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돌파 >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지금 내 얼굴도 아마 저들의 표정이랑 그렇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에 비슷한 경험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이니까.
“갑판장! 파고!”
나도 모르게 히스테릭하게 외치는 내 목소리에 거의 비슷한 목소리로 모르아 갑판장이 즉답했다.
“현재 2.3미터! 아직 괜찮습니다!”
아직 위험 수위는 아니다.
배가 많이 흔들리기는 하지만, 그것은 파고보다는 수리 중에 좌우의 균형이 많이 틀어져서 그러는 것일 확률이 높다.
그때 하부 갑판을 확인하고 돌아온 아인델프가 보고했다.
“선장님, 하부갑판에는 아직 이상 없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물이 새는 곳이 많았습니다.”
“새는 정도는?”
“벽면에서 흘러나오는 정도지만 미리 보수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나는 눈에 띄게 어두워진 하늘을 한번 살펴보고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보수가 필요한 곳이 얼마나 돼?”
“좌현에 일곱, 우현에 다섯 곳을 확인했습니다.”
“두 명 데리고 가서 보강해 놔.”
“네.”
아인델프에게 선원 두 명을 뽑아서 붙여준 모르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일등항해사보다 제가 낫지 않겠습니까? 아직 손도 불편하고···.”
“그렇죠. 그래도 지금 제 옆에 갑판장님이 있는 게 더 중요해요.”
함교에서 돛을 다루는 조범수들에 지시를 내리고 타륜을 조작하면 자리를 뜨기 힘들다.
그러면 그 외의 선박 상황이나 바다의 상태를 보기가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데, 솔직히 아인델프는 이런 경험이 적어서 믿음이 안 간다.
막말로 평시라면 몰라도 황천(荒天, 비바람이 심한 상태, 폭풍)시에는 경험이 없으면 파고를 어림하는 것조차도 어렵다.
나는 불길하게 들려오는 목재 뒤틀리는 소리에 몸을 부르르 떨며 드웰에게 물었다.
“선주님, 괜찮은 거겠죠?”
“걱정 말게, 선장. 사람 손으로 맞추지 못한 틈을 바다가 맞춰주면서 나는 소리니까. 아직 위험한 소리는 없어.”
“항로는 어때요? 나침판은 여전히 먹통인가요?”
“으음···.”
드웰이 말없이 보여준 나침반 바늘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암초 지대를 통과할 때 드웰에게 나침반을 맡겼는데, 언제부터인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아직도 드웰이 나침반을 관리 중이었다.
이 세계의 나침반은 상당히 커서, 지금처럼 집중을 요구하는 상황에서는 관리하는 것도 꽤나 부담이거든.
그나저나 나침반이 망가지니 방향을 알기가 영 애매하다.
암초 지대를 통과할 때까지만 해도 적당히 어림잡을 수는 있었는데, 하늘이 먹구름으로 가득 차고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니까 솔직히 이제 잘 모르겠다.
갈수록 빗줄기가 세지기는 했지만, 파도의 높이는 일정 수준으로 높아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여유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수리를 했다고 해도 제대로 된 드라이독에서 수리를 한 것도 아니고, 재료와 공구도 부족했으니, 사방에서 문제가 터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국 파고가 2미터까지 가라앉은 다음에는 갑판장까지 사방을 뛰어다니며 응급 처치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정신없이 보냈을까?
나는 물론이고 심부름하는 오펜까지 녹초가 되어 나가떨어질 때쯤, 드디어 비가 그치고 밤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파도는 약간 거친 편이지만, 바람도 많이 죽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모두들 약간 풀어지려는 판인데, 잠시 자리를 비웠던 드웰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선장! 최대한 빨리 남서쪽으로!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야!”
“네? 나침반은요?”
드웰은 정확하게 고정된 나침반을 보여주며 반복해서 말했다.
“바람이 약해지고 있는 것이 느껴지지 않나? 나침반이 오작동을 일으킨다는 것을 몰라서 우리는 상당한 거리를 손해 보았을지도 모르네. 지금 최대한 남서쪽으로 이동해야 울부짖는 바다를 벗어날 수 있어.”
듣고 있던 아인델프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하지만 선주님, 바다와 하늘을 보면 이미 폭풍 지역은 벗어난 것이 아닐까요?”
“아니, 아직 폭풍 지역 안일 것이라 확신하네. 선장!”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해보니 드웰의 말에 틀린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몸을 드러낸 것을 보면 우리는 거의 12시간 동안 사투를 벌인 셈이지만, 지금은 안심하고 체력과 정신력을 배려할 때가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일할 때였다.
아인델프의 말대로 우리가 이미 폭풍 지역을 벗어났다고 해도 조금 서두르는 것 외에는 리스크도 없는데 뭘 망설인다는 말인가?
나는 배에 힘을 주고 소리를 질렀다.
“모두 정신 차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지금 쉬면 영원히 쉬는 수가 있다! 당장 일어서지 못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드웰의 우려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내가 나침반이 가리키는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동한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도 않아 모든 돛이 힘없이 축 늘어져 버린 것이다.
리버티의 속도가 천천히 줄어드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씹었다.
“씨발··· 무풍이라니···.”
다시 말하지만, 범선은 바람이 유일한 동력원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조류에 의해서도 조금씩 떠내려가기는 하는데, 어디까지나 주 동력은 바람이다.
그러니까 바람이 멈췄다는 것은, 자동차의 엔진이 멈췄다는 말과 동일하다.
선원들의 동요가 느껴졌다.
폭풍도 무섭고, 해적도 무섭고, 암초도, 여울도 무섭다.
그런데 무풍지대는 아예 그런 재해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위험이다.
무풍지대에 들어섰다가 살아 나온 사람이 거의 없거든.
기적적으로 살아나오더라도 대부분은 다시 배를 탈 엄두도 못 낸다고 한다.
그곳에서 동료의 피를 빨고 인육을 먹다가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릴 정도니, 뱃사람들에게 바다 위에서 바람이 멈춘다는 것은 그렇게나 두려운 일이었다.
“선주님 혹시 이것도 예상 범위 밖입니까?”
“선장, 걱정 말게. 솔직히 나도 여기까지 와본 적은 없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으니까. 여기가 무풍지대는 아닐 거야. 아마 잠시 바람이 멎은 것 같은데··· 그리 길게 이어질 리가 없어. 일단 선원들을 쉬게 하고 간단하게 뭐라도 먹게 하지? 다음도 쉽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 된 이상 드웰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인델프에게 선원들을 안심시키라고 말하고, 갑판장에게는 선원들을 쉬게 하고 제일 상태 양호한 사람을 뽑아서 선체 전반을 검사하도록 시켰다.
물론 식사는 따로 준비할 상황이 아니라서 우르타와 네이선을 불러 대충 곡물가루와 육포, 그리고 물을 나눠주게 했다.
그렇게 다들 불안한 마음을 숨긴 채 휴식을 취한지 네 시간쯤 지났을 무렵, 구름이 중천까지 떠오른 태양을 살짝 가리면서 터오면서 늘어진 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바람을 느낀 견시수가 소리를 질렀다.
“바람, 바람이 붑니다! 선장님! 바람입니다!”
너무 지쳐서 함교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나는 바람이라는 말에 벌떡 일어섰다.
드웰이 맞았다.
무풍 지대는 아니고 그냥 잠시 바람이 멎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불어온 반가운 바람은 고작 3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태풍이 되었다.
“선장님! 계속 버티기에는 메인 마스트가 너무 불안합니다!”
갑판장의 비명에 가까운 보고에 나는 찢어질 듯 부풀어 오른 돛들을 노려보았다.
뒤에서는 먹구름이 쫓아온다.
저 지긋지긋한 자연재해는 우리가 울부짖는 바다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뒤를 쫓을 거다.
최대한 빨리 도망가는 것이 맞는데, 그렇다고 지금처럼 풀 세일을 유지하자니 바람이 너무 세서 부실한 메인 마스트가 먼저 쓰러질 판이다.
“메인 마스트 반개, 미즌 마스트는 현 상태 유지해. 그리고 우측으로 10도만 틀자.”
울부짖는 바다의 거의 끝에 도달한 것 같으니 폭풍지대에 다시 휩쓸려도 운이 조금만 따라주면 살 수 있다.
그런데 무리하다가 메인 마스트가 부러진다면 뒤가 없잖아?
그래서 나는 일단 메인 마스트가 받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돛을 반개로 바꾸고 바람을 약간 흘려보내도록 각도를 조절했다.
속도는 꽤 떨어지겠지만 이게 아마 최선의 선택일 거다.
몸은 상대적으로 편해졌지만 심리적으로 계속 코너에 몰릴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별이 총총 떠오른 밤하늘을 보며 나는 무너지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는 말이 정확하게 이해가 된다.
말 그대로 무너지듯 앉아서 다리가 불편한 자세로 마구 꼬여있는데, 움직여서 펼 엄두가 안 난다.
내 옆에 다가온 아인델프가 해쓱해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선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조금 쉬시지요.”
“아인델프, 아니, 일등 항해사, 우리 살아남은 거지?”
“네, 다 선장님 덕분입니다.”
“아, 씨발··· 진짜 뒤지는 줄 알았네···. 나 조금 쉴게.”
나는 그대로 엎어지며 눈을 감았다.
* *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선장실의 침대에 곱게 눕혀져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의자에 앉아 반쯤 졸고 있는 오펜이 있었다.
하긴, 전문성을 요하지 않는 일이라고 쉬운 일은 아니다.
오펜은 아직 정식으로 뱃일을 하지는 못해서 잡일이나 심부름을 주로 하는데, 이번 항해 내내 말을 전달하고 심부름을 하느라고 쉴 새 없이 뛰어다녔다.
아무리 체력 넘치는 10대라고 해도 지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겠지.
그래도 완전히 푹 곯아떨어진 것은 아니었는지, 내가 부스럭거리며 상체를 일으키자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섰다.
“아아앗! 선장님! 몸은 괜찮으신가요?”
“뭐가 ‘아아앗’ 이야? 흐흣, 상황은 어때?”
“네! 얼마 전까지는 순항 중이었습니다!”
“일등 항해사가 조함하는 거지?”
“네!”
“그래, 나가자.”
“조금 더 쉬시는 것이···.”
“일등항해사도 한 숨도 못 잤어. 게다가 환자잖아. 조금 쉬게 해줘야지.”
오펜이 얼른 달려들어 부축하려 했지만, 나는 손을 내젓고 혼자 일어섰다.
어디를 다친 것도 아니고 그냥 지친 것 뿐이니까 부축까지 받을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신전에서 받은 컨디션 회복 기능은 일회용인 모양이다.
그때처럼 좋아지지가 않네?
선교로 나간 나는 거의 좀비처럼 변해버린 아인델프에게 쉬라고 하고, 조타수도 내려보냈다.
그리고 나를 지킨다고 조금 잠을 잔 오펜에게 불쑥 물었다.
“오펜, 타륜 안 잡아봤지?”
“네? 넷! 아직···.”
“지금 잡아보자. 어차피 다들 피곤하니까.”
“그, 진짜 그래도 돼요?”
“내가 선장이야, 잡으라면 잡는거지 뭐.”
선장실을 나와서 살짝 둘러보기도 하고 아인델프하게 간략하게 보고도 들었지만, 너나 할 것없이 녹초가 되는 바람에 현재 리버티 호는 상점으로 치면 개점휴업 상태에 가까웠다.
견시는 물론 없고, 조범수도 고작 두 명이 메인 마스트에 기대어 잠들어 있을 뿐, 깨어있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진짜 아인델프가 조타수만 데리고 지금까지 조함한 모양이었다.
돛이 끝부분만 살짝 펼쳐진 상태인 것을 보면 그냥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않을 정도로 방향만 조절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것만 해도 어디야?
조금 알려진 해역만 되었어도 적당한 곳에서 투묘(닻을 던져 배를 고정시키는 행위)를 한다거나 하고 아예 쉬었을 텐데, 투묘를 하기에는 수심이 너무 깊었던 모양이다.
* * *
목숨을 건 도전이 아무런 피해 없이 성공했다는 것에 고무되어 모두가 행복한 3일이 흘렀다.
4일째에는 사소한 말싸움이 몇 번 생겼다.
5일째에는 선원 하나가 네이선과 시비가 붙어서 덤볐다가 눈화장을 하고 코피를 흘렸다.
6일째에는 견시대에 올라가던 우르타가 밟은 줄이 끊어지며 떨어질 뻔했는데, 다행히 미친 반사 신경 덕에 크게 다치는 것은 면했다.
7일째에는 반항하던 선원 세 명이 갑판장에게 대들다가 채찍을 맞았다.
그리고 8일째 밤이 되는 날, 아인델프가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야? 나 한밤중에 남자가 내 방에 들어오는 거, 별로 안 반갑거든?”
“선장님, 선원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왜? 반란이라도 일으킬 기세야?”
“갑판장에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표하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설마 그 세 놈?”
“그들보다는 그놈들을 사주한 녀석이 있는 모양입니다, 저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사실 일등 항해사는 선원들과 함께 부대낄 일이 적어서 선원들 동향은 차라리 갑판장 쪽이 더 잘 알게 마련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갑판장의 통솔이 점점 흐트러지는 느낌이더니, 주동하는 놈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 역시 계획은 계획인가···. 벌써 사망하셨네.”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런 말이 있다며? 전투가 시작되면 첫 번째 전사자는 작전계획서라고.”
“아, 네···.”
“일단 알았어. 생각을 좀 해보자. 혹시 그놈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다면 좀 알아보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다부진 표정을 짓는 아인델프를 보고 한숨을 내쉬며 다시 당부했다.
“이봐, 아인델프 일등 항해사. 선원들이 네게 친근함을 보이는 이유는 자신들과 동류라서가 아니야. 그냥 너는 그들의 마지막 보루 같은 거라고. 괜히 정보를 알아낸답시고 들쑤시고 다니면 망하는 수가 있으니까 최선을 다하지 말아 줄래?”
“앗··· 네···.”
“설마 내 방에 오는 것을 누구한테 들킨 건 아니지?”
“물론입니다!”
그러니까 난 그때 그 말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어야 했다.
< <94화> 돌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