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89화 (89/420)

< <89화> 재회 >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드웰은 ‘울부짖는 바다’를 통과할 수 있는 비장의 방법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클로나의 잔해에서 쓸모 있는 물건들을 꺼내고, 범포를 포함해서 재활용 할 수 있는 부품들을 드웰의 배로 옮기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인력으로 하려다 보니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일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나를 포함해서 건강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급할 것은 없었다.

계속해서 신경을 건드리는 무엇인가에 집중하며 재활을 하던 어느 날, 작업을 나갔던 수병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거의 숨이 넘어갈 정도로 급하게 뛰어온 그는 나를 보더니 바로 소리를 질렀다.

“부, 부함장님! 생존자를 발견했습니다! 헉, 헉, 생존자입니다! 다른 생존자요!”

“뭐?!”

다른 생존자라니?

벌써 이 섬에 도착한 지도 7일이나 흘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생존자가 발견될 수가 있나?

드웰은 확실하게 이 섬에 ‘살아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다른 생존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7일 동안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살아남았다는 말이 되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일까?

“숨 좀 고르고 똑바로 말해봐. 다른 생존자라니? 어디에서?”

잠시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던 수병이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는 대답했다.

“저희는 드웰 씨의 배에서 작업 중이었는데 갑자기 우르타 상병이 사람이 있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희도 설마 하면서 그쪽을 봤는데 진짜 사람이 걸어오고 있는 겁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나요.”

“그래서 누구야? 우리 배 사람들이야?”

“이클로나 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이클로나에 탑승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지?

설마 우리 이후에 또 다른 배가 난파한 건가?

설마 일레드 왕국 놈들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7일의 갭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클로나는 이례적으로 섬까지 들이친 폭풍에 밀려 해안가 모래톱에 걸리는 바람에 생존자가 많을 수 있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두 명이 살아남은 것만 해도 운이 좋은 것이리라.

“그, 해병대 하사라고 하던데, 이름이 뭐였더라? 부함장님도 아는 분이라고 하던데요? 기함에 타던 사람들이라고···.”

나는 믿을 수 없는 기적 같은 소식에 내 귀를 의심했다.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거나 환청이 들리는 것은 아닐까?

“설마··· 네이선?”

“아, 맞습니다!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누구도 룸페르가 침몰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생존자들 중에 룸페르가 멀쩡하게 폭풍 지대를 탈출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나 역시도 네이선이나 오펜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죽음을 확인한 것도 아니니까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려고 하기도 했었지.

“가자.”

“네?”

“당장! 네이선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아니, 아침까지만 해도 발목이 아파서 제대로 못 걷는다고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네이선이 살아있다잖아! 기어서라도 가야지!”

힘들다고 투덜거리는 수병을 버려두고 드웰의 배가 있는 쪽으로 5분쯤 걸었을까?

맞은편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진짜 오고 있네?”

“거봐! 내 말이 맞지? 리안이라면 오고 있을 거라니까?”

“리안, 다리도 아프다면서 왜 여기까지 왔어? 어차피 내가 갈 텐데.”

나는 초췌한 모습으로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는 네이선의 모습을 보고 겨우 말을 꺼냈다.

“···네이선, 살아 있었구나. 고맙다, 살아줘서.”

“하하, 내가 겨우 그 정도 폭풍으로 죽을 남자야? 너희도 살아서 정말 다행이야.”

거칠게 찢겨진 네이선의 왼쪽 볼의 상처를 잠시 응시하던 나는, 시선을 돌려 네이선을 부축하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오펜, 너도 살았구나?”

“네! 부함장님. 다시 뵙게 되어 너무 좋아요!”

“그래, 나도 널 다시 보게 돼서 좋구나. 너는 다친 데 없니?”

“네, 하지만 네이선 하사님이 조금···.”

“일단 가자, 네이선은 빨리 상처를 치료하는 게 좋겠다.”

* * *

치료와 식사를 마친 네이선과 오펜은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가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특히 네이선은 얼굴의 상처뿐만 아니라 등과 옆구리, 허벅지 등 전신에 상당히 큰 상처를 입고 있어서, 왜 우르타와 오펜이 굳이 부축까지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떻게든 치료를 하겠다고 이미 염증이 생기기 시작한 상처들을 살펴보던 나는 혀를 내둘렀다.

보통 사람이 이정도 상처를 입었다면 기절하거나 거동이 불가능한 수준일 텐데, 네이선은 폭풍을 헤쳐 나온 것도 모자라 우리가 있는 곳까지 걸어 온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정신을 차린 그들에게 룸페르의 최후를 들을 수 있었다.

믿을만한 사람이 부족했는지 함대 기함 룸페르의 함장을 겸임하던 테일러는 폭풍 속에서도 침착하게 조함을 했다.

테일러 역시 폭풍이라면 적지 않게 겪어본 사람이었고, ‘울부짖는 바다’는 아니었지만 이미 폭풍 지역도 통과한 경험이 있었으니 오히려 나보다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 그들도 선행하던 우리를 잃어버렸지만, 이후로 한동안 악전고투하며 버텼다.

그러나 테일러 역시 폭풍 해역을 빠져나갈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고, 룸페르는 전투에서 입은 피해가 이클로나보다 컸기에, 끝내 침수를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룸페르가 완전히 통제력을 상실하자, 결국 테일러는 함 내 총원에게 이함(이 경우에는 탈출을 의미) 명령을 내렸다.

파고가 최소한 6미터는 넘을 것이 분명한 미친 바다에서 단정, 혹은 부유물 하나에 의지해 살아남으라는 명령이었다.

심지어 구조의 희망도 없고, 알려진 가까운 육지도 없으며, 폭풍이 언제 멈출지 기약도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그래서 이함을 포기하고 룸페르와 함께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선택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테일러는?”

“그 사람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제국 해군은 완전히 망했잖아? 전멸이라고. 확인은 못 했지만 아마 룸페르와 함께 바다 어딘가에 가라앉았겠지.”

“그럼 살아남은 사람은 너희 둘밖에 없어?”

“오펜은 하도 울면서 매달려서 나랑 묶어놨으니 함께 살았는데, 각자 살길을 찾아 뛰어내린 사람들이 얼마나 살았을지는 나도 모르지. 일단 우리가 정신을 차린 해변에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어.”

네이선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오펜이 약간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하나씩 다 확인했는데, 다 죽었어요···. 어떤 수병님은 아직 몸이 차가워지지도 않았었는데···.”

“오펜,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래도 산 사람은 버텨내야지.”

오펜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위로하고 있는데, 아까부터 네이선의 표정이 이상하다.

“뭐야, 네이선 너, 표정이 왜 그래?”

“네가 그랬지? 이 섬에 살아있는 사람은 드웰이라는 남자밖에 없다고.”

“어, 다른 사람의 흔적은 찾지 못했어. 드웰도 그렇게 말했고. 나도 몇 가지 좀 걸리는 부분이 있기는 한데···.”

“거짓말이야.”

“뭐?”

“드웰이라는 남자, 거짓말을 하고 있어.”

네이선의 심각한 표정을 보면 농담이나 추측 같은 것이 아니었다.

네이선은, 드웰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실 나도 어느 정도 의심을 하는 중이다.

처음에야 살아남았다는 것과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기에도 바빠서 미처 눈치를 못 챘지만, 최근에 여유가 조금 생기면서 위화감의 정체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드웰은 7년이나 이 섬에서 혼자서 살았다고 했지만, 상식적으로 드웰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먼저 우리를 옮긴 것부터 시작해보자.

성인 남자가 무려 27명이다. 심지어 그중에 10명 정도는 중상자였지.

게다가 이클로나의 파손 상태를 보면, 혼자서 의식불명의 환자를 옮기는 것은 솔직히 슈퍼히어로가 아닌 이상에야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뭐 운 좋게 27명 모두가 이클로나 밖에 널려져 있었다고 가정을 해도 마찬가지다.

이클로나의 잔해에서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까지의 거리는 성인 걸음으로 10분 정도가 걸린다.

왕복 20분인데, 만약 성인 남자 하나를 들쳐 메고 움직인다면 아마 두 배쯤은 걸릴 거다.

산술적으로 한 명을 옮기는 데 필요한 시간은 40분, 아니, 짧게 잡아서 30분이라고 해도 27명을 옮기려면 13시간 30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문제는 시간이 아니다.

인간의 체력이 무한한 것이 아닌 이상 13시간30분 동안 의식 불명인 남자를 들고 옮기는 중노동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는 마치 우리가 올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준비된 주거 공간이다.

드웰의 유일한 희망이 추가적인 조난자가 이 섬에 흘러들어서 함께 배를 타고 탈출하는 것이었으니, 미리 준비했다는 것은 억지로라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비전문가가 대충 만든 주거공간이라지만, 일단 벽을 세우고 지붕까지 올렸다.

이런 주거공간을 몇 개나, 우리가 다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만들려면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까?

세 번째는 바로 준비된 식량이다.

이클로나에서 아직 쓸 만한 식료품을 꺼내 오기는 했지만, 애초에 드웰은 군입이 22명이나 늘었음에도 음식에 대한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제공하는 음식은 도대체 원재료가 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맛과 질감으로 봤을 때 곡류인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더 기가 막히는 것은 드웰이 농사를 짓는 장소나, 식재료를 구할만한 곳에 가는 것을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드웰의 배.

일전에 말했다시피 드웰의 배는 바다 위에 떠 있다.

여러 가닥의 계류색을 이용해 해변 근처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일단 바다 위에 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배를 제대로 수리하려면 육지로 끌어 올려서 수리를 해야만 한다.

알다시피 배는 개인의 힘으로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정도로 크다.

그렇다면 드웰은 어떻게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서 수리하고, 어떻게 다시 바다에 띄운 것일까?

처음부터 바다에 띄워놓고 수리를 하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쪽도 현실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은, 왜 드웰이 그런 거짓말을 하냐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의심이 생긴 이후로 재활을 위해 걷기를 한다면서 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봤는데, 다른 사람의 흔적을 전혀 찾지 못했다.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도 없고, 거짓말이라는 증거도 없다.

그러니 아직도 드웰을 관찰하기만 할 뿐 추궁을 못 하는 것이다.

게다가 서로 감정을 상하기에는 아직 드웰이 공개하지 않는 마지막 방법이라는 것이 자꾸 걸린다.

사실 그것 역시 대충 예상은 되는데, 그렇다고 그 정보의 가치가 없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드웰에 대한 의문을 곱씹고 있던 그때, 약간 떨리는 오펜의 말이 침묵을 깨뜨렸다.

“리안 부함장님, 7일 동안 저희가 어떻게 살아남았겠어요?”

그렇다.

네이선의 몸이 정상이었다면 어떻게든 살아남았다고 우겨 볼 수라도 있겠지만, 아직 어린 오펜이 혼자 중상을 입은 네이선을 데리고 무인도에서 7일이나 살아남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오펜도 곱게 살아온 아이는 아니기는 하다.

하지만 고작 길바닥에서 살았던 경험이 무인도에서 중상자를 돌보며 7일이나 버틸 근거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있어요. 물론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오펜, 알고 있겠지만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야. 쓸데없이 과장하거나 그러면 안 돼. 네가 눈으로 본 적도 없는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이유가 뭐야?”

“지칠 때쯤이면 쉴만한 곳이 나타나요. 목이 마를 때면 샘이 있거나 개울 소리가 들리구요. 심지어 배가 고플 때쯤에는 눈앞에 과일나무가 나타났다고요. 물론 무슨 과일인지는 모르지만··· 왠지 먹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배고파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요.”

오펜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이상하기는 하다.

아무리 운이 좋더라도 저렇게 딱 맞아 떨어지게 운이 좋다는 것은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

그런데 그렇다고 저 말만 가지고 다른 사람이 있다고 확신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것도 사실이다.

“오펜, 그런데 그건 그냥 우연이잖아. 다른 사람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부함장님! 그게 전부가 아니구요,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저를 그쪽으로 유도하는 기분이었어요. 부러진 나무가 있거나, 큰 돌로 가려던 길이 막혀있거나, 가려던 방향이 너무 험해서 갈 엄두가 안 나거나···.”

“혹시, 그런 장애물들에서 인위적인 흔적을 보았니?”

“···아니요, 그건 아녜요.”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충분히 의심스럽기는 한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을 곱씹고 있는데 갑자기 네이선이 신음을 삼키고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크윽, 누구냐! 거기 당장 나와!”

< <89화> 재회 > 끝

작가의말

역경의 증거는 네이선이 대신 달게 되었습니다!

드웰이 거짓말을 한걸까요?

드웰의 거짓말은 무엇일까요?

드웰은 왜 거짓말을 한걸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