도 있어서 남은 약이라도 최대한 주워 오라고 시켰는데, 다행히 온전한 약병을 들고 왔다.

덤으로 시키지도 않은 양철통과 은행 카드, 금화 몇 개, 목걸이 같은 잡다한 물건들도 들고 왔다.

양철통은 그냥 다른 것들을 담는 용도로 가져온 것 같은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현 상황에서는 양철통이 제일 가치 있어 보인다.

화폐라던가, 귀금속이라던가, 이런 것들은 문명사회에서나 귀하지, 물물교환도 필요 없는 무인도에서는 쉽비스킷 한 조각만도 못하다.

“리안, 그런데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 격실이 꽤 있던데, 거기도 털어올까?”

“털긴 뭘 털어? 어차피 이 섬에서는 필요 없는 것들이야. 일단 돌아가자, 나중에 가지러 와도 되잖아.”

“쳇, 나도 다음에 털자는 말이었어!”

나와 우르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리가 향하는 곳에는 나와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모르아 갑판장과 두 명의 수병들이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 * *

내 마음대로 항생제라고 부르기로 한 약 덕분인지 더 이상의 추가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22명이 모두 거동이 가능하게 되어 그동안 기다렸던 드웰의 야심 찬 탈출 계획을 보러 가는 중이었다.

상세가 가장 심각했던 수병 하나와 모르아 갑판장은 아직 체력이 부족한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지만, 절대로 빠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마스트에 자기 몸을 묶은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아인델프 소위는 양팔이 부러져서 부목을 대고 나무껍질로 묶고 있었는데, 목발을 써야 하는 나보다 더 불편해 보인다.

그 정도로 우리에게는 희망이 필요했다.

이 섬에서 죽게 될 것이라는 공포를 이겨낼 희망 말이다.

우리가 머물던 곳에서 30분 정도 걸었을까?

이클로나의 잔해가 있던 해변이 아닌 다른 해변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해변에는 드웰이 7년이나 공을 들였다는 야심 찬 탈출 계획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음, 드웰 씨? 이 누더기는 도대체 뭐죠?”

“그러게···. 진짜 누더기야.”

우르타가 질린 표정으로 내 말에 동의했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그리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아, 한 사람만 빼고.

“뭐? 누더기?! 다시 말해봐!”

“아, 아, 일단 진정하시구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저건···.”

우리 앞에 보이는 것은 배수량 500톤 정도의 중형 상선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형 상선이었던 ‘무엇’이었다.

글쎄, 그걸 과연 ‘배’라고 불러야 할까?

프랑켄슈타인, 누더기 골렘, 대충 끼운 직소 퍼즐, 대충 이런 느낌이다.

“아무것도 없는 섬이다! 이 섬에서! 나 혼자서! 저 엄청난 놈을 수리한 거야! 물론 네놈들에게는 볼품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제 너희들이 타고 온 배에서 범포(돛을 만드는 천)를 골라서 돛만 만들어 걸면, 이 섬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되는 거다!”

“미안합니다, 드웰 씨. 정말··· 고생하셨군요.”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뜬 채 굵은 눈물을 흘리는 드웰을 보면서 가볍게 말을 내뱉은 것을 반성했다.

비록 볼품은 없지만, 그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고, 이 섬에서 홀로 7년을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었으며, 우리의 탈출을 책임질 고마운 존재였다.

그렇게 쉽게 농담으로 말할 수 있는, 그런 배가 아닌 것이다.

겨우 감정을 수습한 드웰은 우리에게 그의 역작을 안내했다.

드웰이 조선공 출신이라더니 과연 보기에 이상할 뿐, 성능에는 별문제가 없어 보이기는 했다.

일단 배가 바다 위에 떠 있잖아?

“그런데 아무리 돛도 사람도 생겼다고는 하지만, 과연 저 배로 ‘울부짖는 바다’를 통과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내 질문에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드웰에게 곤란하다는 표정의 아인델프가 말을 걸었다.

“드웰 씨, 이 배가 보기보다 잘 만들어졌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배수량은 500톤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은데요? 비록 완전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결국 폭풍을 못 이겨 700톤급의 이클로나는 완파되었고, 드웰 씨도 들으신 것처럼 1,600톤급인 룸페르도 침몰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입니다. 너무 낙관적인 판단 아닙니까?”

“흥, 내가 7년 동안 이놈만 수리하고 있었을 것 같아? 있어, 이 섬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이.”

광기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자신만만하게 중얼거리는 드웰을 보고 우리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고작 23명으로 저렇게 큰 배를 움직이는 것도 걱정이기는 하지만, 일단 드웰이 말을 아끼고 있는 그 ‘비장의 방법’을 알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저 배를 타지 않을 거다.

드웰의 배를 소개받고 숙소로 사용하는 집(?)에 들어 온 나는 최근 들어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찜찜한 느낌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뭔가 굉장히 부자연스러운데, 그게 뭔지 콕 잡히지가 않는다.

심지어 가끔은 누가 나를 스토킹(?)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다들 한 번쯤 경험하지 않나? 한밤중에 머리를 감다 보면 약간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그런 오싹한 기분 말이다.

< <88화> 구사일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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