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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96화 (96/420)

< <96화> 고르디우스의 매듭 >

나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졌다.

지금 상황에서 나 말고 누군가가 앞으로 나서봐야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들다.

그리고 선장이 지휘 중일 때 허락 없이 옆에(같은 선에) 서는 것도 상당한 무례에 해당한다.

그런데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내 옆까지 성큼성큼 다가 온 네이선이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어?”

나는 너무 뜬금없고 비현실적인 광경에 눈만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얼마나 당황했는지, 순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기세 좋게 소리 지르던 그놈 하나뿐일 정도였다.

기도에 제대로 찔렸는지 신음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목에 박힌 단도를 부여잡던 놈은 곧 바닥에 넘어져 버르적거렸고, 그제야 멈춰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야! 너 지금 무슨 짓을···!”

“아니, 반란은 사형이잖아? 무슨 쓸데없는 이야기를 자꾸 하고 있어?”

난처한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하는 네이선의 눈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고, 자신은 옳은 일을 했다는 당당함이 보였다.

이 단순 무식한 놈! 피를 보면 사람은 대부분 이성을 잃는다.

게다가 자신들의 리더가 대화 중에 기습으로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 저놈들이 이성을 잃으면 당연히 그 다음은 끝장을 봐야하는 유혈사태다.

“전투 준비! 전부 모여!”

내가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밑에서도 함성이 터져 나왔다.

“돌격! 비겁한 선장 놈을 죽여 버리자!”

“와아아아!”

“돌격! 전부 다 죽여!”

내가 왜 비겁한 놈이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살짝 억울했지만, 일단 우리는 각자 무기를 쥐고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 올렸다.

선교는 좁아서 싸울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되어 있다.

진입로가 두 군데라서 입구를 틀어막는 최고의 전술을 취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단 모여 있으면 어떻게든 이길 수는 있겠지.

아무리 정신이 나갔어도 절반쯤 죽으면 알아서 항복할 테니까 충분히 승산이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해?

결곡 참지 못한 우르타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어, 리안, 선장님? 왜 안 올라오죠?”

“그, 그러게? 뭐지? 모두 긴장 풀지 말고! 오펜, 밑에 좀 봐.”

잠시 후 오펜이 당황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저기, 선장님. 아직 그대로 있는데요?”

“어?”

내가 슬며시 자리를 옮겨 선교 아래를 보니, 선원들이 두 패로 나뉘어 대치하면서 서로 뭐라고 하는 중이었다.

그러더니 한쪽 패가 나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선장님! 저희는 약속한 돈만 주신다면 선장님을 따르겠습니다!”

“선장님을 따르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뭐야 이게?

더 웃기는 건, 놈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니까 반대쪽에 있던 몇 놈이 슬그머니 소리 지르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이다.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네이선이 으쓱거리며 말했다.

“거봐요, 선장님. 이번에는 내가 맞았지?”

하, 진짜 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인 거야, 아니면 내가 멍청한 거야···?

* * *

상황은 그렇게 네이선의 놀라운 기지(?)로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끝까지 반항하던(전향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놓친) 다섯 명은 다른 선원들에게 포위되어 있다가 나와 네이선이 내려가자 바로 무기를 던지고 항복해버렸고,

반란자들을 포박하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이러했다.

반란을 주도하던 벤트가 어이없이 사망하고 모두 눈이 돌아가서 돌격하려던 순간, 아심과 몬데스는 오히려 정신을 차렸다.

원래부터 모르아 갑판장을 따르던 두 사람도 군중심리에 넘어가 다른 선원들과 행동을 함께하기는 했다.

하지만 당장 선동하던 벤트가 죽고 나자 원래도 찝찝했던 마음에 더해 과연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 든 것이다.

두 사람은 갈피를 못 잡고 머뭇거렸고 그들을 본 몇 명 역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참 앞으로 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보니 웬걸, 자신들을 따라온 사람은 11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단 돌격이 멈추고 생각할 시간이 생기자, 분위기에 휩쓸렸던 사람들도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전원이라면 몰라도 고작 11명이라면 반란 성공률이 확 떨어지는데, 혹시라도 남은 5명이 뒤를 친다면 승리는 불가능했다.

몇 초가 흐르자 슬그머니 칼을 내리고 눈치를 보는 자들이 늘어났고, 이때다 싶었던 몬데스가 지금 항복하면 살려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순식간에 공격하자는 인원보다 항복하자는 인원이 더 많아지자, 돌격은커녕 서로 견제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리버티 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야 할 선상 반란은 사망과 부상 각 1명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내게는 아직 뒤처리가 남아있었는데, 다름 아닌 마지막에 항복한 녀석들의 처우 문제였다.

“죽여야 합니다. 고민할 필요나 있습니까? 마음 같아서야 모조리 마스트에 매달아 버리고 싶지만, 최소한 남은 다섯, 아니, 갑판장을 기습한 두 놈까지 일곱은 죽여야 합니다!”

“일등항해사 말이 맞지, 요. 크흠, 선상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해적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이 기본 아닙니까?

“그런데 꼭 다 죽여야 하나···?”

“조리장! 반란은 중죄네. 그래도 항복한 것은 참작해서, 마스트에 매달거나 묶어서 바다에 던지지는 말고, 깔끔하게 목을 치시죠?”

우르타만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고, 아인델프, 네이선, 모르아 모두 확고한 표정으로 죽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내 생각에도 원래 그게 맞기는 한데···.

“선주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흐음···. 나는 선장에게 이 배의 운영을 위임했네. 선장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지.”

치사하게 이렇게 빠져 나가는군.

내가 고민하는 이유는 저놈들이 불쌍하다거나 하는 인륜적이고 도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인원수가 줄어들면 배를 움직이는 것이 더 힘들어진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어떤 식으로든 내가 선원을 죽여서 인원수가 줄어들면 남은 선원들의 불안감은 더 커진다는 것은 두 번째 이유였다.

저놈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죽으면 죽을수록 우리가 이득이라고 생각할 게 뻔하니까 말이다.

불안해진 선원들이 다음에는 이번 사건을 경험 삼아 우리가 하나씩 떨어져 있을 때 암살이나 각개격파를 시도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입항할 때도 문제다.

입항 시 우리가 취해야 할 입장에 대해 이미 몇 차례나 드웰과 의견을 나누었지만, 이거다 하는 방법이 없었다.

노던테라를 향해 출발했다가 7년 만에 누더기가 되어 돌아온 상선이다.

심지어 누가 봐도 어딘가 육지에서 수리한 흔적이 역력한데, 호기심이 생기지 않겠어?

호기심을 풀기 위해 납치와 고문이라는 방법을 동원할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되는 것 아닌가 싶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일단 우리의 존재가 알려지면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곳이 바로 일레드 왕국이다.

지금 일레드가 제국과 전쟁 중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선전포고 전에 제국의 정규 함대를 상대로 적대행위를 했다는 것을 증명할 증인이 무려 23명이나 살아 돌아온 거다.

······.

어휴, 내가 일레드 왕국 관계자라도 무슨 짓을 해서든 입을 막아버리고 싶겠다.

게다가 몰로스 제국이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어떻게든 우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용을 쓸 것이고, 그 방법이 우리에게 행복한 방법일 확률은 극히 낮았다.

이런 상황만큼은 피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인원수가 많은 쪽이 좋았다.

그래야 다른 놈들이 잡히고 죽어갈 때 도망갈 기회라도 생기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일단 살려두죠. 배식은 다른 선원의 절반만 지급하고, 손과 발에 쇠고랑을 채워서 일을 시키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갑판장이 불편한 표정으로 반론을 냈다.

“크흠, 선장님, 어차피 남은 거리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인력이 조금 부족하다고 해도 굳이 반란자들까지 써야 하겠습니까?”

“갑판장 말이 옳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저들을 다 죽이고 그 돈을 우리가 나눈다고 하면, 남은 선원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차라리 살려두는 게 좋아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갑판장이 수긍하려는 순간, 미심쩍은 표정으로 네이선이 말을 가로챘다.

“잠깐, 선장님? 그럼 설마 그 반란자 놈들에게도 돈을 주겠다는 건가, 요?”

“응, 그래야 다른 선원들이 안심할 거고, 반란자들도 딴생각 안 하고 열심히 일할 테니까.”

내가 반란자들에게도 돈을 주겠다는 말에 네이선이 턱이 빠질 정도로 기함했고, 거의 미친놈을 보는 눈으로 나를 보던 갑판장이 간곡하게 다시 권했다.

“그냥 놈들을 죽이고 벤트 그놈 말처럼 다른 선박에게 구조요청을 하시죠? 차라리 그게 낫겠습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선주님과 이야기해봤는데, 일단 우리를 숨겨야 한다는 대명제에 어긋나고, 이 인원으로 다른 선박과 접촉하는 것도 너무 위험해요.”

“선주님 앞에서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리버티의 꼴을 보고도 굳이 약탈하려는 녀석이 있을까요?”

“약해 보이면 구걸하는 거지의 동화까지도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배가 특별히 인간적이고 착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군요.”

그 이후로도 한동안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선장인 내 의견을 찍어 누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불안해진 선원들이 암살할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오자, 결국 모두 내 의견에 수긍하고 말았다.

* * *

다음 날 아침, 물 한 모금 주어지지 않은 채로 함수 창고에 묶인 채 방치되어 있던 일곱 명(갑판장을 기습한 자들까지 포함)이 끌려 나왔다.

“너희는 배가 정박하기 직전까지 그 쇠고랑을 벗지 못할 거고, 앞으로 식사도 다른 이들의 절반만 지급될 거다. 하지만 딴생각 하지 않고 열심히 일한다면, 죽이지는 않겠어.”

죽이지 않는다는 말에 선원들이 웅성거리고, 바닥을 보던 반란자들의 고개가 빛의 속도로 올라오며 나를 보았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재차 확인했다.

“정말··· 저희를 살려주실 겁니까?”

“나도 죽여 버리고 싶다. 죽이면 속도 시원하겠지. 그런데 처음에 출항할 때 말했잖아. 서로 죽이지 말자고, 곱게 항구까지 가자고. 나는 아직 약속을 지킬 용의가 있다.”

거기까지 말을 마친 나는 불신 또는 불만의 표정으로 나를 보는 다른 선원들을 보며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너희는 뭐가 그렇게 당당하지? 원칙적으로는 너희도 사형이야. 내가 이들을 죽이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다. 내가 이들을 죽이고 돈을 가로채면 너희도 불안할 테니까. 식량은 조금 부족하지만 못 버틸 정도도 아니고, 이제 고작 이틀만 버티면 된다. 제발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말자. 두 번째는 나도 다 죽이는 수밖에 없어.”

그러자 이번에 이름을 알게 된 아심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선장님, 설마 이들을 살려주는 정도가 아니라, 내릴 때 돈도 주시겠다는 뜻입니까?”

“그래.”

“하지만 반란자들을···!”

“다시 말하지만, 아심, 너도 마찬가지다. 너도 반란을 일으켰잖아. 내가 너희를 다 죽이고 유령선의 선장이 되어야 속이 시원하겠나?”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봉합된 선상 반란의 사후 처리는 그 안에 수많은 욕심, 불만, 불안, 불신 등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델라 항구에 도달할 때까지 더 이상 덧나지는 않았다.

드디어 탈출의 가장 큰 고비를 넘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제일 먼저, 우리가 부두에 들어서기 전에 정선 명령을 내리고 배에 올라온 이 사람, 델라 항구의 항구관리관이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배를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지? 놀라울 정도로군.”

“흠흠, 리버티 호에 탑승하신 것을 환영하오, 본인은 선주 드웰이오.”

“선장이 아니고 선주시라? 어찌 되었건 만나서 반갑소, 드웰 씨.”

드웰과 악수를 나는 항구관리관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거야 원, 선원들 상태도 영 시원치 않군. 아무래도 자세한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본국에 요청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함께 도움을 받았으면 하오.”

“본국? 벨로키나 출신이신가?”

“그렇소, 다시는 밟지 못할 것이라 믿었던 고국 땅을 밟으니 감개무량이군.”

잠시 항구관리관의 탐색하는 눈길이 이어졌다.

그리고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선창 등을 확인한 부하들이 나와서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이자 그제야 얼굴을 풀고는 말했다.

“귀환을 환영하오, 리버티 호. 14번 A구역에 정박하시오.”

< <96화> 고르디우스의 매듭 > 끝

작가의말

드디어 리버티 호가 본토에 도착했습니다!

이제부터 본격 리버티 호의 비상...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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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대가리만 쓱싹이라고 맞추신 분이 계셨어요...

단순한 작가의 머리가 원망스러웠습니다.

다음에는 조금 더 신박한 사건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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