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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00화 (100/420)

< <100화> 청년의 나이와 노인의 나이 >

며칠 동안 항구 여기저기를 쏘다니면서 쓸만해 보이는 선원들에게 배에 대해 운을 띄워보기는 했는데, 다들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접근해서 배 이야기를 할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은데, 내가 선장이라고 하면 바로 분위기가 장례식장이 돼버리는 것이다.

말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꼴이, ‘네까짓 게?’라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선원을 모으는 일도 그렇게 어려운데 항해사나 갑판장을 채용하는 일이라고 쉬울 리가 없었다.

어렵게 만난 항해사나 갑판장 경력이 있는 선원들도 내가 선장이라는 말을 듣고는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가 되어 오늘은 그냥 쉬자는 느낌으로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왠 남자가 내 테이블로 와서 맞은편에 앉았다.

“혹시나 했더니, 정말 리안이군. 살아있었구만.”

응? 살아있었냐고? 내게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있나? 그보다 이 목소리 굉장히 익숙한데?

호기심이 생겨 테이블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자, 웬 늙은(털이 회색이었다) 털복숭이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어라? 고릴라, 아니, 갑판장님?!”

“뭐? 고릴라? 그게 뭐야?”

“아니,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진짜 갑판장님? 갑판장님이 여기에 왜 있어요?”

“뱃놈이 어딘들 못 가겠냐? 그러는 너는?”

나는 어딘지 모르게 조금 후줄근해 보이는 그의 복장을 보고는 지나가는 점원에게 새 맥주를 두 잔 시켰다.

마침 내 것도 다 떨어진 참이라서 말이지.

덥수룩해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 수염과 머리카락도 그렇고, 입고 있는 꼬랑내 나는 옷도 그렇고 요즘 살기가 힘드신 모양이다.

“아니 꼴이 왜 그래요? 고드실카 호에서 짤렸어요?”

“쉿!”

“그래서 제가 밀수할 때 적당히 하시라고··· 으음?”

나는 진짜 갑판장님이 고드실카에서 해고당한 줄 알고 조금 더 놀리려고 했는데,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에이, 머리카락이랑 수염 좀 정리하고 다니시지, 덥수룩하고 지저분하기까지 해서 시선 강탈 수준이라 표정을 읽기가 너무 어렵다.

생각해보니 고드실카 호의 선장님은 배의 전반적인 부분을 갑판장님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밀수하고 밀항자 받아주는 것도 아마 어느 정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던 선장님이 고작 몇 달 만에 갑판장님을 해고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진해서 내렸다는 말인데···?

“진짜 무슨 일인데요? 왜 이러고 있어요?”

때마침 점원이 가져온 맥주를 건네주며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말을 걸자, 갑판장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뭐 뱃놈이 배를 안 타면 매일 술밖에 더 마시겠냐? 꽤나 많이 돈을 모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돈이 없더군. 그래서 꼴이 좀 우스워졌지.”

“아니, 그럼 배를 타야지, 바다의 사나이께서 이렇게 될 때까지 뭐 하셨담?”

“크크크큭, 이것 좀 봐라.”

약간 자조적인 웃음을 짓더니 갑판장이 왼손으로 맥주잔을 들었다.

부르르르르···.

거의 핸드폰 진동 수준으로 갑판장의 손이 부들거렸다.

근육이 아직 다 죽지는 않은 것으로 봐서 근력 부족은 아닌 듯하니, 수전증이다.

“그 손, 언제부터 그래요?”

“꽤? 너랑 헤어지기 전부터 가끔 그랬으니까.”

“아니! 그런 사람이 술을 마셔요?”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앉아, 멍청한 놈아.”

뱃일에 있어서 스승 같은 사람이고 나름대로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솔직히 고드실카를 내리기 전까지 우르타나 네이선보다 갑판장님이랑 더 유대관계가 깊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사람이 늙고 몸이 망가져서 엉망이 된 꼴을 보니 뱃속에서 뜨거운 불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수전증이 조금 있다고 해서 갑판장 일을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배라는 곳이 그렇게 포용력이 큰 사회조직이 아니다.

장애가 있다면 일단 색안경을 끼고 불편하게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갑판장님도 돈이 떨어지기 전에 다른 배를 탈 생각을 했겠지.

하지만 계속된 음주로 수전증이 더 심해졌을 거고, 몇 번쯤 좋지 않은 꼴을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돈도 떨어지고, 외양은 더 안 좋아지고, 채용확률은 더 떨어지고, 뭐, 이런 악순환이 계속된 것은 아닐까?

“오른손도 그래요?”

“걱정하는 척은. 쓸데없는 말 그만해라. 이래 보여도 아직 너 정도는 한 손으로 가뿐하게 이길 수 있으니까.”

흐음, 이제 좀 비벼볼 만할 것 같기도 한데?

갑판장님 근육도 많이 줄었고, 나도 그동안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실력이 엄청 늘었다는 말이지.

애초에 60대 할아버지가 20대의 창창한 나를 이기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잖아?

“배 계속 타실 거예요?”

“뭐 그래야겠지. 한 가지 일만 끝내면 말이야.”

“네? 무슨 일이요?”

“개인적인 일이다. 알 거 없어.”

나는 깊게 가라앉는 그의 눈빛을 보면서 더 이상 캐묻는 것을 포기했다.

세상에 사연 없는 뱃놈이 어디 있겠는가? 갑판장님 나이 정도면 사연으로 탑을 쌓을 수도 있을 거다.

“그 일 끝나고 우리 배 타요.”

“너희 배? 아서라, 이 나이에 고작 선원 짓을 하라고?”

“누가 선원으로 타래요? 갑판장해요, 갑판장.”

“얼씨구? 네가 뭔데 갑판장을 네 맘대로 해라 마라야? 그 사이에 선장이라도 된 거냐?”

“네.”

“···뭐?”

“저 선장이라고요.”

잠시 내 얼굴을 보며 어떤 반응 해줘야 할지 고민하는 듯하던 갑판장은 테이블을 두들기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농담이 꽤 늘었구나? 이번에는 조금 재밌었다!”

이 노인네가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말을 하시네?

난 원래부터 농담을 잘하는 편이었다.

갑판장의 꼰대 감성이 이해를 못 했던 것뿐이었지.

내가 팔짱을 끼고 한심하다는 눈으로 계속 바라보자, 그제야 갑판장님은 정색하더니 다시 확인 질문을 던졌다.

“진짜? 진심이냐? 네가?”

“아, 속고만 사셨나? 진짜 제가 선장이라고요.”

“허, 그렇게 저금인가 뭔가를 하더니 결국 배를 산 거냐?”

“그러기에는 조금 부족해서, 일단은 경험부터 쌓기로 했죠.”

“미치겠군. 너 같은 애송이에게 선장을 맡기는 사람이 있다고? 네 X만 한 고기잡이 어선쯤 되냐?”

“450톤 누벤테급(조선소에서 확인했다) 중형 상선이에요, 좀 구형이지만.”

“···농담이지?”

“진짜라구요!”

지금 당장 배를 보러 가자는 갑판장님을 겨우 자리에 앉히고 진지하게 다시 요청했다.

“우리 배 타요, 어차피 이 꼴로 딴 배 탈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배 이름이 뭔데?”

“리버티 호요.”

“지금 오버홀(Overhaul, 분해 수리, 최고 수준의 수리 공정) 중이고?”

“조선소 측에서 알아서 해준다고 해서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거의 비슷할걸요?”

“거참···.”

“계속 말 돌리지 마시고, 어떻게 할 거예요? 진짜 갑판장이 필요해서 그래요.”

“들어보니 갑판장만 필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크큭, 그래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일단 하려던 일부터 하고.”

“그게 뭔데요?”

내 질문에 미소를 싹 지운 갑판장님이 눈을 빛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복수.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하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2인실을 빌려 들어가자, 문단속을 확인한 갑판장이 대뜸 주먹을 휘둘렀다.

이건 그냥 맞을 수밖에 없는 거다.

이 타이밍에 갑자기 주먹질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눈앞에 별이 번쩍번쩍 빛나고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어커컥, 지금 무슨 짓을···!”

“엄살 피우지 말고 일어나. 그 정도로 봐주는 거니까.”

입 안에 가득 퍼지는 혈향을 느끼며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반대쪽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갑판장이 보였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싸우자는 태도는 아닌 것 같아서 일단 이야기라도 들어보기로 했다.

그냥 반갑다고 이렇게 쥐어팰 만큼 미친놈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말이 퉁명스럽게 나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지만 말이다.

“뭐 하자는 겁니까? 나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오늘 곱게 안 끝날 거요.”

내 독기어린 말에 피식 웃은 갑판장이 대답했다.

“그따위 실력으로? 아직 10년은 이르다. 됐고, 너 고드실카 호 이야기 들었냐?”

“고드실카 호요? 갑자기 고드실카가 왜 나와요?”

“실종됐다.”

“네?”

애석한 일이기는 하지만 고드실카 같은 소형 상선은 수시로 실종된다.

그런데 그 소식을 몰랐다는 게 내가 맞을 이유가 되나?

“증거는 없지만 뻔하지, 일레드 놈들이야.”

“아니, 일레드 왕국이 왜, 어? 설마?!”

“아직 감이 죽지는 않았군. 네놈이 태웠던 왕녀, 그년이 문제겠지. 내가 그래서 그만 은퇴하라고 이야기했건만···.”

“그럼 설마 그 복수라는 게, 왕녀님을?”

“그래, 그년이 스코타 후작가로 들어간 모양이더군. 제 외할아버지가 지금 스코타 후작이니까.”

알렌 경과 왕녀님이 고드실카에 탄 것이 발단인 것은 맞는데, 그렇다고 왕녀님에게 복수한다는 것은 이상하잖아.

복수를 한다면 직접적 원인인 일레드 왕국에 복수해야지.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복수를 한다는 게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왕녀님을 죽여 봐야 진짜 복수를 할 자신이 없으니까 만만한 놈을 두들기는 것밖에 안 된다.

“죽일 겁니까?”

“그래. 며칠 전에 이곳에 왔다 간 모양인데, 내가 조금 늦었지.”

“그게 무슨 개똥 같은 논리예요?”

“뭐야?!”

“그렇잖아요. 복수를 하려면 일레드 왕국을 파멸시키던가, 고드실카 호를 어떻게 해버린 놈들을 조지던가 해야지, 커헉!”

언제 다가왔는지 갑판장이 무시무시한 눈을 한 채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수전증으로 손이 부들거리는 것이 느껴지기는 하는데, 여전히 힘은 놀랄 만큼 세다.

“다시 지껄여 봐.”

“씨, 씨발! 그냥 나, 나부터 죽여요. 솔직히 그 사람들 태, 태운 건 나니까, 나를 제일 먼저 죽여야지.”

“많이 컸구나, 리안.”

눈을 돌려보니 어느새 오른손에는 단도를 들고 있다.

진짜 죽일 셈인가?

이제 겨우 선장까지 기어 올라왔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죽는다고?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갑판장의 정강이를 힘껏 차고, 균형이 흐트러진 틈을 타서 양손으로 내 멱살을 잡은 팔 관절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그대로 박치기!

겨우 멱살을 풀어낸 나는 골이 띵하게 울리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부여잡고 허리를 더듬어 단도를 뽑았다.

갑판장은 내게 서너 걸음 떨어져서 피범벅이 된 코를 부여잡고 있었다.

“에이씨, 지금까지는 스승이라고 생각해서 참은 겁니다.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둘 중의 하나는 오늘 죽어야지. 당연히 얼마 못 산 나보다는 갑판장님이 먼저 가시는 게 도리고.”

호기롭게 소리는 쳤는데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다.

오늘 같은 날 네이선을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그래도 마지막까지 발악이라도 하겠다고 초긴장 상태로 집중하고 있는데, 갑판장은 그냥 뒷걸음질 쳐서 침대에 주저앉았다.

“후, 코찔찔이 꼬맹이가 진짜 많이 컸군. 앉아라, 내가 실수했다. 사과하마.”

“내가 언제 코찔찔이였다고···.”

“앉아, 너 무릎 떨린다.”

“···진짜 공격 안 할 거죠?”

“그놈 참, 죽이려면 진작 죽였어.”

그 말이 아주 틀린 말도 아니라서 나는 조심스럽게 내 침대에 앉았다.

침대에 앉기 무섭게 두 다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모터라도 단 것처럼 부들거렸다.

몸이 아는 것이다, 방금 전에 진짜 죽을 뻔했다는 것을.

“그래, 네놈 말이 맞다. 왕녀도 피해자일 뿐이지. 우리는 더럽게 얽힌 거고.”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런데 어쩌겠냐? 난 늙고 병들었는데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옳고 그름보다 내 분노를 조금이라도 풀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어.”

“같이 해요, 혼자서는 못해도 둘이서 하면 뭐, 일레드 왕국이 ‘아얏!’ 할 정도는 때릴 수 있겠지.”

“흐흐흐, 방금 전에 널 죽일뻔한 미친 노인네를 갑판장으로 쓰겠다고?”

“나도 그놈의 일레드에 쌓인 거 참 많거든요? 그러니까 같이 합시다. 갑판장님이 먼저 죽으면 내가 갑판장님 몫까지 복수해 드릴게.”

특별히 좋은 생각이 있어서 지껄이는 게 아니다.

솔직히 2급 전투함은커녕 호위함 한 척이랑 붙어도 박살 날 낡은 상선 한 척으로 강대국인 일레드를 어떻게 엿 먹이겠어?

그냥 하는 말이지, 그런 것 있잖나? 위로라던가 선의의 거짓말 같은 거.

내 말을 듣고도 한참 동안 굳은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않던 갑판장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진심이냐? 진짜 일레드에게 복수하겠다고?”

“어··· 그게, 기회가 된다면?”

“크크큭, 거짓말은 안 하는구나. 사실 나도 회의감이 들던 참이었다. 그냥 어리석은 늙은이의 아집이었던 게지. 네 말대로 불쌍한 왕녀를 잡아 죽이는 것보다는 너를 키우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는 하구나.”

“어? 진짜요?”

“그래.”

방금 전까지 복수심에 불타던 사람이 이렇게 쉽게 내 설득에 넘어온다고?

설마 날 방심시키고 쓱싹 해버릴 생각은 아니겠지?

요즘 당한 것이 하도 많다 보니 절로 의심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이 정도 리스크는 감수해 보자.

당장 저 사람이 아니면 갑판장은커녕 선원도 모집할 수 없을 판이잖아.

“그럼 잘 부탁해요, 갑판장님.”

“에른스트, 제 이름은 에른스트입니다, 리안 선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드디어 이름을 알게 된 갑판장님, 아니, 에른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막 낯설지 않은 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 <100화> 청년의 나이와 노인의 나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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