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리버티 호 >
이 섬에서 딱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은 잠자리다.
마른 풀을 깔았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부드럽고 푹신한 잠자리는, 며칠이 되었는데도 악취는커녕 산뜻한 풀 내음이 은은하게 풍겼다.
물론 처음에 비하면 푹신함이 조금 떨어진 느낌이지만, 침대도 뭣도 아니고 그냥 바닥에 처음 보는 풀을 약간 두껍게 깐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의 내구성과 편안함이다.
충전재로 쓴다면 비싼 솜보다도 좋을 것 같다.
그나저나 드웰 씨가 불안해하는 이유는 알아냈는데, 수습하기는 더 곤란해졌다.
당장 생각나는 간단한 방법은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고, 이건 뭐 어떻게든 될 것 같기는 하다.
출항 전에 드웰과 작당해서 몰래 상자 안쪽의 내용물을 바꿔도 되고, 네이선에게 미리 말해서 폭풍을 통과하는 정신없는 틈에 바다에 버릴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 방법의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것은 막을 수 있는데 그 분노를 나, 혹은 우리가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높은 확률로 유혈 사태가 벌어질 것이고, 아무리 네이선이라도 부상을 입은 몸으로 해군 20명을 상대할 수는 없겠지.
내가 곱게 살아서 나가려고 다른 사람들이 싸우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건데, 정작 내가 죽어서야 본말전도다.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누워서 보니, 두 평이나 될까 싶은 이 좁은 건물이 내가 보았던 페리아 족의 건물들과 참 비교된다 싶다.
분명히 드웰이 지은 것은 아니니까 그들이 지었을 텐데, 굳이 이렇게 차이 날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지을 필요가 있나?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제대로 태풍이라도 오면 바로 다 넘어지게 생겼다.
무심결에 내 옆의 벽면을 이루는 판자를 쓰다듬던 나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드웰이 머무는 곳으로 달려간 나는 거칠게 문을 두들겼다.
우리가 머무는 곳과 약간 떨어진 곳에 지내는 드웰의 거주지는, 최소한 움막에 가까운, 우리보다는 나은 곳에 지내고 있었다.
일단 두드릴 수 있는 단단한 문이 있다는 것만 해도 우리보다 낫잖아?
그렇게 얼마나 문들 두들겼을까?
화난 드웰의 욕설이 잠깐 들리더니 발소리가 문에서 가까워졌다.
“이 시간에 누구요? 급한 일 아니면 그냥 내일 이야기합시다!”
“접니다! 리안이요.”
“리안? 아니, 무슨 일인데 자는 사람을 깨우고 난리야? 내일 이야기하지.”
자다가 깨기는 무슨, 잔뜩 긴장한 것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드웰 씨의 걱정을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뭐? 흠···.”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조용히 물었다.
“자네 혼자 왔는가?”
“당연하죠.”
“설마···.”
“아이고, 설마 제가 그런 생각을 했어도 그게 오늘은 아닐 것 아닙니까? 걱정 마세요.”
문이 열리고 드러난 드웰은, 옷을 다 갖춰 입은 것은 물론이고 오른손에 칼까지 쥐고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나온 복장은 아니다.
내가 그 꼴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 웃자, 본인도 민망한지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말했다.
“···일단 들어오지.”
엉성한 테이블에 드웰과 마주 앉은 나는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다음, 내 계획을 말해주고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계획은 드웰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했다.
공식적으로 드웰의 상당한 희생이 필요하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 상황의 문제는, 어떤 룰(rule)을 내세우더라도 그 룰을 깨버리는 것이 훨씬 이득이 크다는 점인만큼, 누군가는 희생을 감수해야만 한다.
다음 날 깨끗하게 나은 내 발목을 보고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작은 소란이 있은 후, 아직 회복이 덜 된 네이선과 아인델프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배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했을 때, 바닷물이 닿지 않는 곳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식료품들을 볼 수 있었다.
배까지 거리가 조금 멀기는 했지만, 한 사람이 들 수 있을 정도로 잘 포장되어 있어서 옮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을 대충 마치고 곡물가루와 야채, 육포를 넣고 끓인 죽을 먹는 와중에 옆에 앉은 모르아 갑판장에게 물었다.
“며칠분이나 될까요?”
“우리가 총 25명이니 10일? 아껴먹으면 15일분 정도 될 겁니다.”
“식수는요?”
식수라는 말에 미간에 주름을 만들던 갑판장이 깨끗하게 비워진 나무 그릇을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
“익숙한 통이 아니라서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대략 15일분 정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술이 전혀 없다는 것이 문제죠.”
“으음··· 그래도 새 통이니까 조금 낫겠죠?”
“네, 하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사실 주류는 이뇨 작용을 활발하게 하고 대사 과정에서 수분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배에서 마시는 것이 좋은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술 없이 버티기에는 선상생활이 너무 고된 일인데다가, 금방 변질하는 물 때문에 항해 시 주류는 필수품에 해당했다.
뭐, 물 대신에 술을 마시는 것은 아니고, 물에 럼주 같은 독한 술을 약간 타서 역한 물비린내를 가리는 것이다.
‘알코올로 소독도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하기에는 들어가는 술의 양이 너무 적다···.
일부 선박에서는 낮은 도수의 맥주를 식수와 함께 쓰기도 하는데, 효율도 별로고 물보다 낫다는 것뿐, 이놈도 금방 상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여간 제대로 살균되지 않는 물통은 아무리 깨끗한 물을 담아도 3~4일만 지나도 쿰쿰한 물비린내가 올라오고, 열흘이면 그냥 마시기 힘들 정도로 냄새가 난다.
세균과 미생물이 그대로 남은 통에 정수도 안 된 물을 넣으니까 당연한 말이기는 한데, 덕분에 새 통의 물은 그래도 상하는 속도가 조금 느리기는 하다.
다행히 이클로나에 고장 나지 않은 항해 도구가 남아있었던 관계로 이 섬의 위치는 파악했다.
울부짖는 바다의 서쪽 경계에서 약간 안쪽으로 들어온 곳에 해당하는데, 문제는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일레드 왕국령이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저 배가 제국군함도 아니고, 선주라고 할 수 있는 드웰도 벨로키나 왕국 출신이니까 적당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다들 현 상황을 만들어낸 직접적인 원인인 일레드 왕국에 가야 한다는 것을 꺼림칙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울부짖는 바다의 폭풍 해역만 벗어나면 특별한 위험이 없으니(어떤 해적도 설마 이 배를 공격하지는 않을 거다.), 계속 남쪽으로 가서 드웰이 원하는 벨로키나 왕국의 델라 항구까지 가자는 의견이 현재 대세이긴 하다.
그런데 델라까지는 정상적인 항해 속도라고 해도 최소한 열흘 이상이 필요한데, 저런 배로는 정상적인 항해 속도가 나올 리가 없었다.
만약 15일 이상이 걸리게 된다면 우리는 또다시 식료품 부족에··· 아니지?
그래도 항로가 많이 겹치는 곳까지만 가면 다른 상선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잖아?
설마 교역로 한가운데서 굶어 죽기야 하겠어?
* * *
그날 저녁, 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지금부터가 굉장히 중요한 타이밍이다.
“모두 주목! 식료품도 모두 실었고, 이제 우리는 언제든지 이 섬을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인정하겠지만, 우리 함대는 전멸했고, 나는 더 이상 제국 해군에 남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부함장’이라는 호칭 대신 ‘리안’ 정도로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공식적으로 부함장 직책을 포기하자 사람들이 약간 웅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해군의 허물을 벗지 못한 남자들에게 ‘부함장’이라는 것은 상당한 권위를 가진다.
하지만 내가 제국 해군으로 복귀할 것이 아닌 이상, 이런 애매한 관계는 빨리 정리하는 쪽이 좋은 거다.
“조용! 그렇지만 일단 우리는 배를 타야하고, 배에는 선장과 항해사, 갑판장이 있어야 합니다. 선주가 여기 드웰 씨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으시겠지요?”
말을 끊고 잠시 사람들을 둘러보았지만 별다르게 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7년이나 혼자서 배를 수리해온 드웰 씨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도 있고, 솔직히 저런 누더기 같은 배의 주인 자리 따위는 별로 내키지 않은 것이겠지.
“자, 그럼 이 자리를 제가 주도하는 것도 이상하겠죠? 아인델프 소위님.”
내 지명에 입을 꾹 다문 채 뭔가 고민하던 아인델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네, 부함, 아니, 리안 씨.”
“현재 일행 중에 유일한 항해사이자 장교이시니 아인델프 님이 지금부터···.”
“리안 씨.”
내 말을 끊은 아인델프가 내 눈을 보며 강하게 말했다.
“솔직히 저와 리안 씨 말고는 항해술을 익힌 사람이 없죠. 그런데 저는 팔도 이렇고, 솔직히 배를 이끌 정도의 기량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래! 바로 그거야! 잘한다, 아인델프!
사람들을 한번 둘러본 아인델프가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지금 있는 사람 중에서는 선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리안 씨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다른 분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일단 나는 한발 뒤로 뺐다.
이 상황에서 준다고 바로 받으면 바보 멍청이인 거다.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떠세요? 제가···.”
“그만, 그만하지! 애초에 선장을 왜 선원이 정해? 선주가 정하는 것이 맞지.”
모르아 갑판장이 약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민주적인(?) 해적이 아닌 이상, 사실 그의 말이 정론이기는 하다.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하면 그다음 계획을 실행하기에 너무 눈치가 보여서 일부러 이 말이 나오기를 기다린 것일 뿐이다.
“거, 드웰. 당신이 선주라는 것에는 아무도 불만이 없소. 그냥 당신이 선장을 지명하시오, 우리는 그대로 따를 테니까.”
모르아 갑판장의 말이 끝나자, 한쪽에 서서 내가 하는 양을 조용히 지켜보던 드웰이 앞으로 나섰다.
“뭐, 다들 알고 있지 않나? 솔직히 리안 말고는 선장을 할 자신 없잖아? 리안 선장, 잘 부탁하네.”
나는 속없이 올라가는 광대를 겨우 내리며 다시 앞으로 나섰다.
“좋아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목적지인 벨로키나 왕국의 델라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제 지휘를 받겠다는 의미로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등 항해사는 아인델프, 갑판장은 모르아로 하죠. 물론 델라 항구에 도착한 다음에는 제국군에 복귀하셔도 되고, 나눠 받은 돈으로 신나게 살아도 됩니다. 하지만! 최소한 델라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는 제 지휘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좋아, 여기까지는 성공적이다.
이제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참인데 우르타의 얼빠진 독백이 들려왔다.
“세상에, 리안··· 리안이 선장님이라니···??!??!?”
투닥거리는 우르타와 네이선을 보던 나는 절로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은 채 그들을 불렀다.
“우르타, 네이선, 그리고 오펜까지. 이쪽으로 와.”
“응?”
“우리?”
“어, 저도요?”
어리둥절한 세 사람이 내 근처에 오자 나는 사람들의 눈을 하나씩 맞추면서 힘주어 말했다.
“다들 어제부터 고민이 많을 거야. 돈이 400만 로스니까 말이지. 오늘 확인해보니 정확히 483만 로스더군. 어차피 복잡한 계산을 해봐야 너희들은 알아먹지도 못하니까 이렇게 하자. 일단 내가 물어보니까 선주님이 가지고 있던 것이 약 250만, 이클로나에서 획득한 돈이 230만 정도야. 원래라면 우리가 22명이니까 일인당 11만 정도 받으면 되겠지만···.”
나는 말을 끊고 내 옆에 선 드웰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우리 선주님께서는 그저 이 배를 타고 무사히 본토로 돌아가기만 하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본인 몫의 전부를 포기하셨다! 그리고 여기 룸페르 생존자 친구들 역시 자기 몫을 주장할 수 없겠지. 그리고 나와 우르타도 몫을 포기하겠어.”
이 정도 되자 사람들이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네이선과 오펜까지는 이해를 했지만, 나와 우르타까지 몫을 포기한다니까 뭔가 이상한 것이다.
“자, 내가 원하는 것은 딱 하나다. 우리 모두가 무사히 델라 항구의 땅을 밟는 것. 그래서 제한을 걸겠어.”
“지금 말한 다섯 사람을 빼면 너희는 총 20명이야. 한 사람당 24만 로스를 받는 거지. 왠지 옆 사람을 죽이고 싶어? 그런 개 같은 생각이 들지 않게 해줄게. 무조건 일인당 24만 로스를 주겠어. 만약 열 명이 죽으면? 그래도 한 사람당 24만 로스. 죽은 사람 몫은 우리 다섯이 나눠 가질 거야.”
“그건 너무 불공평한···.”
누군가가 불만을 토하자 나는 바로 그놈을 노려보며 말했다.
“뭐가 불공평해? 너, 지금 다른 놈들 죽이고 돈을 더 받고 싶다고 말하는 거야?”
“네? 아니, 그, 그건 아니지만···.”
“개소리하지 마. 똑같이 나눈 금액이 적다는 놈은 다른 놈을 죽이겠다는 말이랑 똑같은 거잖아? 아무도 죽이지 말고, 아무도 죽지 마. 그럼 모두 행복하게 헤어질 수 있어.”
“그런데 우리가 많이 죽으면 선장이 유리하니까 선장이 다 죽이려는 거 아니오? 그 해병대 친구도 있고 말이야.”
“우리는 고작 다섯이야. 너희가 서로 죽이지 않고 버티면 우리가 너희를 어떻게 죽이겠어? 그러니까 우리에게 공격당하지 않으려면 서로 잘 지켜줘야겠지?”
“왜 불화를 만들어내는 거요? 이래서야 서로 못 믿을 분위기만 되는 거 아뇨!”
“차라리 믿지 말자. 믿다가 뒤통수 맞고 다 뒤지는 것보다는 그냥 안 믿고 다 사는 쪽이 더 낫잖아?”
서로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와중에 모르아 갑판장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나도 내 몫을 포기하면 선장님 쪽에 끼워줍니까?”
“물론.”
“이 멍청이들보다는 그쪽이 낫겠군. 뒤지면 400만 로스가 무슨 소용이야?”
“갑판장?”
“선장님, 저도 제 몫을 포기하겠습니다. 그럼 저놈들에게 돈이 좀 더 돌아가겠죠?”
모르아 갑판장이 이쪽으로 이동하자 아인델프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인델프마저 이쪽으로 넘어오면 균형이 깨져버린다.
모두를 위해서라도 아인델프나 모르아 중에 한 사람은 저쪽에 있는 것이 좋았다.
소란스러움이 적당히 가라앉았을 때,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던 드웰의 입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리버티, 리버티야.”
“음? 드웰, 아니 선주님?”
“선장, 배의 이름은 리버티일세.”
“리버티라··· 부활이라는 뜻이던가요? 딱 어울리네요.”
“그래, 리버티 호의 리안 선장. 잘 부탁하네.”
< <92화> 리버티 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