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자존심과 목숨의 무게 >
다음 날 간부들을 호출한 나는 진지하게 분위기를 잡고 물었다.
“다들 알다시피, 이 상태라면 내일쯤에 내해에 진입하고, 닷새 정도 후면 델라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서두를 꺼낸 나는 살짝 시간차를 두고 갑판장을 보며 물었다.
“아직 선원들은 잘 모르는 것 맞죠?”
갑판장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오히려 식량 부족을 걱정하는 녀석들이 좀 있습니다.”
“역시··· 네이선, 보급 상황은?”
“어, 음, 그러니까 흠, 흠, 3일분 정도 남았··· 습니다. 배식은 나, 아니, 저랑 우르타가 담당하고 있어서 선원들은 남은 양을 정확하게 모를 겁니다.”
“3일이면 좀 애매하네···. 낚시는 어때?”
“다들 2교대로 움직이니까 너무 일이 힘들어서 별 효과가 없··· 습니다.”
이 녀석은 아직도 나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을 어색해한다.
듣는 나도 닭살이 돋을 지경이니까 본인은 오죽하겠냐마는··· 그래도 선장이나 돼서 일개 선원에게 공식적인 회의 자리에서까지 반말을 허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나저나 식량이 생각보다 많이 부족하다.
정확하게 재본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배가 제대로 속도를 못 내기 때문이겠지.
아무리 선원들이 접근할 수 없게 했다고 하지만, 자기들 손으로 옮겨 놓은 식량이다.
인원수는 뻔하고 먹는 양도 알고 있으니, 개중에 산수를 잘하는 녀석은 대충 남은 식량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낚시도 마찬가지. 조악한 낚싯대로 제대로 된 미끼도 없이, 움직이는 배 위에서 하는 낚시가 얼마나 잘 되겠나?
심지어 낚싯대를 쥔 사람이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고 있기까지 하면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겠지.
“해도실에 접근하려는 녀석은 없나요? 선원 중에 해도를 읽을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에라도 선원들에게 현재 위치가 밝혀지면 일이 복잡해져요.”
“해도실의 보안은 충분하고 선교 근처이니 걱정할 필요 없네.”
드웰이 시원하게 대답하는데, 아인델프의 표정이 영 불편해 보였다.
“일등 항해사?”
“네, 선장님.”
“무슨 일인지 말해 봐. 할 말이 있는 표정인데.”
“그게···.”
한참동안 뜸을 들이던 아인델프는 결국 숨기던 말을 털어놓았다.
며칠 전부터 은근슬쩍 자신에게 지금 어디쯤 온 것인지 물어보는 선원이 많아졌다고 했다.
그리고 어제는 노골적으로 항구까지 얼마나 남은 것인지, 식량은 충분한지 자기들도 알아야 하지 않느냐는 항의를 들었다고 한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누르고 평온을 가장하며 아인델프에게 물어봤다.
“왜 바로 이야기하지 않았어? 지금 얼마나 위태로운지는 일등 항해사도 잘 알 텐데?”
“그게, 선원들이 절 의심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쪽으로 넘어간 것은 아니냐고 비난하는 녀석들이 있을 정도로요.”
“그래도 말을 했어야지!”
“사실 어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그런데 왜?”
“실은, 어젯밤에 저를 본 사람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미친 새···!”
내가 어제 내 방에 온 것을 아무도 모르냐고 물어봤을 때는 당당하게 없다고 했잖아!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어젯밤에 나눈 대화의 내용이 굳이 밤에 찾아와서 이야기할 정도로 급한 것은 아니다.
뭐, 주동자가 따로 있다는 것은 몰랐지만, 그런 것은 지금 같은 회의 시간에 이야기해도 되는 거잖아.
하지만 본인이 협박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싫어서 몰래 찾아왔다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리고 왔으면 이야기를 다 하고 가던가, 말도 못 하고 다 걸리고 어영부영하다가 이게 무슨 꼴이야?
잠깐, 상황이 이렇게 심각하면 갑판장이 모르는 게 이상한데?
“갑판장님?”
얼굴이 붉게 변한 모르아 갑판장이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면목 없습니다, 요 며칠 사이에 선원들이 전혀 통제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를 따르던 녀석들도 요즘은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걸 왜···! 휴우, 아닙니다. 그만하고 대책을 좀 세워보죠.”
이놈이나 저놈이나···.
모르아 갑판장이 이 사실을 숨긴 이유는 아인델프가 어젯밤에 내 방을 찾은 이유와 같겠지.
시쳇말로, 쪽팔렸던 것이다.
선원들을 직접적으로 통제해야 하는 갑판장이, 선원들을 통제하기는커녕 선원들 사이에서 왕따까지 당하고 있다면 무능한 갑판장의 대명사 같잖아.
모르아 갑판장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단지 상황이 거지같을 뿐이지만, 사람은 그렇게 이성적인 동물이 못 된다.
나는 고개 숙인 갑판장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말을 그만두고 다시 아인델프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제 할 말도 못 하고 다시 돌아가니까 선원들이 뭐래?”
“따로 언질은 없었습니다만, 이후로는 노골적으로 적대하고 있습니다.”
“하아···.”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 정도면 오월동주(吳越同舟) 저리 가라 수준의 적대관계다.
주요 인력이 다 이쪽에 있어서 당장 무슨 짓을 벌이지는 못하겠지만, 만약 자신들이 대충 조함해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만 들면 바로 행동을 시작할 것이다.
내 예상대로 저들이 여러 세력으로 나뉜다면 적당히 서로 견제하다가 끝날 수도 있지만, 낙관적인 계산은 때려치우고 최대한 보수적으로 움직여야겠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좋지 않아. 다들 각자 무장 철저히 하고, 잠들 때는 각자 문단속 확실히 해. 최고의 상황은 아니지만, 어차피 며칠만 더 버틸 수 있다면 해피 엔딩이야. 잘해보자고.”
아 참, 우르타와 네이선도 각자 간부로서 개인실을 받았다.
개인실을 그냥 줄 수는 없으니까 임명한 것이기는 하지만, 네이선은 해병대장, 우르타는 조리장이 된 것이다.
조리장이라는 말에 우르타는 화들짝 놀라며 요리를 할 줄 모른다고 울상을 지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르타의 요리 실력을 볼 기회는 없었다.
그냥 육포와 곡물가루, 물을 정해진 양만큼 배급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식품 창고를 지키고 관리하는 일이 더 힘든 일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집단의 관계는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서로 이미 눈치로 상황을 다 아는데 더 이상 가식을 떨어 댈 필요성을 못 느낀 것이다.
단지 아직 서로가 필요하기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우리는 선원들에게 필수적인 지시 외에는 내리지 않았고, 선원들은 무기고의 문을 부수고 무기를 들었다.
암묵적으로 선교와 금고(식료품도 여기에 들어있다), 개인실 부분은 우리의 영역이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선원들이 차지했다.
그렇게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은 이틀이 지난 후,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그 신호탄을 쏘아 올린 사람은 바로 견시수였다.
“좌현 320도! 미확인 선박! 미확인 선박 발견!”
계속되는 긴장과 지옥 같은 2교대 근무로 인해 체력이 바닥을 기고 있었던 나는, 아인델프와 교대를 하기 무섭게 선장실에서 잠이든 참이었다.
하지만 쩌렁쩌렁 울리는 견시수의 목소리는 몰려오던 수마(睡魔)를 내쫓기에 충분했고, 나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무장을 점검했다.
머리맡에 두었던 단도를 허리에 걸고, 방 한구석의 커틀라스를 집어 들었다.
무장을 마치고 문을 나서자마자 평소와 달리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다급하게 선교로 올라가니 당황하는 아인델프와 오펜, 급하게 달려온 네이선이 보였다.
나는 아인델프에게 날카롭게 물었다.
“선박 확실해?!”
“네, 선장님. 방금 망원경으로 확인했습니다.”
“선원들 반응은?”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네이선, 지금 당장 우르타 깨워서 선교로 올려 보내고, 갑판장 찾아서 데려와.”
“응! 아니, 네, 선장님!”
네이선이 떠나자 다부진 표정으로 오펜이 내 앞에 다가왔다.
표정만 놓고 보면 100만 대군에게 단기로 돌격하는 비장함이 느껴진다.
그 어이없는 표정에 피식 웃은 나는 오펜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고 말했다.
“넌 가서 선주님 모셔와.”
“네, 선장님!”
하지만 오펜은 선교를 떠날 수 없었다.
바로 선주인 드웰이 선교에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난 여기 있네, 선장. 그보다 어디까지 온 건가?”
“다른 배가 보인다면 아마 내해 정규 항로에 들어 선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선원들이 뭔가 행동을 하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으음···.”
네이선이 선교에서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르타가 선교에 올라왔지만, 갑판장은 피 묻은 커틀라스를 든 네이선의 부축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된 거야?!”
“반란이야. 갑판장을 공격하는 선원들을 물리치고 일단 이쪽으로 후퇴했어. 죽이지는 않았는데, 두 사람은 아마 당분간 전투는 못 할 거야.”
노력하던 존댓말은 다 팔아치웠지만 담담하게 말하는 네이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함교 아래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선원들이 선교 아래에 모여들고 있었다.
자는 놈들까지 다 깨웠는지, 네이선이 다치게 했다는 2명을 제외한 17명이 모두 무장을 하고 흉흉한 기세로 선교로 다가왔다.
“···진짜 반란이군.”
왠지 나도 머리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라 담담하게 중얼거린 후, 선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총원 그대로 들어, 선장이다.”
내가 소리를 치자 모여들던 선원들이 움찔하며 소란이 조금 가라앉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선장과 함장의 권위는, 뱃사람에게는 거의 무의식에 새겨진 신성불가침의 권위였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선장이라고 죽지는 않는다는 뜻은 아니지만, 최소한 마지막으로 교섭을 할 여지는 있다는 뜻이다.
“어제부로 우리는 내해에 접어들었고, 앞으로 사흘 후에 델라 항구에 입항할 예정이다. 물론 너희들에게 사실을 숨긴 것은 미안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해 줬으면 한다.”
그러자 선원 중의 한 명이 앞으로 나오더니 내게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선장? 당장 어제부터는 배급량도 줄이고 있던데, 식량이 얼마나 남은 거야?”
아, 저 새끼 이름이 뭐였지? 시작부터 돌직구를 날려대네?
“고작 식량 때문에 이러는 것 같지는 않고, 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뭐지? 지금 다 같이 죽자고 이러는 것은 아닐 텐데?”
내 말이 끝나자 바로 선원들이 소란스러워졌지만, 앞으로 나온 선원이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르자 단번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역시 저놈이 이 사태의 원흉이다.
설마 20명에 가까운 인원을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잡음 없이 휘어잡을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위기에서 능력을 각성하는 타입인가?
“선장, 우리도 피를 보는 것을 원치 않아. 금고에 있는 식료품과 돈을 넘기고 무장을 해제하면 항구에 도착하는 대로 우리는 곱게 떠나겠어.”
개소리를 너무 티 나게 하는군.
우리가 무장을 해제하면 모두 죽일 생각이라는 것은 세 살 먹은 애도 알겠다.
“뭐? 우리가 없이 조함은 할 수 있고?”
“흐흐흐, 어차피 내해라면 지나가는 배가 적지 않을 테니까 예항을 부탁하면 될 일이지. 돈을 조금 준다고 하면 해줄 배는 충분히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쪽 선원이 몇 명 안 되는 것을 알면 그냥 죄다 약탈하려고 할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싶다만···?
자기는 나쁜 짓을 하면서 다른 사람은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 것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게 듣고 보니 선원들을 선동하기에 딱 좋은 방법이기는 하다.
구조신호를 보내는 것은 사람이 많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몇 명이 죽더라도, 아니,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가 최대한 많이 죽을수록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겠지.
“무장 해제는 불가. 내가 제안하지. 지금 당장 해산하면 약속대로 항구에서 무사히 돈을 들고 내릴 수 있을 거다. 무장 해제는 바라지도 않아. 그냥 이 상태로 사흘만 유지하자.”
“사흘? 거짓말을 하는군. 이미 식량이 바닥났을 텐데?”
아오, 얄미운 자식!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다 죽이고 저놈 말대로 구조 요청을 해볼까?
으음··· 그런데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어떻게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아무도 안 죽고 이기기는 불가능할 것 같아.
“오펜, 지금 당장 금고로 가서 육포 한 덩이랑 물 한 통만 내 방으로 옮겨.”
나는 나지막하게 오펜에게 지시한 뒤, 다시 선원들을 노려보고 말했다.
“그래, 솔직히 식량이 없어. 이제 아껴 먹으면 이틀 정도 먹을 양인데, 조금 더 배고프게 지내면 굶어 죽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서로 괜히 힘 빼지 말자. 마지막 권고다, 해산해.”
“선장, 그만 포기해. 원한다면 단정을 내려주지.”
어떻게든 저쪽에 내분을 일으켜야 이 상황을 수습할 텐데, 저 이상한 놈에게 자꾸 말이 밀리니까 공격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내가 너무 당황해서 머리가 안 굴러가는지도 모르겠다.
원래 생각대로라면 아인델프의 통제하에 선원들이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서 서로 견제해야 하는 건데, 어디서부터 꼬인 거야?
어딘가에 매듭을 풀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고민에 잠겨 있는데 뒤쪽에서 내 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 <95화> 자존심과 목숨의 무게 > 끝
작가의말
역시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만듭니다!
NPC 1이 각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레파토리가 너무 진부한 모양입니다.
오늘 사건 다 맞추셨어...ㅠㅠ
다음에는 아무도 못맞추도록 꽁꽁 숨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