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뱃사람의 연애학개론 >
“···그리고 올해 밀농사는 풍작일 확률이 높아서 그런 비율의 거래는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이동간의 손실분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으셨네요. 배가 얼마나 빠른지는 몰라도, 밀이라면 이동 시간이 닷새만 넘어도 유의미한 손실이 발생할 겁니다. 하나 더, 항구에서 세금만 내는 것이 아니고 교역소에도 어느 정도 성의를 표시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루만 거래하고 그만둘 것이 아니라면 말이죠.”
나는 멍하니 쉬지 않고 주절거리는 게론드의 입을 바라보았다.
내가 낸 문제는 애초에 이런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그냥 교역품 두 개를 사고 팔았을 때 수익률과, 지금 시점에서 남은 재고를 처리하기 좋은 항구를 물어본 것이 전부다.
미심쩍기는 해도 회계사 자격이 있다고 했으니 답을 맞출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답을 넘어서 이런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성격과 재능이 이렇게 안 어울릴 수도 있는 건가?
“그래요, 채용하겠습니다.”
“하하하, 잘 생각하셨어요. 그럼 앞으로 2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네? 2년이라니요?”
“2년 후에는 결혼해야 해서요.”
“아, 아~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네, 뭐, 얼마가 되었건 잘해봅시다, 회계사님.”
2년 후에도 저놈은 그 시니아라는 아가씨와 결혼을 못 한다는 것에 내 전 재산을 걸 용의도 있다.
일단 채용을 하기로 했지만 나는 마음이 착잡했다.
솔직히 저 이상한 성격 때문에 채용을 하고 싫은 마음이 49, 능력 때문에 채용하고 싶은 마음이 51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선장이 어리다고 무시하지 않고, 음흉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데다, 경력에 비해 능력도 탁월하니 사정이 급한 나로서는 일단 채용해야 하지 않겠어?
뭐, 물론 엄청난 사기꾼의 큰 한탕을 위한 대국적인 빌드업일 수도 있는데, 그런 의심까지 하면 세상 못산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서, 나와 리버티 호가 막 그렇게까지 공들여서 작업을 칠 만큼 엄청 매력적인 상대는 아니잖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론드에게 리버티 호의 이름과 수리 완료일, 혹시 몰라 일행이 묵고 있는 여관의 이름까지 알려주고 여관으로 돌아오니, 아인델프의 얼굴이 보였다.
“여어, 일등항해사님. 잘 다녀오셨나?”
“선장님. 조금 늦었습니다.”
“하루 정도야 뭐. 어차피 이야기하고 갔던 거잖아? 갔던 일은?”
“덕분에 잘 해결하고 왔습니다.”
“다행이네. 오자마자 미안한데, 내일 나랑 어디 좀 가자.”
“별말씀을요, 어디에 가실 생각이십니까?”
“스코타 후작 저택.”
“풉!”
여유롭게 물을 마시려던 아인델프가 물을 뿜으며 벌떡 일어섰다.
“어디를 가신다고요?”
“아 좀! 앉아, 창피하니까.”
“스코타 후작 저택에서 좀 와보라고 해서 내일 갈 거야.”
아인델프가 떠난 후의 사정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자, 그는 약간 미심쩍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혹시 모르니 네이선 그 친구도 데리고 가시지요?”
“그쪽에서 나쁜 마음을 먹으면 네이선이 열댓 명이라도 소용없어. 딱히 걸리는 것도 없고.”
나는 무심결에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지금도 그때 내 목에 닿았던 서늘한 칼날의 감촉을 생각하면 여전히 이렇게 닭살이 돋는다.
네이선의 실력이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알렌에게는 여전히 민간인 수준밖에 안 될 거다.
“그렇습니까···. 그럼 어떻게 가실 생각이신지?”
“그걸 지금부터 네가 생각해야지.”
“네?”
“나 후작 저택이 어딘지도 몰라. 네가 좀 알아봐.”
“휴우···. 알겠습니다.”
혼자 가도 되는 걸 굳이 왜 아인델프를 데리고 간다고 했겠어?
구글맵도, 대중교통도 없는 이 세상에서 알지도 못하는 목적지를 찾아 움직이는 것은 준비도 많이 필요하고 신경 쓸 일도 많다.
그리고 이런 일은 원래 밑의 사람에게 짬 시키는 방법이 제일 좋은 방법이지.
심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던 아인델프는 밍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미리 마차라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후작 저택이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고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걸어서 갈만한 거리는 아닐 테니까요.”
“그래? 그럼 이거··· 아니다. 나랑 같이 나가자.”
“엇! 같이 가실 겁니까?”
“아니, 너나 나나 이렇게 입고 후작 저택을 방문할 수는 없잖아. 옷이라도 하나 사 입어야지. 일등항해사도 받은 보상금 반납해서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지?”
* * *
이제 선장이니까 선장의 품위에 걸맞은 옷을 사면서 아인델프에게도 옷을 한 벌 사주고, 이왕 나온 김에 다른 사람들의 옷도 한 벌씩 샀더니 생각보다 큰돈이 들었다.
지출이 뼈아프기는 했지만, 원래 쓸 때는 아낌없이 써야 돈값을 하는 것이다.
괜히 누구는 주고 안 주고 하는 말이 나와도 문제였고, 선물이 받는 사람 마음에 안 들어도 역효과니까 말이지.
옷을 받은 아인델프가 마차를 알아본다며 떠나고, 묵직한 선물을 들고 돌아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앗! 선장 오빠다!”
응?
이 목소리는 어제 그 꼬마 아가씨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내가 뒤를 돌아보니 팔랑팔랑 뛰어오는 꼬마 아가씨와 뒤를 따르는 난처한 표정의 아가씨가 보였다.
그녀를 보는 순간 바로 그녀의 이름이 시니아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릴리라는 소녀와 닮아있었고, 게론드의 말에 절로 수긍이 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저 정도 미모에 집안도 괜찮고, 20살이 되기도 전에 회계사 자격을 갖출 정도로 똑똑하다면 게론드가 결혼에 목을 맬 만도 했다.
“선장 오빠! 게론드 오빠를 고용했다면서요? 칫, 릴리도 잘 할 수 있는데···.”
“아, 릴리 아가씨. 여기서 다 뵙는군요.”
내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릴리에게 시선을 옮기며 대답했다.
그러자 허겁지겁 달려온 시니아로 추정되는 아가씨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 아이의 언니인 시니아라고 합니다.”
“아, 네···.”
“릴리! 길에서 뛰지 말라고 했잖니!”
“흥! 언니도 뛰었으면서!”
잠시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은 뭔가 합의를 보았는지 시니아가 겨우 앞으로 나서며 다시 사과했다.
“어제 릴리가 큰 신세를 졌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리안 선장님.”
“아닙니다, 이렇게 거듭 감사를 받으니 민망하네요. 이미 란데르 씨에게 감사는 넘칠 만큼 받았습니다. 덕분에 회계사도 고용했구요.”
“그 회계사가 설마 게론드인가요?”
“네, 아는 분이시군요?”
이미 소꿉친구인 것부터 게론드의 구혼 이야기까지 죄다 알고 있었지만, 예의상 모르는 척을 해주었다.
불쌍하고 힘겨운 선원 인생에 이런 조신한 아가씨랑 이렇게 대화를 나눌 일이 또 언제 있겠어?
그래도 최소한 노숙자랑 별로 차이가 없는 선원 복장이 아니라 새 옷을 입고 있어서 참 다행이다.
“진짜로 게론드를 보내버릴 줄이야···. 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게론드가 말이 조금 그렇지만 착한 아이예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시니아는 스스로 깜짝 놀라 입을 가리며 내게 또 고개를 숙였다.
게론드 녀석을 아주 싫어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애정이라거나 그런 쪽의 감정은 아니고, 우정 내지는 안쓰러움 정도인 것 같아서 게론드의 결혼 계획 성공률은 어제의 판단과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어차피 사랑은 쟁취하는 것 아니겠어?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장소가 그리 좋지 않군요. 자리를 옮겨서 식사라도 같이하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저희가 일찍 들어가 봐야 해서요. 릴리!”
“언니~ 그냥 밥 먹고 가자, 응? 선장 오빠한테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하면 되잖아! 응?”
그래! 잘한다, 릴리!
“릴리, 또 외출 금지 당하려고 그래? 어서 돌아가자.”
“치이··· 알았어. 선장 오빠 다음에 또 봐요!”
“그럼 모쪼록 무운을 빕니다, 리안 선장님. 그럼 저희는 이만.”
잠깐만, 릴리? 그렇게 쉽게 포기한다고?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 리가 없잖아.
어제 울어버릴 기세로 고집을 피우던 릴리와의 괴리감에 당황하는 사이, 두 사람은 빠르게 내게서 멀어져갔다.
그리고 어제 봤던 건장한 두 남자 중의 한 명이 내게 슬쩍 눈인사하고는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
나 지금 까인 거지?
* * *
다음 날 아침, 아인델프가 섭외한 마차의 좌석에 엉덩이를 두들겨 맞으며 불편한 표정으로 자꾸 자세를 바꾸는 아인델프에게 물었다.
“이봐, 일등항해사. 우리에게 연애, 사랑, 결혼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 것일까?”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렇잖아, 뱃놈 중에 결혼한 사람 봤어? 선주님도, 갑판장님도, 너도, 나도, 멍청이들도 죄다 창녀에게 하룻밤 몸이나 풀지, 결혼은커녕 연애도 못 하잖아. 사랑이 뭔지도 모를 거야.”
“드웰 선주님은 결혼하셨다던데요?”
“뭐?!”
아니, 그 양반이 결혼했다고?
그런데 왜 나한테 한마디도 안 했지?
그보다, 그럼 무엇보다 가족들을 먼저 보러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전에 술에 취해서 말씀하시기는 했는데, 아는 척하지는 말아 주십쇼. 7년이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남을 시간이잖아요. 아시다시피 그 노던테라 탐사라는 게 당시에는 워낙 허황된 이야기이기도 했고··· 가족들이 좋아하지는 않았겠죠.”
“그래도 가족 먼저 찾아보는 게 정상 아닌가?”
“고충이 많으신 것 같았습니다. 확인은 하고 싶은데 불행할 것이 뻔한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뭐, 그런 모양입니다.”
가장이 몇 달만 가장 역할을 못 해도 무너질 정도로 이 세상의 평민 가정은 취약하다.
수입이 끊기건, 외부의 폭력에 대항할 수단이 없건, 가장이 자리를 비우면 남은 가족들은 정말 손쉽게 망가진다.
우리 집도 아버지가 실종되고 나서 바로 무너지지 않았던가?
선원들이 결혼을 못 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점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드웰은 무려 7년이나 가정을 비웠으니, 진작 죽은 사람으로 취급되었을 것이 뻔하다.
성인이 된 큰아들이 있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남겨진 아내나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지.
“그럴 수도 있겠다. 악!”
“왜 그러십니까?”
“엉덩이··· 엉덩이가 너무 아파! 이럴 줄 알았으면 임대 창고에서 내 침대 충전재라도 가지고 올 걸 그랬어!”
“그, 저도 참, 안 타본 것은 아닌데 영 적응이 안 되는군요.”
그래, 차라리 배가 낫다.
이건 탈 것이 아니고 마치 고문 도구 같잖아?
타이어와 서스펜션은 개뿔, 의자도 딱딱한 나무로 되어 있어서 승차감이라고 말할 가치조차 없다.
그리고 길이 왜 이렇게 울퉁불퉁한 거야?!
직접 타보니 걷는 속도보다 빠르다는 것 외는 장점이 전혀 없는 게 이 마차라는 녀석인 것이다.
더 두려운 것은, 아직 반도 못 간 이 길이 편도가 아니라 왕복이라는 점이겠지.
점심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 겨우 후작 저택이 있다는 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마부에게 마을에서 기다리라고 말한 뒤 시큰한 엉덩이와 꼬리뼈를 문지르며 거대한 4층 건물을 향했다.
누가 저게 후작 저택이라고 말해주지는 않았는데, 그냥 보면 알 수 있었다.
부지만 300평쯤 될 것 같은 저택이 후작 저택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가 후작 저택이겠어?
“정지! 여기는 스코타 후작 각하의 저택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우리가 정문으로 다가서자, 이미 우리를 주시하고 있던 경비 두 명이 허리에 찬 칼자루에 손을 올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역시 후작 저택의 경비라서 그런지 경계 상태도, 착용한 복장도 보통이 아니다.
“리버티 호의 선장, 리안이라고 합니다. 후작 저택에 방문하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안에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리버티 호? 아, 잠시 기다리시오.”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는지 바로 평어로 말투를 바꾼 남자는 다른 경비와 눈짓을 주고받더니 한 명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들어간 경비와 함께 나온 젊은 남자는 우리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리버티 호의 선장님? 다른 한 분은 누구시죠?”
“이쪽은 리버티 호의 일등항해사 아인델프라고 합니다. 저와 함께 왔습니다.”
“으음, 한 분이신 줄 알았는데··· 뭐,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아참, 제임스, 이분들 무기 좀 잠시 보관해 주시겠어요?”
그러자 우리를 주시하던 제임스라고 불린 남자가 무뚝뚝하게 손을 내밀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와 아인델프는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서 건네주었다.
그런데 이 사람도 수전증인가?
손이 조금 떨리는 것 같은데?
< <103화> 뱃사람의 연애학개론 > 끝