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숨겨진 재능 >
풀줄기를 팔고 받은 돈주머니를 내려놓자 드웰은 크게 웃으며 기뻐했다.
그리고 상업 허가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는 말에는 뛸 듯이 기뻐했다.
제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한참을 기뻐하던 드웰은 문득 표정을 굳히더니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자네에게는 큰 손해로군. 그런 부탁이 아니었다면 꽤 큰 돈을 만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얼마를 달라고 말하기가 굉장히 민망한 상황이었기는 하지만, 그래도 손해 보는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사장님께 빨리빨리 말씀드려야 서로 의가 상하지 않는 법이지.
“그럼 선주님이 적당히 챙겨주시죠? 솔직히 리버티 호 수리비를 제대로 냈어도 그것만 30만 로스는 들었을 것 같은데요.”
“에이, 무슨 그 정도까지··· 그래도 자네에게 조금 챙겨주기는 해야겠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선주님.”
“10만 로스 정도면 되겠나?”
“아쉬운 대로 그 정도만 챙겨주셔도 뭐, 흐흐, 그런데 언제 주실 겁니까?”
“그게, 지금 당장은 무리고, 자금이 적당히 여유가 생기면 그때 주겠네.”
나는 보라는 듯이 김샜다는 표정을 지으며 불퉁거렸다.
사실 그렇잖아?
적당히 여유가 생기면 준다는 것은 안 준다는 말이랑 똑같은 거다.
장사할 때 자본금은 다다익선이고, 재벌도 현금 여유는 없는 법이거든.
“그게 뭡니까? 안주겠다는 말이랑 뭐가 달라요?”
“지금 당장은 힘들다는 것은 자네가 더 잘 알잖나? 여유가 생기면 준다니까?”
“에이, 그냥 안주겠다는 거잖아요, 장사하는 사람이 무슨 여유가 생겨요?”
“그, 그런가? 아니, 장사를 해봤어야 알지.”
당황하며 얼굴을 붉히는 드웰을 보며 나는 깨달음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니 졸지에 ‘선주님’이 되셨지만 원래 드웰은 조선공이었고,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노던테라 탐사선에 탔던 선원이었다.
아직 ‘사장님 마인드’가 부족하신 분이지.
“그렇게 대충 얼렁뚱땅하지 마시고 6개월 후, 어때요?”
“6개월? 그때 어떻게 될 줄 알고?”
“에이, 6개월이나 장사했는데 10만 로스도 못 줄 것 같으면 장사 접어야죠.”
“휴, 이봐 리안 선장. 사실 나도 고민이 많아. 막상 배가 생기기는 했는데 사실 무역이니, 교역이니 하는 것은 전혀 모르니까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저보고 리버티 호를 사라느니 하는 말은 하지 마세요, 솔직히 말해서 리버티 호를 사느니 지금 모은 돈으로 중고 중형 상선을 알아보는 쪽이 나을 것 같으니까요.”
물론 괜찮은 중고 선박을 살 돈도 부족하지만, 전 재산을 털어 싸게 나온 중고 선박을 사더라도 남은 돈이 없다면 장사를 시작할 수 없다.
배라는 것이 그냥 바다에 띄워 놓는다고 돈이 벌리는 것은 아니라서, 선원도 고용하고, 식료품도 사고, 교역품도 사야 하니 말이다.
“아닐세! 사실 리버티 호를 포기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나도 알지만, 포기하기가 쉽지 않아···. 그래서 말인데, 원래 선장이 아닌 선주가 배를 타는 것이 정상은 아니지 않나?”
“그렇긴 하죠, 선장이 되고 싶으세요?”
효율적이지 않다 뿐이지, 선장은 항해술을 모르거나 상거래의 재능이 없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항해사를 고용하고 회계사를 고용하면 되니 말이다.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내 주제에 선장은 무슨. 하던 일이 배 만지는 일이었으니 이제 그냥 고향에서 작은 조선소나 하나 열었으면 하네. 조선소라는 것이 늘 잘될 수가 없으니까 리버티 호에서 적당히 수입이 나오면 더 좋고 말이야.”
“그러니까, 리버티 호를 온전히 제게 맡기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다만 내 고향까지는 가 주었으면 하네. 아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고향 아니겠나?”
“으음···.”
“자네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지? 나는 큰 욕심은 없네. 그저 자네 능력껏 벌어서 수익금을 적당히 나눠 주기만 하면 돼. 그게 은화 한 닢이라도 난 불만을 갖지 않을 테니까. 자네만 잘한다면 그깟 10만 로스는 금방이지 않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익에 대해 터치를 하지 않겠다면 거의 내 배인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배가 조금, 아니, 많이 낡기는 했지만, 이 나이에 선장을 계속 해먹을 기회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자금은 어떻게 하실 건데요?”
“뭐, 당장 돈을 다 털어서 조선소를 차릴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적당히 고향에 정착할 비용만 있으면 되네. 나머지는 초기 자금으로 쓰게.”
“그렇다면 내일 리버티 호를 조선소 넘기고 선원과 항해사, 갑판장을 고용하겠습니다. 아, 회계사도 한 명 필요하겠네요.”
* * *
그날 저녁을 항구에서 해결한 리버티 호의 전원은 배로 돌아와 돌아가면서 당직을 섰다.
혹시라도 리버티 호의 신소재(?)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갔다면 침입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내 노파심 때문이었는데, 다행히 노파심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한 가지 특이한 사건이 있었는데, 아인델프가 본인이 받은 25만 로스를 반납한 것이었다.
똑같은 상황에서 자신만 그런 큰돈을 받는 것은 옳지 못한 것 같다고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는데, 솔직히 의외였다.
아인델프를 받아주려고 한 시점에서 뭔가 형평성에 어긋난 것 같기는 했지만, 워낙 큰돈이라서 포기하기 쉽지 않을 줄 알았거든.
심지어 일등항해사 자리도 내놓겠다는 것을 뜯어말려야 했다.
막말로 어떤 놈이 들어올 줄 알고 생판 모르는 놈에게 일등항해사를 맡기겠는가?
능력이 조금 부족해도 차라리 그나마 믿을 수 있는 녀석이 낫지.
리버티 호를 마예도르 조선소 건선거에 넣고, 자재의 대금을 받은 돈과 아인델프가 반납한 돈까지 합치니 대충 100만 로스 정도의 돈이 모였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드웰의 정착 자금으로 30~40만 로스를 뺀다면 약간 애매한 금액이기는 했다.
그래도 이만하면 스타트 조건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누구처럼 손바닥만 한 배와 금화 몇 개를 들고 시작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은행에서 리버티 호 명의의 공금 계좌를 개설하고 일행이 식당에 앉은 시간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이었다.
다들 허기를 참지 못해 전투적으로 식사를 마친 다음, 각자 맥주를 한 잔씩(오펜은 음료수를 받아서 실망했다) 앞에 놓자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드웰이었다.
“다들 알겠지만 나는 곧 배에서 내릴 거야.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여기 리안 선장이 리버티 호를 책임지게 될걸세. 그래서 말인데, 우르타와 네이선에게는 뭔가 제대로 된 직함을 줘야 하지 않겠나?”
“응! 아니, 선장님, 나는 조리장은 싫은데, 요.”
“어, 음, 저도 해병대장은 조금··· 해병대도 없는 해병대장이라니 너무 이상해서···.”
사실 나도 상당히 고민을 했는데, 적당한 직책이 없다.
지구의 복잡한 현대 전함처럼 일이 세분된 것이 아니다 보니, 선원 출신이 할 수 있는 직책이라고는 갑판장뿐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친구들이라지만 우르타나 네이선이 아직 갑판장을 할 수준은 아니고, 굳이 직책을 준다고 하면 내가 테일러에게 보좌관 자리를 받았던 것처럼 뭔가 새로운 자리를 신설해서 줘야 할 판이다.
그때 우르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기, 우리 대포도 사는 건가요, 선장님? 아까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응, 일단 양현에 3문씩. 중형 개론드 포를 달아 달라고 했어. 확실히 포가 있으면 해적을 상대할 때 전략 선택의 폭이 넓어지니까 말이야. 물론 대포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을 구하는 게 일이기는 한데.”
“아앗! 그거 내가 할래! 내가 잘할 수 있어! 아니! 저 잘할 수 있어요, 선장님!”
갑작스러운 우르타의 급발진에 다들 놀란 눈으로 우르타를 보았다.
저 녀석 그냥 관측병만 했던 것 아니었어?
내 생각과 같았는지 네이선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야, 우르타. 너는 그냥 포 쏘는 거 구경만 했잖아. 쏠 줄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대포가 얼마나 위험한 무기인데.”
그래도 한동안 군인들이랑 좀 놀다 보니 네이선이 그런 쪽으로는 조금 빠삭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우르타의 말은 우리가 할 말을 잊게 만들었다.
“무슨 소리야! 그, 일레, 아니, 마지막 전투랑 그 전에 해적이랑 싸울 때 대포 내가 쐈거든?”
“뭐?!”
모두가 깜짝 놀라자 콧대가 하늘로 치솟은 우르타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엣헴! 다들 나보고 얼마나 잘 쏜다고 했는지 알아? 포병대 전멸하고 해적선 맞춘 것도 내가 쏜 거라고!”
“······.”
얘도 바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포술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숙달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닌데 말이다.
심지어 오펜의 표정은 무슨 아이돌을 보는 열성 팬처럼 바뀌어 있었다.
뜬금없이 밝혀진 우르타의 재능에 대해 모두가 떠드는 동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어차피 네이선이건 우르타건 항해 중에 특별한 직책을 맡기는 것은 무리다.
우르타가 견시수로서 뛰어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견시장이라는 요상한 일을 맡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견시수건 조범수건 조타수건, 선원을 관리하는 것은 갑판장의 주요 업무이기도 하고 말이지.
하지만 불가피한 전투 상황에서 두 사람의 능력은 확실히 일반 선원 이상이다.
그렇다면 전투 상황에서만 한시적인 직책은 어떨까?
“이렇게 하자. 먼저 아인델프는 일등항해사야. 어차피 당분간 부선장은 쓰지 않을 생각이니까 내가 불가피하게 리버티 호를 지휘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모두 아인델프의 명령을 듣도록 해. 아인델프, 할 수 있겠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장님!”
아인델프의 눈에 열정이 보인다.
최근 아이델프가 스스로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서 참 보기 좋다.
“그리고 네이선. 너는 돌격대장이야.”
“엑? 돌격대장? 그게 뭔데? 요?”
“돌격대장은 전투가 발생할 경우 갑판장을 도와 백병전 지휘를 맡아. 평소에는 선원들에게 무기 쓰는 방법을 알려주고, 무기고를 관리하고, 갑판장을 보조하도록 해.”
“그건 해병대잖아요?”
“아니지, 해병대장은 해병대의 지휘관이잖아. 하는 일은 비슷해도 소속이 달라. 갑판장의 부관 정도라고 생각하면 돼.”
“네에···.”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는 우르타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나이에 비해 철없고, 단순하고, 사고나 치는 녀석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다.
“우르타는 포술장이야.”
“포술장? 포병대장 같은 건가요?”
“어휴, 좀 들어! 너도 평소에는 갑판장을 도와 견시수들을 책임져. 그리고 포대는 네 관할이야. 대포 관리, 화약과 포탄의 수급, 불씨 유지, 재능 있는 선원들을 뽑아서 훈련시키는 것까지 네가 맡아. 전투 시에는 당연히 네가 포격을 담당해야겠지?”
“완전 좋아! 네! 알겠습니다, 선장님!”
우르타가 희희낙락하고 있는데 네이선이 슬쩍 손을 들며 물었다.
“저기, 나도 선원들 뽑으면 안 될까?”
“흠, 상관은 없는데, 해병대처럼 선원 일에서 열외는 안 돼. 우르타도 마찬가지고.”
이클로나를 탈 때 선원들이 가장 불만을 가진 부분이 바로 해병대와 포병대의 존재였다.
이상하게 전투가 잦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불만이 밖으로 터져 나왔을지도 모른다.
전투가 없다면 해병대와 포병대는 무임승차 하는 인원에 불과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 생각에 군함이 아닌 이상 해병대와 포병대를 별도로 운용하는 것은 과도한 낭비다.
물론 전문성이야 떨어지겠지만, 내가 용병함대나 해적함대를 이끌 것도 아닌데 전투 전문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잖아?
처음에야 생소한 직책에 모두 어색할 것이다.
새로 고용할 사람들 말고도 기존 인원들도 꽤나 어색하겠지.
그래도 내가 보좌관이 되었을 때보다는 나을 거다.
최소한 우르타와 네이선에게는 선장의 친구(?)라는 비공식적인 강력한 직함이 있으니 말이다.
솔로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낸 내 머리에 스스로 감탄하고 있는데, 왠지 오펜의 표정이 눈에 걸렸다.
활짝 웃으며 우르타와 네이선의 말에 장단을 맞춰주고는 있지만 한구석에는 쓸쓸함이 보인다.
아마도 소외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지.
한참 감수성이 풍부할 나이가 아닌가?
자신이 소속되어 있다고 믿던 그룹에서 자신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그룹에서 박리(剝離) 당하는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진짜 오펜은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다.
아직 15세의 소년에 불과한 수습 선원인 오펜에게 도대체 뭘 줄 수 있다는 말인가?
테일러가 데리고 다니면서 글도 제대로 익히게 하고 기초적인 항해 지식도 가르친 것 같기는 한데, 그래서 오히려 선원 일은 더 서툴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견습’ 딱지를 떼 주는 것조차 힘들다.
그래도 이럴 때 따뜻한 한마디라도 해주는 것이 어른의 도리인 법이지.
“오펜, 실망하지 마. 넌 아직 어리잖아. 아인델프와 나에게 계속 항해술을 배우고 선원 일도 배워. 글도 다 익혔으니 회계사가 생기면 회계 보조를 시켜줄게. 너라면 언젠가는 선단이나 함대를 이끄는 제독이 될 수도 있을 거야.”
< <99화> 숨겨진 재능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