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90화 (90/420)

< <90화> 잊혀진 고대의 종족 >

진심으로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이 미친놈은 몸도 성치 않은 놈이 우리에게 미리 언질을 주면 어디 덧나나?

내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네이선의 시선을 따라가니,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이 펼쳐졌다.

입구를 가리고 있는 거적이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기묘한 사람이 그곳에 떡하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그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과 체형이 비슷하기는 한데,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길고 가늘었으며, 손가락 역시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기묘할 정도로 얇고 가늘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뭐랄까···.

이목구비도 마찬가지였다.

긴 머리카락, 그 사이로 보이는 커다란, 그러니까 진짜 커다란, 인간의 보통 눈의 두 배는 확실히 넘을 것 같은 그런 눈이 한 쌍 있었고, 작은 코는 콧대가 없어 보일 정도로 낮았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보편적인 심미관으로 봤을 때, 그리 아름다운 형태를 가진 존재는 아니라는 말이다.

네이선은 긴장을 늦추지 못해서 말을 못 하고, 나와 우르타는 놀라서 말을 못 하고, 오펜은 바닥에 앉아서 눈만 껌뻑거렸다.

그리고 그 기묘한 존재는 그냥 말을 안 했다.

아니면 말을 못 하는 건가?

아, 인간의 말을 못 하는 쪽이 당연한 거구나.

미동도 없는 걸 보면 이 상황 자체를 이해 못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네이선이 상대를 공격하지 않은 이유는 상대가 적대행위를 하지 않았다거나, 상대의 능력을 알 수 없다거나, 자신의 몸 상태로 봤을 때 불리하다거나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냥 무기가 없었다.

탈출할 때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네이선과 오펜은 쇠붙이를 전부 버린 상태였고, 나는 부상 때문에, 우르타는 작업에 방해가 돼서 허리춤의 단도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일단 어설프게 나와 우르타가 단도를 빼 들기는 했지만, 썩 그렇게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잠시 기묘한 침묵이 이어지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며 온갖 잡스러운 생각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의미의 홍수? 누군가가 백과사전의 내용을 글자 단위로 분해해서 마구 섞은 다음에 내 귀에, 아니, 머리에 때려 박는 느낌이었다.

이게 정말 이상해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데, 약간 시장통의 소음을 추출해서 그 난잡함과 복잡도만 한 100배쯤 늘린 것이라고 하면 비슷할 것 같다.

나도 모르게 휘청한 모양이다.

흔들리는 나를 붙잡으며 우르타가 기겁했다.

“리안! 갑자기 왜 그래?”

“뭐야? 이게, 그 정신공격 같은 건가? 우르타 너는 괜찮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무섭게···?”

계속 침입자를 경계하며 나를 힐끗 본 네이선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무기를 달라는 말이다.

으음, 나보다는 네이선이 들고 있는 쪽이 더 효율적이기는 하지.

자연스럽게 네이선에게 단도를 양보하던 내 손이 덜컥 멈췄다.

‘그··· 리신··· 군··· 우리··· 리나요···.’

어느 순간 내 머리를 공격하던 정신파(?) 공격이 잔잔해지더니, 천천히 의미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진짜 텔레파시라던가, 그런 걸 사용하는 거야?

내가 혼란에 빠진 그 잠깐 사이에 머릿속의 의미는 빠르게 정리되더니, 그대로 명확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그분이 기다리시던 분이 당신이군요. 이제 우리의 말이 들리나요?’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놀라서 턱이 빠지는 다는 말이 실제로 일어날 줄은 몰랐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우리는 에레페이노리안. 버려진 자들이었고, 잊혀진 종족이며, 기다림을 예비하는 자들입니다. 인간들은 우리를 페리아라고 부릅니다.’

페리아 족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다.

고대에 인간과 전쟁을 벌여 패배하고 사라졌다는 종족.

신화라든가, 전설이라든가, 고대에 관련된 전승에는 심심치 않게 나오는 종족이다.

지구로 따지면 거인, 엘프, 드워프 정도 되겠다. 실존한다는 근거도 없고, 신화와 전설에나 나오는 종족이라는 뜻이지.

내 의식의 흐름과 관계없이 내가 뭔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네이선이 내 손의 단도를 빼앗는 순간, 입구의 거적이 거칠게 펄럭이며 드웰이 뛰어 들어왔다.

“이, 이런···! 그만둬!”

“비켜!”

드웰은 재빨리 스스로를 ‘페리아 족’이라고 밝힌, 그러니까 의미를 전달한 침입자의 앞을 막아섰고, 네이선은 으르렁거리듯이 드웰에게 비키라고 소리쳤다.

“진정들 해! 이들은 원래 말을 거의 안 해! 인간이 아니니까 인간의 잣대로 생각하지 말라고!”

드웰의 출현과 함께 잠시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느껴지고, 곧 명확한 의지가 전달되었다.

‘당신에게는 시간이 필요하군요. 태양에 떠오르면 다시 오겠습니다.’

의지가 느껴짐과 동시에 침입자는 ‘사라졌다’.

말 그대로 원래 없었던 것처럼, 마치 우리가 신기루를 본 것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혹은 그녀)가 사라짐과 동시에 마음 한구석을 찝찝하게 만들던 느낌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 * *

흥분한 네이선을 진정시키고, 궁금한 것을 못 참는 우르타가 짜증 내는 드웰에게 질문하는 것을 중간에 끊어주고, 갑작스러운 전개에 정신을 못 차리는 오펜의 정신을 챙겨주고···.

심지어 소란스러운 소리 때문에 기웃거리는 다른 사람들까지 도로 돌려보내야 했다.

힘겹게 상황을 정리하고 다섯 사람이 모여 앉게 만들었더니 진이 다 빠진다.

10년은 늙어버린 기분이다···.

그렇게 정리를 마치고 우리는 일단 드웰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돌아가는 사정을 보아하니 드웰은 이미 저들의 존재를 알고 있음은 물론, 상당한 교류까지 있었던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저들 스스로는 에레페이노리안이라고 부르는 자들일세. 굳이 해석하면 버려진 요정족 정도 되겠군.”

“제가 듣기로는, 아니, 들은 것은 아니지만··· 페리아 족이라고 하던데.”

“응? 그걸 어떻게··· 휴, 맞아. 우리가 페리아 족이라 부르는 종족이지.

가만히 듣고 있던 네이선이 뾰족하게 날 선 질문을 던졌다.

“페리아라니, 전설에나 나오는 종족 아닙니까?”

“그래! 페리아 족은 엄청 예쁘다고 했는데?!”

우르타, 너는 그쪽이냐···.

그런데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이, 전설이나 신화 등에서 표현되는 페리아 족은 ‘천상의 외모’라고 할 정도다.

그런데 오늘 본 페리아 족이라고 주장하는 자의 외모는 좋게 봐줘도 ‘특이하다’ 정도이지, 인간의 심미관에서 절대 ‘천상의 외모’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예쁘다, 아니다가 아니잖아?

“드웰 씨, 도대체 왜 그 사실을 숨긴 겁니까? 처음부터 우리에게 사실대로 말해도 별문제는 없었을 텐데요.”

“휴우, 그게, 그들이 원치 않았으니까.”

“그들은 말을 못 한다고 하셨잖아요?”

“말을 못 하는 것은 아니야, 잘 안 하는 거지. 나도 말을 들어본 적이 세 번뿐이거든.”

“언제부터 알고 계셨는데요?”

“처음 이 섬에 표류했을 때, 내 목숨을 구해준 자들이 저들이다.”

“······.”

대충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드웰도 대충 얹혀사는(?) 처지고, 우리를 구한 것은 물론 초기에 치료를 한 것도 그들인 것 같다.

드웰은 단지 그들이 전면으로 나서기 싫어서 내세운 얼굴마담 같은 것이고 말이지.

내가 정리한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하자, 한숨을 내쉰 드웰이 말을 이었다.

“그래, 그들이 나를 구했고, 희망이 없어 자살하려던 나를 살게 했다. 너희가 올 것을 예언한 자들이고, 너희를 구한 자들이고, 너희가 쉬는 이곳, 매일 먹는 음식을 제공하는 것도 그들이야.”

“그런데 우리 눈에 전혀 띄지 않았다고요?”

“자네도 방금 봤잖아. 고대에 사라진 마법사라도 되는 건지 신출귀몰해. 물론 그들이 사는 곳이 어딘지는 알지만··· 한 번도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지.”

대충 드웰에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다 알아냈다는 생각이 들자 진짜 궁금했던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 자, 제 머릿속에 직접 말을 걸었어요. 혹시 드웰 씨도?”

“뭐?! 자네가 그들의 정신공감영역에 들어갔었다고?!”

“정신공감영역이 뭔데요?”

“들어가 봤다며! 저들은 정신이 하나로 묶여있어. 자네는 그 안에 들어갔다는 것 아닌가?”

집단지성이야 뭐야···. 알수록 점점 더 무섭다.

그런데 나는 그냥 단순하게 대화를 나눈 것뿐인데?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그냥 머릿속에서 평범하게 대화를 나눈 겁니다만?”

“흠, 내가 생각했던 것이랑 좀 다른데···. 하긴, 자네가 그 안에 잠깐이라도 들어갔다면 내게 질문을 던질 이유가 없겠지.”

“아침에 오겠대요.”

“뭐? 그들이?”

“제가 이해하기로는, 그래요.”

가만히 듣고 있던 우르타가 물었다.

“왜? 내일 아침에 왜 오지?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냥 온다고만 했어. 그런데 일단 우리한테 딱히 적의를 가진 것 같지는 않아.”

“응, 고마운 친구들이잖아. 구해주고, 밥도 주고.”

글쎄다, 아마 그렇게 간단하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넘어갈 일은 아닐 거다.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 순수한 호의를 베푸는 사람도 드문데, 다른 종족에게 호의를 베푼다고?

심지어 단편적으로 드러난 그들의 능력은, 오싹하게 하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단순하게 드웰과 우리가 몸 성히 이 섬을 떠나는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 * *

복잡한 밤이 지나고, 잠을 설친 나는 약간 멍한 머리를 부여잡고 먼저 옆 건물의 네이선을 찾았다.

이미 일어나 있던 것인지, 내 기척에 잠에서 깬 것인지 네이선이 반갑게 맞이했다.

“조용히 들어와, 오펜이 아직 자. 어린 녀석이 나 끌고 다니느라 며칠이나 고생했으니까 말이야.”

“응. 오펜 녀석, 제법이야. 그보다 열은?”

“열은 안 나. 상처 욱신거리던 것도 많이 좋아졌고.”

“좀 보자. 그래도 당분간 괜히 움직이지 말고.”

잘 아물고 있는 상처들을 확인한 나는 진저리를 치는 네이선에게 항생제를 먹이고 밖으로 나왔다.

그보다 태양이 떠오르면 오겠다니, 생각해보면 딱히 아침이라고 말한 것도 아닌 셈이다.

도대체 언제 오겠다는 거야?

아직 양팔을 제대로 못 쓰는 아인델프나 거동이 힘든 모르아의 건물도 한 번씩 확인하고 나니 다른 사람들은 작업장소에 가려고 준비가 한창이었다.

나를 발견한 우르타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나 오늘 안 가.”

“어디를?”

“일하러.”

“···무슨 배짱이야?”

지금 우리는 조금 특수한 상황이다.

군인이기는 한데, 뭐랄까, 부대가 해체된 탈영병이나 미복귀 패잔병과 비슷한 느낌인 것이다.

그래서 계급과 이전 직책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이 예전처럼 완벽한 강제라기보다는 조금 느슨한 체계라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갑자기 우르타가 부상자가 아님에도 빠진다고 하면 다들 불만을 가질 것이 뻔했다.

당연히 내게는 그 불만을 억누를 힘과 권위가 없다.

당장 내가 엄살 피우는 거라고 의심하고 뒤에서 욕하는 놈들도 있는 것 같던데, 뭘.

“하지만 그들이 온다고 했다며! 혼자서 어쩌려고 그래?”

“어휴, 네가 있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 그냥 작업 가도 돼.”

“하지만···!”

우르타가 걱정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어차피 상대는 한두 명이 아니고 종족 전체다.

몇 명인지는 드웰도 모른다고 했지만, 최소한 우리보다는 많을 거다.

그런 그들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내가 혼자 있으나, 우르타가 같이 있으나 결과는 같지 않겠나?

게다가 우르타가 작업하는 곳에 안 나가려면 별수 없이 사람들에게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데 적당한 거짓말도 생각나지 않고, 그러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강한 예감이 든다.

끝까지 함께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우르타를 겨우 설득해서 작업하는 곳에 보내면서 오펜도 같이 보내 버리자, 거주지가 썰렁해졌다.

그래서 그들이 오기만을 기약 없이 기다리던 중에, 문득 주변을 좀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발목도 상당히 좋아졌으니 운동 겸 주변 지형도 확인하고 오면 되겠다.

만약 처음에 드웰을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 주변 지형부터 탐사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 페리아 족의 거주지를 발견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것을 막으려고 드웰을 살려준 것은··· 에이, 이건 너무 많이 갔다.

자신들이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면 그냥 오는 족족 죽이는 쪽이 더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솔직히 죽일 필요도 없이 그냥 구해주지만 않았어도 대부분은 초반에 알아서 죽었을 거다.

드웰의 말처럼 초반에 어찌 살아난다고 해도 희망이 없으니 곧 자살을 택할 확률도 높고.

하여간, 빨리 오라니까 어서 가봐야겠다.

* * *

약간 몽롱한 기분으로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면서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이런 거지같은?! 이 새끼들 내 머리에 무슨 짓을 한 거지?”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거주지는 시야에 잡히지도 않을 정도로 멀어진 상태였다.

심지어 오는 길을 기억을 못 하니 졸지에 미아가 되어 버릴 판이다.

한참 동안 주변을 경계하다가 특별한 위험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긴장이 풀리는 순간, 그놈의 목소리, 아니, 정신파가 들려왔다.

‘먼저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저희 역시 생존이 달린 문제인지라 무례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리를 따라오세요.’

알면서 저지르는 무례는 도대체 뭐고, 누구를 따라가라는 거야?

짜증, 분노, 당황, 공포···. 온갖 감정이 뒤섞여서 나도 혼란스러울 지경인데, 순간 태연하게 내 눈앞에 놈이 모습이 나타났다.

내 앞으로 고작 3m 정도다.

이 정도면 예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해도 안 놀랄 수가 없는 거다.

“힉! 이런 ㅆ! 꼭 나타나도···!”

내가 놀라서 육성으로 욕을 내뱉거나 말거나, 그 큰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잠시 나를 응시하던 놈은, 긴장해서 목덜미까지 뻣뻣해진 내가 민망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등을 돌리더니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 <90화> 잊혀진 고대의 종족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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